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과정이고 나발이고 없잖아!?
“연락처요?”
선주경 부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긴장, 아니 당황.
답을 알려줄 수 없는, 그러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았을 때의 어색함이다.
“네. 지상파 쪽도 취재하고 싶은데 아는 분이 없어서요. 미튜브를 통해 지상파 콘텐츠가 얼마나 공급되고 소비자 반응이나 실적 등 영향력에 대해서 확인해볼까 합니다.”
난 막힘없이 이유를 설명했다.
취재 이유에 미튜브를 엮어 들어감으로써, 선 부장이 회피할 수 없게 만든다.
내가 생각해도 촘촘한 그물이다.
과연 이 그물에 사로잡힌 선 부장이 과연 어떻게 빠져나올지.
난 웃음을 억눌러가며 대답을 기다렸다.
‘딜레마라고 하지.’
연락처를 알려준다면, 내가 KMR과 접촉하게 된다.
그 경우 내 귀에 콘텐츠 공급협상에 대한 전말이 들어오겠지.
반대로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으면, 나로부터 큰 의심을 사게 된다.
표면적으로 거부할 명분이 없으니, KMR측과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실토하는 꼴이다.
“······음, 연락처는 저희가 허락 없이 함부로 알려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나왔나.
그다지 참신한 방어는 아니다.
“그럼, 그쪽에 여쭤 봐주세요. 제가 취재하고 싶다고.”
난 뜸 들이지 않고 당당하게 부탁했다.
선 부장도 조금씩 느끼고 있겠지.
처음 봤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내 태도가 달라져있다는 걸.
“아아, 네에. 제가 그럼 한 번 의견을 물어보겠습니다.”
“기사, 빨리 쓸 생각이거든요. 죄송한데 바로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나 시간 끌기 작전이라면 사양이다.
난 선 부장을 막다를 골목까지 몰아넣었다.
“······알겠습니다.”
선주경 부장이 식탁위에 올려놨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잠시 조작한 후, 다시 전화길 내려놨다.
“메시지 보내놨어요. 답 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왜인지 선 부장이 진짜로 보냈다는 믿음이 서질 않았다.
‘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단순히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거짓말 할린 없겠지.’
일단 난 믿어보기로 했다.
혹여 여기서 직접 접촉이 불가해진다 하더라도,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니까.
“네, 감사합니다.”
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이영숙 상무님은 많이 바쁘신가 봐요? 금주는 아예 일정잡기 어려울 거라 하시던데.”
내가 화제를 바꿨다.
난 KMR측으로부터 답장이 올 때까지 선 부장을 계속 볶아볼 생각이다.
“아, 상무님은 저보다 더 바쁘시죠. 아마 다음 주도 일정이 꽉 차 계실 거예요.”
내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선 부장이 밝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본사와 직접 대화하는 것도 거의 상무님인데다가, 한국에서도 준비 중인 행사들이 많아서요.”
“아아, 기사 봤습니다. 고글캠퍼스 말씀하시는 거죠?”
난 이곳에 오기 전 봤던 기사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고글캠퍼스는, 고글이 스타트업을 위해 만든 창업 지원 공간이다.
곧 고글캠퍼스 서울이 완공될 예정이다.
“네 그것도 있고 뭐 다양하죠. 고객센터 확충도 있구요.”
확실히 예민한 부분을 물을 때완 다르게, 선주경 부장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선 부장님은 미튜브만 맡고 계신건가요?”
“네. 지금은요. 사실 미튜브 전담하게 된지는 얼마 안됐어요.”
“아 그러시구나.”
“옆에 계신 분은, 박 기자님이라 하셨죠?”
선 부장이 영기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하긴, 한 마디 말도 없이 앉아만 있는 기자라니.
그 자체가 이상해서라도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다.
“네, 넷.”
영기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 끌길 원하는 나로썬 잘 된 일이다.
“아, 박 기자는 인터넷 2진을 맡고 있어요.”
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시작하신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선 부장이 영기의 경력을 콕 집어 묻고 있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하면, 속일 수도 없다.
