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축하하네, 미친 탈곡기 칭호를 얻었네!
고글-KMR 기사들이 웹을, 업계를 폭풍우처럼 강타했다.
언론은 온통 두 기업의 불편한 관계와 이별이 미칠 영향들을 분석해댔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엔 내가- 아니 내 기사가 있었다.
[메이버-내일코코아, 지상파 영상클립 품는다 –주진형 기자, 박영기 기자]
[조회수 552,124]
[지상파-고글 결별, 악조건 미튜브 탈출한다 –주진형 기자, 박영기 기자]
[조회수 573,596]
[KMR-미튜브 수수료 공방...진실은 45% - 주진형 기자]
[조회수 274,596]
[고글 “지상파, 글로벌 발판 잃을 것” -주진형 기자]
[조회수 255,478]
[KMR “이제야 스트리밍 수익 정상화” -주진형 기자]
[조회수 185,812]
불과 하루 만에 써낸 5개의 기사.
이 기사들의 사흘째 조회 수는, 평소 디지털투모로우의 한 달 간 기사 조회 수를 뛰어넘었다.
메이버, 내일 등 포털 사이트 뉴스공급자로 등록도 못한, 하급 매체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고글과 KMR의 난투극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몇몇 매체들은 여전히 이 떡밥을 물고 있었으나, 내 눈엔 이미 쉰 소재였다.
더 터질만한 정보는 이제 없고, 독자들의 관심도 점차 사라질 터다.
게다가 박진종 대표와 고글 측, 선주경 부장의 자존심 싸움엔 이제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다.
“팀장, 미튜브 건은 이제 그만 취재하겠습니다. 더 나올 정보가 없습니다.”
사무실 안.
난 이윤철 대표가 보는 앞에서, 김정효 팀장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그 정도 했으면 됐다.”
건너편 대표 석에 앉아있던 이 대표가 연신 입맛을 다시며 날 바라봤다.
그 누구도 예상 못한 폭발적 조회 수에.
이 대표는 내가 이 화젯거리를 계속 들쑤시길 바랐을 거다.
그래야 광고수익이 계속 쏟아 질 거라 생각 할 테니.
‘응, 싫어.’
입 밖으론 낼 수 없는 소리를 마음으로만 되뇐다.
정말 한 동안은 잠시 특종과 거리를 둘 심산이다.
메일함에 도착한 일주일 후의 이메일을 확인하고도, 취재계획 잡지 않은 것도.
모두 잠시나마 재충전을 위해서다.
‘그나마 좋아진 건, 대표가 더 이상 날 휘두르지 못한다는 거겠지.’
사무실서 일하고 있을 때면, 대표는 가끔 조언이랍시고 쓸 데 없는 말과 쓴 소리를 내뱉곤 했다.
헌데 내가 특종을 하나씩 내자, 그 시간이 사라졌다.
보기 싫은 행복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을 뿐.
“참, 팀장. 오늘 저녁에 SBT 스터디 있습니다.”
난 김정효 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리 보고했던 일정이기에 그저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아 그래? 주제가 뭐지?”
여기서 스터디는, 말 그대로 공부를 함께 하는 모임을 뜻한다.
그 모임의 주최자가 통신사인 SBT란 점이 특이하지만, 공부과목이 ‘통신’이란 걸 알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예. 제4이통 관련해서랍니다.”
정부의 통신비 인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제 4이동통신.
기존 통신 3사의 구도를 깨고 한 사업체를 더 만들자는 거다.
“뭘 알려 줄진 몰라도 별로 좋은 소린 안 나오겠네?”
“그럴 것 같습니다.”
“알았어. 영기씨도 데리고 갈 거야?”
김 팀장이 영기를 힐끔 보곤, 내게 물었다.
“네. 영기씨도 제 2진인만큼, 배워둬야죠.”
너무 당연하기에 굳이 물을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팀장이 이리 묻는 것엔 이유가 있다.
스터디는 퇴근 시간 이후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뭐, 영기한테는 미리 말해뒀으니.’
영기는 이미 승낙한 상태다.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지만.
자리에 앉아있던 영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난 영기를 보며 한쪽 입 꼬릴 올렸다.
