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정보를 공급받고 싶습니다 170828 수정
“합!”
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상황 파악도 못했는데, 예인이 눈을 뜨면 곤란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곤란하다.
‘아니겠지······아닐 거야······’
무사고를 기원하며, 난 조용히 예인이 덮고 있는 이불을 살짝 걷었다.
드러난 건 내 기대를 처참히 짓밟는 예인의 맨살.
게다가, 속옷도 안 입고 있었다.
‘하아-’
마음속으로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마를 부여잡고 어젯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분명 호텔 안에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겼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맞다, 내일코코아와 LC CNS 임원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니까.
‘그리고······칵테일을 마셨지.’
그래, 러시안 블랙.
아니, 블랙 러시안이었다.
조금씩 기억이 맞춰지고 있다.
우린 바로 옆에 앉은 두 사람에게 의심사지 않도록, 사소한 잡담을 나눴다.
주로 내가 말했고, 예인은 대부분 듣기만 했다.
아마도 옆의 두 사람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랬던 듯싶다.
어쨌든 우린 잔을 부딪혀가며 술을 마셨는데, 그 시간이 꽤 길어졌다.
‘음- 그 두 사람이 생각보다 오래 이야길 나눴지.’
결국 우리도 칵테일을 추가 주문했고, 점차 술기운이 오른 내가 진심으로······
술을 마셨다.
‘기억, 났다.’
중간부터 난 취기에 들떠 있었다.
헌데 그 뒤로는 도저히 장면이 이어지질 않았다.
‘하아- 며칠 잠을 못 잤더니. 칵테일 몇 잔에 필름이 끊기다니.’
난 다시 세상모르고 누워있는 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이런 미인이 바로 옆에서 자는 모습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절대 사양이다.
난 우선 조심스레 침대를 빠져나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6시네.’
독한 술을 마신 덕분인가, 다행히 숙취는 거의 없다.
난 샤워실로 들어가 빠르게 몸을 씻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챙겨 입었다.
“김 기자. 김 기자, 일어나 봐요.”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뒤 난 예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
대답이 없다.
난 다시 한 번 예인을 깨웠다.
“김 기자- 미안한데 좀 일어나 봐요.”
“······네. 일어났어요.”
예인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내게 대답했다.
“어, 그게 저기, 미안한데 내가 필름이 끊겨서······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최대한 기가 죽은 것처럼 굴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한 거라면, 최악의 경우 경찰서와 법원을 오갈 수도 있다.
“······그러시겠죠.”
“예-? 예에에?”
예인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칵테일 두 잔에, 그렇게 뻗는 사람 처음 봤어요.”
예인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럼 여긴 어떻게?”
“도움을 받았죠.”
“도, 도움이요?”
“네.”
스르르, 예인이 눈을 떴다.
그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난 잠시 처한 상황을 잊고, 세상 청순한 얼굴로 날 보는 예인의 눈에 빠졌다.
“왜 그렇게 앉아있어요?”
잠깐의 침묵 후, 예인이 물었다.
내가 무릎 꿇고 있는 걸 그제야 지각한 거다.
“······혹시 모를 사죄의 시간에 대비해서요.”
난 그렇게 대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인은 그런 내 말을 무시한 채 다시 어젯밤 일을 설명했다.
“주 기자가 취해서 쓰러졌을 때. 내일코코아 유준영 부사장하고 CNS 윤정호 팀장이 부축해줬어요. 주 기자 집을 몰라서 그냥 호텔 방 잡은 거고.”
이 말이나 예인의 태도 등을 놓고 보자면, 내가 큰 실례를 범한 건 아닌 듯 했다.
“그, 그렇군요. ······그럼 왜 우리가 같은 방, 같은 침대에 이렇게 누워있던 거죠?”
물어봐야 할까, 묻어둬야 할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난 잠시 고민했던 질문을 그냥 던지고 말았다.
“가장 저렴한 방 중엔 침대가 두 개인 게 없어서요. 이 호텔 룸도 23만원 이더군요.”
“······”
“걱정마요. 결제는 내가 했으니까.”
예인이 침대 옆 장식대에서, 영수증을 집어 내게 건넸다.
[그랜드하이 호텔 그랜드 룸, 퀸사이즈 침대, 1박 230,000원]
가격을 실제로 확인하니 입이 떡 벌어진다.
“이걸 이디넷 법인카드로?”
“미쳤어요?”
