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앞뒤 없이 들이박는 기자가 가장 골치
‘미친개에 기업 탈곡기라니······ 역시 기사가 좀 심했나.’
주변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내가 고글에게 너무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런 상황이 재밌는 듯, 기문 선배가 날 놀려댔다.
“뭐 미친 탈곡기든 멋진 탈곡기든 고글하고 KMR을 탈탈 털었다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난 오히려 자랑스럽다네, 주 후배~”
결혼도 하신 분이 나한테 애교를 부린다.
내게 들이대는 기문 선배의 상체를 밀어내며 내가 단호히 말했다.
“그다지 좋은 이미지가 아닌 것 같은데요.”
탈곡기라는 평판이 난 그다지 와닿지 읺았다.
“아무래도 고글의 영혼까지 털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도 참 신기하네. 고글 측이 용케 모든 걸 다 털어놓고.”
‘그건 자기들끼리 자폭한 거고.’
난 사흘 전 반복된 고글과 KMR의 통화를 떠올렸다.
할 말 안할 말 잘 가리던 사람들이, 점차 뚫린 댐처럼 말을 쏟아냈었지.
나중엔 내가 쓸데없는 말만 전달해주는 메신저가 돼 있었다.
오늘 확인해보니 그날 두 기업과 통화한 회수가 15번.
내 휴대 전화비를 양사에 청구 하고 싶을 정도다.
“선주경 부장이 저한테 밑장빼다 걸렸거든요.”
“뭣? 뭔가 흥미진진한 얘기로고. 그걸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
기문 선배와 그렇게 취재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려던 순간.
“주진형 기자님?”
우리 사이를 비집고, 40대 후반의 남성이 들어왔다.
넉넉한 풍채에 여유로운 눈매의 얼굴이다.
“예?”
“안녕하십니까. SBT 홍보부장 이영승입니다.”
자신을 이영승 부장이라 밝힌 그는, 내게 명함을 건넸다.
“아, 부장님이시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디지털투모로우 바, 박영기입니다.”
나와 영기가 명함을 꺼내 이 부장과 교환했다.
옆에 있던 기문 선배는, 이전에 명함교환을 한 적이 있는지 목례로 인사만 나눴다.
“최근 핫 하신 주 기자님을 여기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은요. 제가 더 영광이죠. 잘 부탁드립니다. 이 부장님.”
단순한 사탕발림 인사 같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요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 눈치다.
“안 그래도 지난 번, 주 기자님이 저희 요금제 기사 냈을 때. 제가 직접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못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기자님께 소홀했었죠.”
소홀이라.
애초에 난 그런 단어를 들을 만큼 SBT와 친하게 지낸 적이 없다.
내가 통신 분야를 맡아 SBT에 접근 한 것도 얼마 안됐고.
난 고갤 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소홀이라뇨. 저야 통신 쪽은 초짜고. 제가 인사도 다 못 드렸으니 그럴 만하죠.”
이영승 부장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것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바로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홍보부장의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다니.
적응이 안될 만큼 신기했다.
이 부장이 원래 이런 성격인가 싶었지만, 주위 기자들 시선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부러움과 시샘인가.’
확실히, 홍보부장이란 인물이 갖는 위세가 느껴졌다.
겨우 몇 마디 나눈 걸 가지고 이렇게 이목을 집중시킬 줄이야.
“참, 저희 직원들하고 다 만나보시진 않으셨죠?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예?”
“이쪽으로.”
이영승 부장이 한 손으로 손짓하자, 방 뒤쪽에 서있던 직원들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금노섭 매니저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원동 매니저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박웅재 매니저입니다.”
내가 모르던 홍보부서 인원이 한명씩 인사와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그 중에는 처음 기자실로 내려왔었던 허석재 매니저도 껴있었다.
“허 매니저님이시죠. 아까는 왜 그렇게 급히 나가셨어요.”
“하, 하하······그게 좀 당황해서······”
“아무튼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넷!”
한바탕 시끄러운 인사를 끝내고, 나와 영기, 기문 선배는 같은 책상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우리가 이곳에 모인 본 목적, 스터디가 시작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스터디를 위해 시간 내주신 기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SBT 홍보부 노원종 차장입니다.”
