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조용히 해주실래요. 너무 시끄러워서
이틀 후 금요일.
강남의 한 중화 레스토랑.
이곳에서 유메프의 신임 홍보부장 환영회 겸 신년회가 열린다.
난 초대받은 시간보다 20분가량 일찍 식당 안에 도착했다.
“어머 주 기자님! 일찍 오셨네요!”
김봄 대리가 날 반갑게 맞았다.
“너무 일찍 온 건 아닌 것 같네요? 다행이다.”
난 식당 안쪽에 길게 붙여진 식탁 쪽을 곁눈질했다.
이미 몇 명의 기자들이 자리에 앉아 이야기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 그럼요. 그거 걱정하셨어요? 하하. 주 기자님처럼 유명하신 분이 뭘 그런 걸 신경 쓰세요.”
며칠 전 예인이 썼던 기사에 내 이름이 나온 후.
난 어디를 가든 이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언론계 내에서도 유명세를 타는 기자.
‘기분 나쁠 일은 절대 아니지만, 내 기사도 아닌데 바보같이 좋아할 수만은 없지.’
난 손사래를 치며 봄 대리에게 말했다.
“유명하다뇨. 아직 초짜 기자일 뿐인데요. 뭘. -참, 영기는 좀 늦게 올 거예요.”
내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박 기자님이요?”
“네, 할 일이 좀 많아서 끝내고 오라고 시켜놨어요. 제가 이렇게 못된 선배입니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짜다.
영기는 지금 정말로 일을 하고 있을 터다.
“하하. 주 기자님. 알겠어요. 박 기자님 오시면 들여보낼게요.”
난 봄 대리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환영식 장소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기자들 이름이 적힌 종이명패가 놓여있었다.
아마 기자들의 연차나 서열 순대로 자리를 배치하기 위해 유메프가 준비한 거겠지.
“안녕하십니까.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이라고 합니다. 선배.”
난 먼저 도착해있던 3명의 기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적어도 나보다 어려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30대 중반이상 한명, 40대 중후반 두 명.
그렇다면 당연히 낮은 자세로 행동해야 한다.
‘애초에 내가 1년차도 안된 기자인데, 후배가 이곳에 앉아있을 리 만무하지.’
보통 짬 안 되는 2진, 3진 기자들이 이런 행사까지 참여하진 않는다.
“어어,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야 이거 네가 그 주진형이구나!”
내 명패를 보고 40대 중반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난 재빨리 그의 명패를 확인했다.
녹두일보 최경태 차장.
‘차장이라니.’
적어도 김정효 팀장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경력기자다.
“예 선배. 처음 뵙겠습니다.”
난 입가의 주름이 깊게 패인 최경태 선배를 향해 다시 인사했다.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너 정효 후배지? 나 정효랑 친구야.”
최경태 선배가 김정효 팀장 이름을 꺼내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니 김 팀장과 친구면 더 대하기 어렵다.
“얘가 요즘 그렇게 잘나가는 애야. 야 정효가 네 칭찬 엄청 한다.”
“하하······ 그렇습니까?”
김 팀장이 날 몰래 칭찬하고 다녔구나.
“오? 그 깐깐한 놈이 칭찬을 해?”
경태 선배 옆에 앉은 사람, 매일국회 유병국 팀장이 말을 이었다.
매일국회라니, 사명만 보면 이 행사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얘도 곤란하겠죠. 선배들이랑 연차 차이가 워낙 나야 말이지.”
이 사람은 마주경제 정광현 기자, 라고 적혀있다.
평기자인 걸 보니 적어도 여기선 나와 가장 나이가 가깝겠지.
허나 척 보기에도 30대 중반은 돼보였다.
“어어, 일단 자리 앉어. 술도 좀 마시고.”
난 최경태 선배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경태 선배가 고량주병을 들자 자동적으로 빈 잔을 내밀게 된다.
‘이거······느낌이 좋지 않다.’