예인이 평이한 어조로 날 타박했다.
이런 부분은 또 묘하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긴 법인카드로 호텔을 투숙하면, 욕도 욕대로 먹고 이상한 소문도 나겠지.
이디넷 공식 똘아이긴 하나, 예인도 그정도 개념은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난 왜 김 기자랑 같은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거예요?”
압박적인 호텔 비를 보고나니, 슬슬 언성이 높아졌다.
“난 잘 때 원래 벗고 자요.”
너무나 당당한 예인의 말에,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기막힌 돌아이란 걸 내가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그럼 내 옷은 왜 벗겨졌는데요.”
“더러운 옷 입은 채로 같이 자긴 뭐해서, 제가 벗겼어요.”
“으아아아!”
난 머릴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질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왜 꼭 같이 자야해요?”
그래,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연인도 아니고, 남남인 우리가 같은 침대서 굳이 잘 필요는 없다.
“잘 수 있는 소파도 없고. 이불도 하난데. 따로 잘 이유가 없죠.”
“이유가 왜 없어요! 다 큰 남녀가! 한 방에 어? 같은 침대에, 어? 사람 오해하게!”
“다 컸으니까, 상관없죠.”
“······”
묘하게 명쾌한 답변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뭐 그렇긴 하지, 애가 아니라 성인 둘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주 기자는 인사불성이었어요. 깨어있다 해도 다를 바 없겠지만.”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분명히 내 결백을 입증해주는 말인데, 어째선지 속이 쓰려왔다.
“그래요, 그래. 그렇다고 합시다.”
진이 다 빠진 난 백기를 들었다.
내 신변에 큰 곤란이 생길 일은 없다는 걸 알았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우리 출근해야죠. 아직 시간 있으니까 씻고 나와요. 난 로비서 기다릴게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예인이 침대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가려주던 이불이 흘러내린다.
“우악, 우악, 우아아악!”
놀란 내가 홱 고갤 돌렸다.
허나 이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인의 상체를 봐버린 후였다.
“왜 그래요?”
태연자약하게 예인이 물어왔다.
“속옷! 안 입었잖아요! 다 보이니까 빨리 입어요.”
“난 또.”
난 또, 라니.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예인은 알몸으로 방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난 돌아버릴 것 같은 정신으로 황급히 호텔 로비에 내려왔다.
기가 막히게 꼬이고 꼬인 아침이다.
소파에 앉아 자동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게 된다.
“가요.”
어느새 말끔히 준비를 마친 예인이 내려왔다.
난 대답 하지 않고 그저 자리서 일어났다.
함께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정문을 나서자, 상쾌한 아침 공기가 우릴 맞았다.
“그래서 나 때문에 어제 미행은 실패했네요.”
딱히 미안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일단 말이라도 꺼내봤다.
“성공했어요.”
“에?”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난 놀라서 예인의 눈을 봤다.
예인은 역시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연락처, 모두 받아놨거든요.”
“어, 떻게?”
신기함과 의아함, 두 가지 감정이 솟았다.
“주 기자 부축해준 것, 고마우니 나중에 사례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주던데요.”
하긴, 이런 얼굴을 가진 여자가 연락처를 알려달라는데.
불쾌하게 여길 사람은 별로 없겠지.
“뭐, 잘됐네요. 이거 어떻게 보면 내 덕 아니에요?”
“맞아요.”
뻔뻔한 내 말을 예인이 순순히 인정했다.
“좋아. 그럼 김 기자도 언젠가 꼭 내 취재 도와줘요. 그래야 사람이지.”
내가 인륜을 빌미로 예인을 협박했다.
“알았어요. 가능할 때라면.”
예인은 그다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제 개떡같이 대접한 식사도, 제대로 다시 대접하시고!”
난 예인에게서 약조를 받아낸 뒤 헤어졌다.
오전 8시.
부랴부랴 움직였지만 평소보단 좀 늦게 사무실에 출근했다.
다행이랄까, 먼저 와있는 사람은 없었다.
난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펼치고 이메일 함부터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주 기자님. -고글코리아 정이영숙]
정이영숙 상무의 메일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내가 보낸 메일의 답신이다.
“꽤나 빨리 답해주잖아?”
정이영숙 상무는 고글코리아라는 유명 기업의 수장 급 인사다.
그런 인사가 처음 내게 이메일로 연락 달란 말을 했을 때, 난 솔직히 정 상무가 초짜기자를 상대하기 싫어서 그런 줄로 알았다.
