26. 예인씨. 집이 어디에요? 170828 수정
오후 6시 20분, 용산구에 위치한 그랜드하이 호텔 앞.
약속 시간에 맞춰 급히 도착했다.
하지만 난 차마 바로 호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호텔이라니 설마······ 아니지, 괜한 오해겠지?’
멍하니 호텔 정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탓이다.
‘영 종잡을 수 없다보니 당황스럽네. 그냥 호텔일 뿐인데.’
무작정 들이대기, 끝까지 따라다니기, 동의 없이 합승하기 등.
그동안 예인이 저질러왔던 행동 탓에, 지레짐작하고 기겁한 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호텔 레스토랑서 식사하자는 단순한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래. 괜한 오해야. 주진형! 휘둘리지 말고 들어가자.’
난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그랜드하이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요 며칠 새 자주 왔던 터라, 호텔 로비의 풍경이 익숙하게 보였다.
주변에 예인은 보이지 않았다.
난 휴대전화를 꺼내 예인에게 전활 걸었다.
“김 기자, 나 지금 호텔 로빈데 어디에요?”
-지하 1층 스테이크 하우스에요.
이미 자릴 잡고 있었는지 식당 안의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두 가지 가정 중, 그나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맞은 덕분이다.
“알겠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네.
간결하게 통화를 마친 뒤, 난 로비 가운데에 보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몸이 점차 지하에 가까워질 무렵, 내 눈엔 여러 레스토랑들이 들어왔다.
난 영문으로 스테이크 하우스라 적힌 표지를 발견하고, 그 가게로 향했다.
“예약 하셨습니까?”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계산대의 직원이 방긋 웃으며 물어왔다.
“아, 일행이 먼저 와 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전 주진형, 일행은 김예인입니다.”
“아, 그분 일행이시군요.”
예약기록부를 펼쳐보려던 직원이, 이름을 듣곤 기억났다는 듯 소릴 냈다.
이 레스토랑에 예인이 자주 오는 편은 아닐 텐데.
어째선지 직원의 뇌리에 크게 각인된 모양이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난 앞서가는 직원을 따랐다.
오래 걸리지 않아, 혼자 앉아있는 예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인의 얼굴을 보게 되자, 직원의 반응을 이해했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성.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게 예인이다.
“손님, 일행 분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예인에게, 직원이 말을 걸었다.
예인은 그제야 날 쳐다보곤 인사를 건넸다.
“왔네요. 앉아요.”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
어쩐지 내게 집중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아니, 비싼 거 대접하라고 했다고 이런 호텔 레스토랑까진 부를 필요 없었는데-”
난 분위기를 풀기위해 대화를 시도하며 의자에 착석했다.
허나 예인은 묵묵부답.
내 눈과 시선이 맞지 않은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뭘 보는 거지?’
예인의 시선은 내 좌측 뒤를 향해있었다.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나도 목을 돌렸다.
“누구에요? 아는 사람이에요?”
그곳에 평범하게 생긴 40대 남자 둘이 정겹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있었다.
남자 둘이 정겹다는 게 묘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웃고 있는 얼굴은 좋아보인다.
“LC CNS.”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예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니지, 앞에 ‘LC’라고 붙으면 국내 재벌인 LC그룹의 계열사란 뜻.
“그 회사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일코코아.”
순간, 망치로 전두엽을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 여자가 그럼 그렇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터졌다.
그리고 호텔이라는 이유로 묘한 오해를 했던 내가 다 부끄러워졌다.
“진짜 김 기자답네.”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 번 이적우 대표와의 우연한 만남 때부터, 예인은 계속 내일코코아를 추적했을 터.
결국 오늘 이 호텔로 나를 부른 건, 우연히 시기가 겹쳤을 뿐.
본래 목표 대상은 저기 앉아있는 두 남자였다는 거다.
“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따라다닌 거예요?”
내가 묻자 예인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어제요.”
“날 호텔로 초대한 것도, 저 사람들 때문이에요?”
“여기서 움직일 수가 없어서요. 어차피 레스토랑이니 상관없죠?”
상관없긴 하다.
아니, 과분해서 그렇지 ‘비싼 곳’이라는 요구엔 호텔 레스토랑이 가장 부합한다.
“나야 아주 좋죠. 주문해도 되죠?”
뭐 어떤 이유에서건, 난 비싼 고기만 뜯어내면 그만 아닌가.
난 두꺼운 메뉴판을 펼쳐 판매하는 음식을 살폈다.