이 아재들 틈에서 알코올 지옥이 펼쳐질 것 같은, 그런 불길함이 느껴졌다.
“선배, 얘가 내일코코아 합병 식 때 코코아 이적우 대표랑 대화했던 녀석이에요. 저번에 고글 미튜브도 뒤집어놓고.”
정광현 선배가 나에 대한 일화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 그래에? 그때 걔야? 햐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터트린 꼭지만 벌써 몇 개냐?”
“캬 네가 고글을 탈탈 털었다는 걔구나. 이거 오늘 잘 만났네? 한 잔 쭈욱 들이켜!”
잔이 넘칠 듯 따라진 고량주를 보며 난 잠시 고민했다.
오늘 취하기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렇다고 선배들을 처음본 자리부터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난 하는 수 없이 잔을 들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오오, 그래 잘 마시네. 자, 한 잔 더 받아둬.”
“아, 네. 저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역공이다.
난 경태 선배에게 잔 가득 술을 받은 뒤, 술병을 잡았다.
선배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얼굴로 내게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한 명씩 잔에 술이 채워진 후, 우린 잔을 들었다.
“자 마셔, 마셔. 우린 건배사 같은 거 없다.”
역시 김정효 팀장의 친구답다.
김 팀장과도 개인적으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팀장은 술자리가 아닌, 술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잔을 비우는데, 난 그걸 따라가겠다고 무리해서 마시다가 거나하게 취한 적이 많았다.
“캬아!”
선배들이 잔을 비우고 탄성을 냈다.
나도 생각보다 맛있는 고량주에 감탄했다.
‘향기도 과일 향에 은은한 단맛까지. 진짜 맛있는 술이네.’
그래도 이걸 입 밖으로 꺼냈다간, 저들이 더 신이나 술을 따르겠지.
난 조용히 선배들의 대화를 경청만하기로 했다.
“요즘 여긴 어때? 환영회라고 오긴 했는데 안 온지 몇 달이라.”
최경태 선배가 말했다.
“별거 없지. 유통 쪽 애들이 좋아할 만한 자료만 나오고.”
유메프와 같은 소셜커머스는 인터넷 기업이자 유통기업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IT기자들 뿐만 아니라 유통 담당 기자도 유메프를 취재한다.
헌데 최근엔 IT기자들이 다룰 만한 내용보다는, 유통/마케팅 보도 자료만 연신 나오고 있었다.
“근데 아무래도 뭔 일이 터질 것 같어. 티마 쪽 소문이 좀 안 좋거든.”
‘역시, 나뿐만 아니라 다른 기자들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군.’
선배들은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연신 잔을 비웠다.
난 곁에서 묵묵히 그들의 이야길 들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고량주를 두 병째 비울 때 쯤.
다른 기자들도 하나 둘 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유독 선배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기자가 있었다.
난 명패를 확인했다.
[뉴데이트 이수경 기자]
확실히, 주목 끌만큼 뚜렷한 이목구비의 여성이다.
다만 예인을 처음 봤을 때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그만큼 예인처럼 독보적인 얼굴은 드물긴 하지.’
기자업계뿐만 아니라 방송 쪽과 비교해 봐도, 예인만큼 도드라지는 외모는 찾기 힘들다.
그 이상한 성격만 아니었다면 나 또한 매번 설레면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오 이수경, 또 보네?”
경태 선배가 이 기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선배, 안녕하세요. 저번에 코코아 합병식 때 뵀었죠.”
“어째 넌 날이 갈수록 예뻐지냐?”
“하하, 아니에요.”
도착한 기자들의 모든 화제와 관심이 이수경 기자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남자 선배들이 많다보니, 여자가 나타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다.
‘뭐 본성을 탓할 수는 없으니까.’
난 소외됐다는 기분보다는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나한테 오는 관심이 줄어들 덕택에,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할 일은 사라진거다.