첫인사말과 함께 노원종 차장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를 향해 기자들의 점잖은 박수가 잠시 이어졌다.
“오늘 스터디는 제4이동통신과 관련해 SBT가 준비한 자료로 진행됩니다. 혹시 자료집을 받지 못하신 분은, 뒤에 있는 직원에게 문의해주시면 됩니다. 이어서 내용설명은 SBT 경영경제연구소의 김찬형 정보통신실장님이 해주시겠습니다.”
노 차장의 안내에 맞춰, 단상에 새로운 인물, 김찬형 실장이 올라섰다.
김 실장은 짧은 인사와 함께 자료 해설을 시작했다.
스터디는 꽤 길었지만, 적어도 내겐 특별히 유익하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제4이동통신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기존사업자 다운 내용일 뿐.
‘뭐 실제로 수차례 승인이 안 나기도 했고, SBT나 기존 통신사 입장에선 달가운 소식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자들이 하고 있는 예상을, 좀 더 설득력 있게 풀어둔 정도다.
하지만 아직 제4이동통신은 사업자 허가신청도 마감되지 않은 상태다.
단정지어놓고 보기엔 남은 날이 너무 많단 뜻이다.
“이상으로 스터디를 마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관계로, 관련 질문은 식사와 함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노원종 차장이 마무리하며 스터디는 끝났다.
그러자 기자들이 우루루 단상으로 몰려나갔다.
스터디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저 김찬형 실장의 연락처를 따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기자들 틈엔 나와 영기도 속해있었다.
당장이야 저 사람과 연락할 일이 없다 해도,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거니까.
혼잡한 명함교환까지 모두 마치고, 우리는 짐을 챙겼다.
“주 기자님! 저녁 식사 가실 거죠?”
노원종 차장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은근히 물었다.
“예, 가야죠.”
“아이고, 잘됐네요. 오늘 예약한 곳이 아주 고기 맛이 좋습니다. 헛헛.”
노 차장,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세심하게 말 걸고 챙겨주는 성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난 심히 부담스러움을 느꼈지만, 덤덤한 척 그를 따랐다.
우리는 노 차장의 안내를 받아 다시 건물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노 차장이 주 후배 전담마크를 맡았나보네.”
다함께 종각으로 걸어가던 중.
기문 선배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안 그래도 노원종 차장이 줄곧 내 근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SBT 기사를 낸 것도 아니고.”
“뭐 저쪽 입장에선 주 후배가 현재 1급 위험인물 아닌가! 미친 탈곡기의 심기 건드려 좋을 거 없다 이거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업으로써는 나처럼 앞뒤 없이 들이박는 기자가 가장 골치일 거다.
언제 어떤 정보를 들고 와 뒤통수를 후려칠지 모르는 거니까.
그러니 내게 더 신경써주는 척이라도 하는 것일 테고.
다만,
‘아니 그러니까, 아무도 그 미친 탈곡기란 소린 안한다니까요!’
기문 선배가 내게 붙여준 별명, 미친 탈곡기.
이 땐 몰랐다.
이 이름이 업계로 쫙 퍼져나갈 줄은.
난 그날 기문 선배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했다.
“자, 우리 미친 탈곡기를 위해 건배!”
“아, 기문 선배!”
“푸흡!”
종각의 한 고기 집.
기문 선배는 술이 반쯤 취한 상태로 건배사를 했다.
내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선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우리 주변에 앉아있던 기자들은 우스운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우스울 만하지, 미친 탈곡기라니.
“부럽습니다, 선배. 저런 별명도 생기고.”
영기는 상황파악도 못하고 나한테 저런 소릴 하고 있다.
“······놀리는 거냐.”
녀석 성격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왠지 당하는 기분이 든다.
불판에 고기를 굽는 도중, 몇몇 기자들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테크24 하영수입니다.”
“패스트인터넷 소속 유진모입니다. 잘 부탁해요.”
나처럼, 그리 유명하지 않은 매체 소속 기자들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입니다.”
“알죠. 지금 주 기자님 모르는 업계 기자는 별로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만나 뵈니 되게 신기하네요. 평소 주 기자님 기사로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패스트인터넷 유진모 기자의 말에 내가 갸우뚱했다.