2시간 뒤,
“영기씨, 어때. 요즘 영기씨 이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데.”
우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일부러 느긋하게 을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봄과 여름의 중간단계, 날씨는 쾌청했고 온도도 적당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고, 들뜬 마음을 조금은 달래주고 싶었다.
“넵, 다 선배 덕분이죠.”
내 질문에 영기가 교과서적인 멘트로 답한다.
“저도······ 선배처럼 하고 싶습니다.”
“나처럼?”
“네에. 늘 자신감 있고······ 눈치나 정보도 빠르시고.”
“아부가 많이 늘었네, 영기씨.”
“아, 아부 아니에요.”
자신감 없는 투로 영기가 말했다.
“직접 봐서 알잖아. 그냥 말 많이 하다보면 뭐라도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거 주워서 가다보면 또 묘한 게 기다리고 있고. 기자 일이 그런 거지.”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무슨 5년 차 이상 기자라도 된 것 같다.
문득 낯이 뜨거워진다.
“그래도 선배는 직관이 정말 뛰어난 것 같아요. 미튜브 건도 선주경 부장이 연락 안 줄 거라고 눈치 채시고, KMR로 가신 거잖아요. 전 갑자기 왜 KMR로 가는지 의아했거든요.”
‘······이 녀석. 맘 놓고 있었더니, 다 캐치하고 있었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때 당시엔 급한 마음에 미처 영기를 고려하지 못한 채 행동했다.
선주경 부장의 행동이 미심쩍다는 근거만으로 KMR로 직행한 거였다.
그건 내 불찰이다.
“아······아아. 실은 화장실 갔을 때 KMR측이 나오는 걸 봤거든. 근데 분위기가 별로더라고. 그래서 떠보려고 물어봤더니 제대로 대답도 안 해주고, 연락한다면서 뭔가 쌔 하더라고.”
난 재빨리 얼버무리며 영기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선배는 다르시군요. 그 사이에 다 파악 하시다니.”
영기의 말에 난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아니. 나야 결과를 알고 있으니까 파악이 되는 거야.’
그러나 난 영기의 말만큼 대단한 놈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답을 알고 있기에, 틀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뿐이다.
“저, 저도 노력할게요. 선배. 선배 같은 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람 만나서 말하는 것만 잘하면 돼 영기씨.”
우리는 한동안 명동을 돌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후 SBT기자실로 들어갔다.
“오늘 스터디 가시는 기자님들 계십니까?”
오후 6시가 될 무렵, SBT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기자실에 들어왔다.
‘홍보실 인원인가?’
처음 보는 사람이다.
기자실 안에 있던 기자들 대다수가 직원의 말에 손을 들었다.
나와 영기도 뒤따라 거수했다.
“다 같이 이동하려는데, 5분 후에 괜찮으실까요?”
“네에.”
40대 초반의 기자가 나서서 대답했다.
인원파악을 끝낸 직원에게, 내가 다가가 인사를 시도했다.
“저, 안녕하세요.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오늘 처음 뵙는데, 명함 교환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넷, SBT 홍보실 허석재 매니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SBT는 내일코코아와 비슷하게 홍보실 직원들 모두 ‘매니저’ 호칭을 쓴다.
그렇다고 사내에 직급이 없는 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용.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못 뵀던 것 같은데.”
“이제 2주 됐습니다. 기자님. 여기 명함······어?”
허석재 매니저가 내 명함을 받아 들더니 그대로 굳었다.
“왜 그러세요?”
“디,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님이십니까!”
빼액, 소릴 지르며 질문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난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예-예에. 그런데요.”
“아아! 저, 저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주 기자님. 지, 진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쏟아내고는, 허 매니저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별 말도 없이 기자실을 뛰쳐나간 거다.
‘뭐, 뭐야. 우리 인솔해가는 거 아니었어?’
난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뒤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자리에 앉아있던 타 기자들의 묘한 눈빛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뭔진 모르겠으니, 그냥 내 의자로 돌아가 착석할 뿐이었다.
“주 기자님!”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넣으며 이동 준비를 할 때.
날 부르는 새 목소리가 등장했다.
고갤 들어 문 쪽을 보니 SBT 노원종 차장이 서있었다.