“어, 이 분은······”
수경은 일부러 조용히 앉아있던 내게 시선을 줬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
그가 내 명패를 읽으며 묻는다.
아는 체 하니 어쩔 수 없이 인사해야 했다.
난 음 변화가 없는 어조로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입니다.”
“아! 저 주 기자님 기사 진짜 잘 읽고 있어요.”
“말씀 낮추세요. 저 이제 1년차 기자입니다.”
“어머, 저도 이제 1년 차에요. 언제 입사했어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작년 4월 입니다.”
“어? 진짜요? 저도 그런데. 동기네요.”
이거 왠지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 분위기를 보니 확실하게 느낌이 왔다.
몇 남자들의 불편한 기색과 호기심 섞인 눈빛.
‘예인 때랑 비슷하네.’
이젠 딱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만큼 나도 단련이 돼있다는 뜻이다.
‘다행이라면, 이 상황도 오래 못 갈 거란 거겠지.’
수경이 뭇 남성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인물인 건 맞다.
허나 그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오면, 자연스레 시선은 분산된다.
“저랑 동기인데 진짜 단독기사 많이 쓰네요? 비법 좀 알려주면 안돼요?”
수경은 내게 친근한 척 얼굴을 들이댔다.
난 그런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빼앗겼다.
“안녕하세요.”
묘하게 날이 선 인상으로 이디넷 김예인 기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김 기자. 어서 와요.”
예인은 식탁에 놓인 자신의 종이명패를 집어 들더니, 내 옆자리에 탁 놓았다.
“여기, 앉을게요.”
“······어 그래요.”
누구한테 동의를 구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당황한 나머지 내가 대답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모두 뚫어져라 예인만 쳐다볼 뿐.
이 와중에 난, 상대적으로 빛이 바랜 수경을 봤다.
그의 눈썹은 살짝 씰룩이고 있었다.
누구나 주목받던 순간을 뺏긴다는 건 꽤 속이 상하는 일이다.
“야 진형아, 누구? 연예인이야 뭐야?”
최경태 선배가 바로 앞에 앉은 예인을 보며 내게 묻는다.
세상 편하게 날 대했던 경태 선배도, 예인에게 직접 물을 생각은 안 드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내일코코아 합병무산 기사 썼던 이디넷 김예인 기자입니다.”
“어?”
날 곤경에 빠트린 그 사람이라고, 내 친절한 설명에 대부분 입을 벌렸다.
물론, 놀라지 않는 사람들은 예인을 알고 있는 기자들이다.
“아직 시작 안 했죠?”
“네. 근데 왜 백 선배가 안 오고 김 기자가 왔어요?”
난 예인에게 백봉사 선배의 행방을 물었다.
이런 행사엔 1진인 백봉사 선배가 오는 게 맞지 않나.
“선배가 저보고 갔다 오라고 했어요. 따로 취재할 게 있다고.”
“그래요? 아쉽네. 선배 뵙고 싶었는데.”
어느새 사람들 대다수가 나와 예인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걸 의식하는 순간 굉장히 부담스러워진다.
난 예인과 대화를 멈추고 경태 선배의 얼굴을 봤다.
최경태 선배는 우리 둘을 유심히 보더니 뭔가 알 수 없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너네 둘이 잘 어울린다?”
“예에?”
“감사합니다.”
‘아니 뭘 거기서 감사 인사를 해 이상하게!’
난 예인의 대답을 들으며 관자 놀에 손을 갖다 댔다.
경태 선배가 한참 우릴 놀렸다.
난 가볍게 부정하며 그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임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나도 희생할까.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처음 봤지만, 경태 선배가 그리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나이 차는 꽤 나지만, 어쩐지 장난기 많은 형을 보는 기분이다.
면이 트지 않은 후배 기자들을 모아 놓고 있으려니, 선배도 불편했던 거겠지.
“아 기자님들! 오래 기다리셨죠?”