‘내가 무슨 도움을 줬다는 거지? 우라까이라도 하는 건가.’
“실은 저희가 매체 형편상 취재를 많이 못나가거든요. 그래서 살짝 씩, 헤헤.”
“아아, 네에.”
이런 매체들이 있다.
주로 적은 인력으로 운영되는 곳들인데, 취재를 자주 못나가니 기자라는 이름은 달았지만 실상은 편집기자 수준의 일을 한다.
다른 매체 기자의 기사를 가져다가 배열이나 어미 등만 살짝 바꿔 우라까이를 하는 거다.
매체가 워낙 작고 그 외엔 존립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래도 기자로써 부끄러운 일일 텐데, 나한테 이렇게까지 털어놓을 필요가······.’
난 내색하지 않고 살짝 웃어줬다.
“그렇군요. 앞으로 자주 봬요.”
이 내 말 한마디에, 그들은 마치 은사님께 칭찬이라도 들은 듯 기뻐했다.
난 두 사람이 돌아간 뒤에, 기자 무리를 쭉 훑었다.
그다지 홍보팀으로부터 관심 못 받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유명 매체 기자들만 모인 테이블도 있다.
그 안에서 내게 보내는 시선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뭐지. 적대감인가. 아니면 신기함? 어쨌든 그다지 기분 좋은 시선은 아닌데.’
혹, 듣도 보도 못한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이 이목 끄는 게, 불편해서?
이건, 내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다.
어차피 어떤 이유건 내가 잘못한 건 없다.
난 신경 끄기로 했다.
“입에 맞으세요?”
이영승 부장이 내 옆자리에 앉더니, 친근하게 물어왔다.
순간적으로 다른 기자들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예. 맛있네요.”
난 이 부장에게 대답하며 불판 위의 고기를 한 점 주워 먹었다.
“부장님, 술 한 잔 하시죠!”
기문 선배가 나서서 술병을 이 부장에게 향했다.
“아, 네.”
이 부장도 잔을 들어 기문 선배로부터 술을 받았다.
“우리 주 후배도, 박 후배도 다시 한 잔.”
오늘따라 기문 선배의 분위기가 상당히 올라 있었다.
뭐 때문 인진 모르겠지만, 이 덕분에 내가 죽을 맛이다.
“자, 부장님의 건배사!”
기문 선배의 능숙한 유도에 이 부장이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쪼록, 저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순하지만, 홍보맨다운 인사였다.
식사자리가 끝나고 난 뒤.
난 가게 밖에서 처음 보는 기자 몇몇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먼저 다가와 인사하고, 연락처를 알자는데 거부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주 후배가 정보도 빠르고, 기사도 잘 쓰니 끼고 싶은 거겠지. 잘해주게.”
볼이 달아오른 기문 선배가 조언했다.
“그런가요.”
“그리고 조심하게, 조선일간 표동수가 주 후밸 그리 곱게 보는 것 같지가 않네.”
“표동수요?”
조선일간이라면 국내 최고의 신문사다.
다만 난 표동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다.
“저쪽 모인 기자들, 저 무리의 중심이 표동수 기자네. 조선일간, 중심일보, 동오일보. 메이저들끼리 모였지.”
기문 선배가 가리킨 쪽에 유명 매체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들 가운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잘나가는 언론사 기자들이, 내게 악감정을 품을 만한 일이 있나.
본래라면 신경 쓸 가치가도 없을 텐데.
“저 사람들이 절 왜?”
“표동수가 그다지 좋은 인성이 아니네. 뭐 주 후배도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
기문선배는 의미심장한 이 한마디를 끝으로, 더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도 괜히 더 캐묻지 않았다.
내 할 일 신경 쓰기도 바쁜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 감정까지 챙겨줄 필욘 없으니까.
난 기자로써 내 업무만 충실히 하면 그만이다.
이날 밤.
을지로에서 고시텔 방으로 돌아온 난, 책상 앞에 앉아 한참 고민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마치고, 난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미래금융투자 장도현 과장’의 연락처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주진형입니다. 정보제공, 하겠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