‘비싼 거, 비싼 거.’
흔치 않을 기회다.
난 스페셜 코스 메뉴를 훑으며 미소 지었다.
정말 상당한 가격이다.
일반 고기집이라면 5~6인분은 먹을 정도.
“코스로 하죠. 호텔 레스토랑에 왔는데.”
난 예인을 놀리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다 못 먹을 수도 있어요.”
예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왜요? 여기 오기 전에 따로 뭐 먹었어요?”
“저 사람들, 들어 온지 꽤 됐어요. 자리 옮길지도 몰라요.”
“······”
그러니까, 저 두 사람의 거취에 따라 내가 먹을 음식의 양도 달라진단 얘기다.
“김 기자. 오늘 나 밥 사주기로 한 거 아녔어요? 왠지 주객전도가 된 느낌인데.”
“사는 건 변함없어요.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렇지.”
이 휘황찬란한 레스토랑에 홀로 코스요릴 먹는 날 상상했다.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뭐가 됐든, 예인과 나 사이에 눈곱만큼도 오해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 몰라요. 난 오늘 대접받는 입장이니까 다 시킬겁니다.”
“마음대로.”
짤막한 허락이 떨어졌다.
난 음식 주문을 위해 난 손을 들어 급사를 불렀다.
“여기 정식 B두개 주세요. 소고기는 안심으로 둘다 주시고. 전 레어로, 김기자는?”
“미디움이요.”
“그렇게 두 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급사가 떠난 뒤, 난 유리잔에 든 물을 벌컥 마셨다.
마주앉은 예인은 여전히 기자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생 기자인가.’
집요함과 뻔뻔함은 정말 성격적으로 타고났나 싶고.
머릿속에는 온통 취재와 기사 밖에 없는 듯 보이는 저 눈.
이렇게 되면 패배자라 놀려대려던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뭔데요. 저 두 사람은.”
그럴 바엔 이 참엔 내 쪽에서 예인에게 정보를 캐내보기로 했다.
“내일코코아 유준영 부사장. 옆에는 LC CNS 윤정호 팀장이에요.”
예인은 별다른 저항감없이 내게 술술 이야길 털어놨다.
“그 두 사람이 왜? 만나고 있는데요?”
“그건 몰라요. 이적우 대표가 금감원과 접촉한 거랑 관련 있다는 거 말고는.”
“관련 있는 건 어떻게 아는데요?”
“유준영 부사장이 코코아 핀테크사업부 부장이거든요.”
핀테크(FinTech), 파이낸셜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신종용어.
최근 유행을 타듯 언론이 대대적으로 관심을 갖는 분야기도 했다.
나야 많이 들어보기만 했지, 실질적으로 아는 내용은 없다.
‘어쨌든 이야길 들어보니 이런 논리구만.’
내일코코아가 금융감독원과 의논할만한 일은 당연히 금융 쪽 일.
아직까지 내일코코아가 내놓은 금융서비스는 전무, 신서비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 신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핀테크사업부 부장이 LC CNS와 접촉 중이라는 거다.
‘사업부서가 타사와 접촉한다는 건, 사업협력······이겠지.’
확실히 예인이 흥미로운 일을 붙잡은 모양이다.
나 또한 관심이 동했다.
지난 번 이적우 대표로부터 신서비스가 나온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어떤 형태일지는 미지수였으니까.
“그래서, 저 두 사람이 준비 중인 특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일단은요.”
“그런 중요 인물들을 나한테 털어놔도 되겠어요?”
내가 씩 웃으며 묻자, 예인이 정면으로 눈을 맞췄다.
“일단은요.”
“······”
재미없는, 아니 기묘한 반응이다.
“뭘 믿고?”
난 살짝 당황했다.
솔직히 관심은 동해도 기사를 쓸 생각이 없는 건 맞다.
남의 취재를 가로채는 건 성격하고 맞지도 않고.
“주 기자는 이 건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 없을 테니까.”
“아닌데, 나 관심 많은데.”
“상관없어요. 기사는 안 쓸 테니까.”
“······그럴까요?”
쉽게 단정 짓는 예인에게, 난 불확실한 답만 남겼다.
약간의 불쾌함과 얼떨떨함.
원치 않게 속을 간파 당했을 때의 기분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인의 말대로 난 이 건을 나서서 취재하거나 기사 쓸 생각은 없다.
이미 연달아 홈런을 치기도 했고, 준비 중인 내용은 따로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를 예인이 모두 알리는 없다.