“네에, 이제 두 달 쯤 됐어요. 그래도 꽤 잘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보란 듯 이 영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선주경 부장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내일코코아 합병과 배달통 인수기사 덕분에, 영기의 이름은 나름 업계서 퍼져있는 상태였다.
“아 그러셨군요. 제 옆에 앉은 수경씨도 두 달 정도 됐거든요.”
선 부장이 옆에 앉은 직원, 수경을 보며 말했다.
“오, 인연이네요.”
실제론 하나도 관심 없는 내용이지만, 난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했다.
내 머릿속엔 KMR로부터의 답변이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 후 20분간.
선주경 부장과 난 간단한 신변잡기와 업계근황에 대해 대활 나눴다.
그때까지 KMR측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음, 주 기자님,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요.”
결국 선 부장이 먼저 파하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시죠. 저 지상파 쪽에서 연락오시면, 문자나 이메일로 알려주세요.”
어쩔 수 없다.
나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힘들어, 선 부장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해 드릴게요.”
웃으며 선 부장이 대답했다.
그 얼굴을 보며 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해보고자 잠시 자존심을 덮어두는.
그런 사람의 냄새가 났다.
“그럼 요청해주신 BJ분들도 확인해서,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난 고갤 끄덕였다.
우린 선 부장의 배웅을 받아, 사무실 입구의 승강기 앞으로 돌아갔다.
승강기가 1층에서 22층으로 올라오는 동안, 난 KMR측 연락이 오길 간절히 바랐다.
허나 이뤄지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또 뵙겠습니다.”
곧 승강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선주경 부장은 빨리 들어가라는 듯, 바로 잘 가라며 인사할 뿐이었다.
“······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영기는 승강기에 탑승했다.
승강기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그 짧은 찰나.
문틈 사이로 비웃는 것처럼 미소 지은 선 부장이 보였다.
“······!”
문이 닫힌 승강기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하아-”
“왜 그러세요, 선배?”
내 탄식을 듣고, 영기가 순진한 얼굴로 물어왔다.
“느낌이 좋지 않아. 지상파 쪽 연락처, 아무래도 선 부장한테선 못 얻을 것 같아.”
“나중에 알려주지 않을까요?”
“아냐······ 기다리지 말고 직접 가보는 게 낫겠어.”
“네? 어딜요?”
“미튜브에 지상파 콘텐츠를 공급하는 곳은 KMR이란 신생기업이야. 상암동 DMC에 있어. 거기로 간다.”
마포구 상암동, DMC(디지털미디어시티)라고 불리는 곳.
거기에 방송사 SBC 사옥이 있다.
우리의 목표인 KMR은 그 사옥 안에 위치한다.
나와 영기는 테헤란금융센터를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탔다.
역삼역에서 DMC역까지는 약 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사이 선주경 부장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이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복잡한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전화번호를 넘기는 일이다.
문자 메시지 두 개만 오가면 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다?
연락처 주기 꺼려할 이유가 명백하니, 고의적으로 늦추고 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영기씨, 택시 좀 잡아줘.”
“네, 넵.”
DMC역사를 나온 난, 영기에게 택시를 부르도록 하고 휴대전활 꺼냈다.
저장해 둔 연락처를 검색해 곧장 전활 건다.
몇 번의 신호음 뒤, 상대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네, 코리아미디어렙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라고 합니다.”
-······디지털투마치요?
좀 심하게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아, 네 어쩐 일이세요?
내가 기자라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
SBC또한 방송기자들이 소속돼있고, 영향력 있는 방송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내가 기자라 해서 특별할 게 없단 의미겠지.
접근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미튜브에 지상파 콘텐츠 공급하시는 거 관련해서 취재를 좀 하고 싶은데요.”
-취재요? 음, 잠시 만요.
직원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대표님~ 디지털투모로우? 거기 기자가 취재를 하고 싶다는데요.
‘뭐냐 이 적나라함은. 나한테 안 들릴 거라 생각 한 건가.’
그 때 도로변에 있던 영기가 내게 뛰어왔다.
“선배! 택시 잡았어요.”
“어? 응. 타자.”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지 않은 채, 난 멈춰선 택시로 다가갔다.
보조석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가자, 영기는 뒷 자석에 앉았다.
“기사님, SBC 사옥으로 가주세요.”