“어, 차장님 오래간만입니다.”
내가 인사하자, 노 차장이 지극히 친근한 척 다가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기자실 오실 거면 연락주시기 그러셨어요. 오시는 줄도 몰랐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언제부터 기자가 기자실을 오간다고 연락을 했단 말인가.
하물며 노 차장은 이제껏 딱 한 번 본 사이인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바뀌었는지.
세달 전 처음 봤을 때만해도 별 감정 없는 얼굴로 커피만 마시던 사람 아니었나.
“에? 아 네. 연락을 드릴 걸 그랬죠?”
그래도 노 차장의 말을 받아줘 본다.
“오늘 스터디에 가시는 거죠? 다 같이 가시죠. 주 기자님. 끝나고 소박하게 식사자리도 있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참 영기씨, 이리 와봐. 차장님, 이쪽은 제 2진 박영기 기자에요.”
내가 부르자 영기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영기가 이렇게 빨리 낯선 사람 앞에 서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다.
‘왜 그런 진 몰라도 잘됐지 뭐.’
“아아! 박영기 기자님이셨구나!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 기자님!”
저 양반, 나 처음 봤을 땐 굉장히 도도하지 않으셨나.
흥분한 노 차장에게서 자꾸 낯선 남자의 향기를 느낀다.
“네, 네에.”
영기가 최대한 당당한 척 굴려는 게 느껴졌다.
말투가 어색하긴 해도 눈만은 노 차장을 피하지 않고 있다.
‘옳지, 잘한다. 잘해.’
난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 이동하시죠. 스터디 장소는 뒤쪽에 오양빌딩입니다.”
거리로 나온 우린, 노원종 차장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긴 기자들 무리 앞에 있던 난, 노 차장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근데, 차장님이 이런 거 할 짬은 아니지 않아요? 아까 허석재 매니저? 그 분이 왔던데.”
“핫하하. 뭐, 그렇긴 하죠. 근데 주 기자님이 계시다고 해서 제가 직접 내려왔습니다.”
“에이, 뭘 저 때문에 내려와요.”
장난치듯 내가 대꾸했다.
그러자 노 차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진짭니다. 허석재 매니저한테도 사전에 주 기자님 오시면 꼭 얘기하라고 했었구요.”
“네? 왜, 왜요?”
“기자님도 참. 다 아시면서 뭘 묻고 그러십니까. 하하. 아무튼 오늘 잘 오셨습니다.”
‘아니, 아니. 뭘 혼자 단정 짓고 얘기 하는 거야.’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대화다.
마음 같아선 노 차장에게 의문을 표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난 더 캐묻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잠시 후.
우린 노원종 차장의 안내에 따라 스터디가 열리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 안에는 세 명씩 쓸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스무 개 가까이 배치돼 있었다.
또 먼저 도착해있던 기자들과 홍보실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여~ 주 후배!”
기문 선배가 날 부르며 다가왔다.
“어, 선배. 오셨습니까.”
“이야 주 후배. 여기서 다 만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선배, 이쪽은 박영기 기자입니다. 제 2진 맡고 있는.”
내가 소개하자, 영기가 나서서 기문 선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아! 박 후배인가! 주 후배랑 미튜브-KMR 기사 쓴! 이야!”
기문 선배가 과장된 동작으로 말하던 그 순간.
시끄럽던 강의실 갑자기 고요해졌다.
그 변화는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워서, 난 이내 우리가 주목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선들······아까 기자실에서 겪은 거랑 비슷한데.’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주위서 조금씩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그 주진형 인가봐?”
“아, 그 미친개? 건드리면 갈가리 찢긴다는?”
“통신사 요금제 담합기사랑 코코아 합병기사도 써냈었잖아.”
“야, 고글 개 털린 거 봤냐? 완전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 탈곡기더라.”
“쟤 때문에 지금 인터넷 쪽 완전 비상이란다.”
어쩐지 그다지 좋은 소리가 오가는 것 같진 않다.
기문 선배가 손등으로 자기 입을 가리더니, 내 귀에다 속삭였다.
“여, 주 후배! 축하하네, 미친 탈곡기 칭호를 얻었네!”
“아니 그런 얘긴 없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