“지난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일코코아의 근황을 의식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러네요. 배달갑에 정신이 팔려서······”
“쓸 마음이 있었으면, 내게 정보를 주지도 않았을 거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요, 그래. 김 기자 말대로 네요.”
어쩐지 분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끝내고, 다시 취재 얘기를 하던 도중.
주문한 스테이크가 우리 앞에 놓여졌다.
“오호,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네.”
다행이랄까, 내일코코아 유 부사장과 LC CNS 윤 팀장도 아직 식사 중이었다.
난 들뜬 마음으로 피가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고기는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오랜만에 혀가 호강하네요. 근데 이거 괜찮겠어요? 비쌀 텐데.”
“괜찮아요. 돈은 많으니까.”
“김 기자도 박봉인 건 똑같지 않아요? 기자가 뭔 돈이 있다고.”
“회사 법인카드있어요. 이미 다 보고 드렸고.”
“······”
오늘 따라 여러 차례 놀란다.
보고하는 용기와 이를 받아들이는 이디넷의 아량.
그리고 예인을 농락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패배감까지.
“아, 그럼 김 기자가 사주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 돈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흔들림 없는 반박이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졌다는 표정으로 그저 고기를 썰었다.
그러나 이 식사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를 먹기 시작한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예인의 두 목표물이 레스토랑 밖으로 이동한 것이다.
“전 따라갈 거예요. 어떡할래요?”
움직이는 두 사람을 눈으로 쫓으며 예인이 물어왔다.
“와 너무하네. 밥 좀 느긋하게 먹게 해주지.”
“전 혼자가도 돼요.”
내 투덜거림에 칼같이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인은 바로 짐을 챙겨 자리서 일어났다.
별 수 있나.
난 남은 고기들을 빠르게 입에 넣었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인 건 맞다.
하지만 이런 레스토랑에서 혼자 먹을 수 있을만큼 철판이 뚜껍진 못했다.
“알았어요. 같이 일어나죠. 대신 식사는 나중에 다시 사요.”
나도 일어났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예인의 추적을 함께하게 됐다.
유준영 부사장과 윤정호 팀장, 두 사람은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호텔 내 라운지 바로 간단히 자릴 옮긴 거였다.
“바로 옆으로 붙죠.”
예인은 두 사람이 앉은 바 좌석 옆으로 다가갔다.
지나치게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말릴 새는 없었다.
이미 망설임 없이 착석한 예인을 따라서 나도 의자에 앉았다.
“윤 팀장도 알다시피 요건 진짜 큰 건이라고.”
확실히, 유준영 부사장의 목소리가 또렷이 좌측 귀에 들려온다.
“칵테일 어때요?”
예인이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의심사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라는 요구다.
“······칵테일 잘 모르는데. 어, 블랙러시안? 이거 맛있어 보이네요.”
내 말을 들은 예인은 곧장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블랙러시안 두잔 주세요.”
“어, 그거 알아요? 블랙러시안?”
“아뇨.”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얼이 빠진 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무표정한 예인을 보기만 했다.
“에이~ 부사장님이 잘 밀어주면 되는 거지. 우리가 뭐 기술력 없는 곳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내부서 말 많을 거야.”
“알지, 그래도 은혜 잊지 않을게.”
유 부사장과 윤 팀장, 두 사람은 꽤나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확실히 업무와 관련된 듯 했다.
“아무 얘기나 해봐요.”
두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내게, 예인이 훅 요구했다.
침묵하고 있는 남녀 일행의 부자연스러움을 의식한 모양이다.
“어······김 기, 아니 예인씨. 집이 어디에요?”
“······”
라운지 바의 아늑한 조명 아래.
오늘 처음으로 예인의 표정이 달라져보였다.
뭐 때문일까.
예인씨라고 불러서? 아니면 집을 물어봐서?
‘그래, 나도 어색하다.’
아무래도 입에 붙지 않은 호칭이다.
때마침 바텐더가 주문한 칵테일을 내놓았다.
난 잔을 들고 술을 쭉 들이켰다.
술기운 덕분인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우린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이야길 나눴다.
애초 이곳에 왔던 목적을 잊어버릴 만큼 몰두해서.
“으아아아!”
그리고 다시 정신을 번쩍! 차렸을 땐.
난생처음 보는 방 침대 위에 내가 누워있었다.
속옷만 입은 채로.
일으킨 상체를 돌려 옆을 보자, 같은 이불 속에 예인이 잠들어 있다.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