“예.”
내 말과 함께 택시는 출발했다.
-어디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지털투모로우? 라고 하던데요.
-이쪽으로 넘겨봐.
-네.
다시 전화기가 들리더니, 직원이 내게 말했다.
-대표실로 연결해 드릴게요.
“대표실이요?”
-뚝.
내 뒷말을 듣지도 않은 채, 직원은 전화를 대표 쪽으로 돌린 모양이다.
-대표 박진종입니다.
엷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예 안녕하세요, 대표님.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이렇게 연락드린 건, 미튜브 콘텐츠 공급에 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하아. 미튜브 쪽에서 얘기했나요?
긴 한숨 뒤에 나오는 적대적인 박 대표의 언사.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뜬금없는 반응이다.
하지만 어쩐지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고글 측 통해서 연락 요청 드렸는데, 받으셨습니까?”
일부러 박 대표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난 다른 소릴 꺼냈다.
선주경 부장이 연락 보냈던 걸 이용해보는 거다.
-연락 요청? 그런 거 없었는데.
‘이런 씨. 결국 선 부장이 장난친 게 맞았네. 고글코리아 부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밑장빼기? 할 수야 있지.
하지만 걸리면 결국엔 오함마가 당신의 손을 내리찧을 것도 알아야한다.
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박 대표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랬습니까? 제가 취재를 하고 싶다 부탁드렸는데, 연락을 안 한 모양이네요.”
-흥, 그거야 그렇겠죠.
박 대표가 알만 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뭔가 쌓인 게 있는 건지, 애초 성격이 그런 건진 모르겠다.
허나 내겐 슬금슬금 떠볼 구석이 참 많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었다.
“저, 대표님. 그래서 말인데 취재요청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면 잠시 뵙고 말씀 나누고 싶은데요.”
-예에. 오세요! 여기 상암DMC입니다.
한 회사의 대표란 사람에게서, 이렇게 시원시원한 대답을 듣게 되다니.
살짝 당황스러운데, 또 막 웃음이 나왔다.
보통 기업 대표들은 누가 만나자는 얘기를 꺼내면,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거부하거나 일정을 확인한다며 즉답을 피한다.
진짜로 바쁘든, 자존심 세우기 위한 허세든.
그완 반대로 박 대표처럼 호탕하게 미팅을 잡는 사람은 처음이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혹시 당장 뵈러가도 될까요? 제가 지금 상암동입니다.”
-예에. 상관없어요. 상암SBC 12층으로 오셔서 연락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눈앞에 잘 조성된 빌딩구역이 나타났다.
“저기가 SBC 사옥이네.”
휴대전화로 지도를 확인한 내가 앞에 선 건물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온통 유리창으로 뒤덮인 외관이 햇빛에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들어가자 영기씨.”
“네, 넵.”
건물 안으로 들어간 우린, 승강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내리고 보니, 12층은 사무실이 아니라 SBC 직원식당이었다.
이미 식사시간이 끝나 텅 빈 식당엔, 청소부가 홀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난 영기를 식당 한 구석에 앉히고, 박 대표에게 전활 걸어 도착사실을 알렸다.
“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12층입니다.”
-예에. 금방 가요.
5분 후.
식당 입구로 키가 큰 불혹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분명 고글코리아 사무실서 봤던 무리 중 한 사람이다.
“박진종 대표님?”
“예에. 제가 박진종입니다. 반갑습니다.”
박 대표가 큰 동작으로 악수를 건넸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이쪽은 박영기 기자입니다.”
“예에. 앉으시죠.”
착석 후, 박 대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미튜브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내 입으로 저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콘텐츠 공급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라고 했을 뿐.
“네. 미튜브 콘텐츠 공급 관련해서 알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지레짐작하고 먼저 패를 깐다면, 흔쾌히 받아들이면 된다.
난 고민하지 않고 모호한 말로 받아쳤다.
그러자, 박 대표로부터 폭탄 같은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뭐 협상 끝났어요. 미국 본사 대답 기다리고 있지만, 공급은 쫑 났다고 봐야지.”
웃으며 듣고 있던 난, 표정관리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이거 뭐야······과정이고 나발이고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