하지만 정말 이메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게 편했던 모양이다.
[제가 언론대응 총괄을 하고 있긴 하지만, 미튜브 홍보담당인 선주경 부장과 이야기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선 부장 이메일 주소를 첨부하겠습니다. 그리고 금주는 이미 미팅이 잡혀있어서 일정잡기 힘들 것 같······]
‘후, 역시 고글 임원을 다짜고짜 보자는 건 무리인가.’
난 메일 내용 안에 적힌 선주경 부장의 이메일 주소를 클릭했다.
새로 뜬 메일쓰기 창에 글을 적어나갔다.
정 상무에게 보냈던 것과 동일하게, 미튜브 관련 취재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오늘 내로 답장이 올지 확신이 서진 않았으나 상관없다.
어떻게든 접근하면 되는 일이니까.
“휴우.”
아직 뭔가 제대로 진행된 건 없지만, 그래도 메일을 보내놓으니 한시름 덜어내는 기분이다.
KMR의 보도자료가 내게 온 건 사흘 전.
즉, 내게는 기사를 쓰기까지 나흘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전에 고글과 KMR, 모두 접촉을 끝내놓기만 하면 돼.’
머릿속으로 계획을 차분히 정리 한 후, 오전업무를 시작했다.
곧 모든 기자들이 출근했고, 외신 번역을 마친 난 발제기사를 작성했다.
일주일 후의 보도자료 중, 그다지 파급효과가 크지 않은 내용을 전화로 확인한 거였다.
[안녕하세요. 주진형 기자님이시죠?]
한창 기사를 작성하던 도중, 휴대전화에 처음 보는 연락처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내가 메시지를 보낸 지 10초도 되지 않아, 즉답이 도착했다.
[전 증권 일을 하고 있는 장도현이라고 합니다. 기자님 혹시 시간 되시면 뵐 수 있을까요?]
증권 일?
난 경제지 기자도 아닐뿐더러, 관련 기사를 쓴 적도 없다.
이 사람이 왜 내게 관심을 갖는지 잘 이해가 안됐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내가 다시 물었다.
답장은 또 칼같이 온다.
[자세한건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주 기자님과 정보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정보거래······라고?’
[절대 기자님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장도현의 메시지가 연달아 이어졌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전 여의도에 있습니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
난 곰곰이 생각했다.
증권 쪽 일을 하는 사람이, 기자에게 ‘정보거래’를 제안한다.
내게 유용한 정보를 주겠다는 의미인가?
‘혹시나 자신이 가진 정보를 돈 받고 팔겠다거나?’
그런 거라면 딱히 필요치 않다.
내게는 일주일 후의 이메일이 날아오고 있으니까.
헌데 약간의 호기심은 생겼다.
‘과연 어떤 수준의 정보를 거래하려는 건지, 또 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난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럼, 점심시간 전에 잠시 뵙죠. 11시 반쯤, 여의도 사거리요.]
그렇게 문자를 전송하니 OK승낙이 돌아왔다.
두 시간 뒤.
난 영기에게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보냈다.
[영기씨, 난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 점심은 사무실서 먹고, 1시에 여의도역에서 보자. -주진형]
[네 알겠습니다. -박영기]
짐을 챙긴 후, 나는 팀장에게 보고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높은 빌딩들이 가득 찬 여의도 거리엔, 벌써부터 식당을 찾아가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그들 사이를 잘 피해가며 난 여의도 사거리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어디계신가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곧 장도현으로부터 통화가 걸려왔다.
-네, 주 기자님. 전 산업은행 건물 쪽입니다.
“그럼 지금 건너갈게요.”
신호등이 바뀐 뒤, 난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진형 기자님?”
은행 건물 앞, 말끔한 정장차림의 30대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네-. 장도현씨?”
“아, 맞으시군요. 생각보다 젊으셔서 긴가민가했습니다.”
도현이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혹시 점심 선약이 있으신가요?”
“아뇨.”
난 고갤 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간단히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정보거래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후후.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조용한 곳으로 옮기시죠.”
난 도현을 따라 근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이해합니다. 당황스러우신 거. 전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도현이 내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미래금융투자 법인영업본부 장도현 과장]
증권 일을 한다더니, 말 그대로 증권사 직원이었다.
명함 확인 후 난 다시 도현의 얼굴을 봤다.
도현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주 기자님으로부터 정보를 공급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