날렵한 몸매의 40대 중반 남성과 유메프 홍보팀 일동이 식당 안에 등장했다.
저 사람이 바로 유메프 홍보실장 박지윤이다.
소셜커머스 업계는 물론, 오픈마켓에서도 ‘공공의 적’으로 불리는 사람.
덧붙이자면 나 또한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한다.
“오늘 이렇게 유메프 홍보팀장 환영회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따로 준비한 행사는 없고, 그저 편안하게 식사하시며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주인공인 신임 홍보팀장은 이쪽, 기자님들하고 오늘 술잔 맞대고 인사드릴 겁니다.”
박 실장이 말을 마치자, 옆에 서있던 40대 초반의 통통한 남성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새로 유메프에 들어온 이일형 홍보팀장입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인사를 보며 모인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다행이군. 그나마 홍보 일을 하던 사람이 팀장으로 들어와서.’
난 이일형 팀장의 소개를 보며 생각했다.
박지윤 홍보실장은, 사실 홍보 쪽으론 조예가 없는 사람이다.
일종의 비전공자, 그러나 그보다 문제인건 무례하다는 거다.
기자들이나 동종업체 관계자들이 박 실장에게 이를 가는 이유는 다 저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이다.
“우리 국민MC와 이름이 같은 유석재 기자님도 오셨네요! 얼마 전에 중국 방송에 나오셨더라구요! 그 때 전 진짜 기자님이 중국인인 줄 알았어요. 중국에서 몇 년 사셔서 그런가? 얼굴이 완전 중국인이더라구요. 하하하핫!”
바로 이렇게.
어느새 기자들 자리에 끼어든 박지윤 실장이, 매크로소프트웨어즈 유석재 선배의 외모를 조롱하며 웃고 있었다.
분위기를 살려보겠다고 한 사람의 감정을 짓밟는 행위.
저렇게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대화주제로 삼는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거다.
순한 성격의 유선배는, 정작 저런 막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허허 웃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남일같지 않아 내가 더 화가 났다.
‘지난번에 나한테 저랬지. 디지털투모로우, 매체 이름이 웃기다고.’
한 번만 말한 게 아니라, 내게서 반응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말했지.
일전의 박 실장과의 대화를 기억하니 자동적으로 주먹이 쥐어졌다.
싸늘한 식탁 분위기를 눈치 챈 이일형 팀장과 김봄 대리가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상사인 사람에게 대놓고 면박 줄 수도 없는 노릇인 거겠지.
“박 실장님.”
그 때, 예인이 박지윤 실장을 불렀다.
헌데 어쩐지 내 등이 싸늘했다.
“어······이디넷 김예인 기자님! 아아 내일코코아 합병무산 기사 잘 봤습니다!”
박 실장이 예인의 명패를 힐끔 보더니, 기억을 더듬는 듯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조용히 해주실래요. 너무 시끄러워서.”
“······”
예인의 소원대로 환영회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일냈다.’
지나치게 부자연스런 정적.
박지윤 실장은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없이 예인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예인은 남들 신경 쓰지 않고 고량주를 자작하더니 깔끔하게 원샷했다.
‘푸핫, 이럴 땐 저 돌아이 기질이 참 고맙네.’
난 박 실장이 보지 못하게 슬쩍 웃었다.
“서, 선배. 저 왔습니다아?”
그리고 시기 좋게, 내가 기다렸던 ‘군만두’가 식당 안에 발을 디뎠다.
디지털투모로우 인터넷 2진 기자, 박영기.
사람들이 모두 고갤 돌려 영기를 보자, 녀석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영기가 여길 왔다는 건······’
난 영기 뒤쪽으로 또 누군가 걸어옴을 직감했다.
“어······대, 대표님!”
김봄 대리의 당황한 목소리가 홀 내에 퍼졌다.
‘우리의 탕수육까지 모두 도착인가.’
이걸 시키면 늘 군만두는 서비스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