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저도 지금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은상재 대표가 이곳에 온다는 걸 유메프 홍보팀원들은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봄 대리가 저리 당황한 건, 등장시기의 문제였다.
하필이면 식당 내 분위기가 최저로 밑바닥을 치고 있을 때 오다니.
‘후후. 나야 상관없지만.’
난 사태파악에 나선 은 대표의 얼굴을 읽으며 입을 열었다.
“와! 은상재 대표님이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영기씨, 영기씨도 이리와 앉아.”
마치 환영회의 사회자를 맡은 것 마냥, 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다 얼어붙어 있으니 그나마 제정신인 나라도 얘길 해야지.
내 말에 영기가 눈치를 살살 보더니, 쪼르르 빈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나와 거리가 좀 떨어져있어서 그런지 잔뜩 주눅 든 자세였다.
은 대표는 이상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테이블 중앙으로와 섰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진 않는 상황.
-소개하셔야죠.
난 멀찍이 앉은 봄 대리에게 눈짓했다.
“아아, 여기 오신 기자님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분이 저희 유메프의 은상재 대표닙입니다. 오늘 잠시 담당 기자님들께 인사드리기 위해 방문하셨어요.”
봄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은 대표를 소개했다.
그러자 여전히 표정이 썩어있는 박지윤 실장을 제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떨결에 박수를 쳐댔다.
“안녕하세요. 유메프 대표 은상재입니다.”
은 대표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외양처럼, 은 대표의 어조는 한 없이 부드러웠고 유약한 느낌도 있었다.
타인에게 강한 압박감을 주거나 거친 성격은 아닌 듯했다.
일순간 대표 자리엔 좀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들 정도다.
“오늘 저희 새 홍보팀장 환영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 기자 분들과 소통할 시간이 없어, 이렇게 잠시나마 만나 뵙고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유메프 홍보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고. 유메프에 대해서도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은 대표가 빈 잔을 하나 들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죠.”
최경태 선배가 일어서서 고량주 병을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경태 선배가 잔을 가득 채우자, 이일형 홍보팀장이 드디어 진행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럼 거국적으로 한 잔 하시죠. 혹시 잔이 비신 기자님들은 채워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제 환영회에 기자님들과 대표님까지 와주셔서 두 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뛰겠습니다! 자, 유메프를 위하여!”
역시 많은 경험이 엿보이는 능숙한 진행이다.
이 팀장의 건배사에 기자들도 ‘위하여’를 외치며 잔을 맞부딪혔다.
내가 앉은 식탁은 서있는 은상재 대표를 중심으로 기자들의 잔이 모였다.
“여러분들과 더 길게 말씀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따로 일정이 있어서 길게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한 분 한분께 직접 인사드리고 가겠습니다.”
정말 따로 일정이 있는 진 확인 할 길이 없으나, 예의상 하는 말일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있어 봐야 은 대표로썬 시간낭비에 가깝다.
게다가 이일형 홍보팀장을 환영한다는 행사 의미도 퇴색될 거고.
그러니까 기회는 더 빠르게 찾아오겠지.
‘접근할 시간을 잘 봐야겠는걸.’
이렇게 만인의 눈과 귀가 열려있는 시점에 들이대는 건 좋지 않다.
난 은상재 대표를 눈으로 쫓으며 생각했다.
은 대표는 정말 기자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명함을 교환하고 인사하고 있었다.
“아, 이 기자님. 여기서 뵙는군요. 잘 부탁합니다.”
저 멀리 은 대표가 다른 기자들과 악수하는 사이, 난 영기에게 코코아톡 메시지를 보냈다.
[주진형 : 어때, 은 대표가 어디 접촉하는지 확인했어?]
난 메시지를 보내놓고 영기의 얼굴을 봤다.
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영기가 화면을 바라보곤,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고갤 돌렸다.
[박영기 : 네. 지난번에 놓친 사람들, 오늘은 유메프에 왔더라구요. 끝까지 쫓아가 보니 사성증권에 들어갔습니다.]
이틀 전, 은재상 대표를 쫓는다며 통화가 끊어졌던 영기.
녀석은 은 대표가 외부인들과 만나는 걸 파악했다.
하지만 그날에 그 외부인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주진형 : 사성증권?]
사성그룹 계열의 증권 회사다.
그동안 알아둔 바로는 유메프의 회계법인은 ‘안진’이라는 곳.
법무팀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상황.
사성증권과 유메프의 접점은 딱히 기억에 없는 걸로 봐선, 최근 첫 접촉을 한 듯하다.
[박영기 : 네. 김유동 대리한테 전화로 물어봤는데, 유메프는 사성증권과 같이 일하는 게 없다고 얘기하던데요.]
[주진형 : 뭐 ㅋㅋ 김유동 대리한테 전화까지 했어? 이제 혼자 전화취재도 문제없는 거야?]
[박영기 : 하핫, 네에.]
단순히 호텔 프론트에 묻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영기가, 이젠 홍보팀 인원과 일대일로 통화를 하고 있다니.
사실 정말 별거 아닌, 기자로써 기본중의 기본이지만 그 대상이 영기라는 점에서 대단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주진형 : 진짜 수고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유메프가 사성증권이랑 손잡았다고 봐야겠네.]
[박영기 : 넵.]
영기의 톡으로 대화를 하고나니 대충 상황이 짐작 갔다.
‘역시 은상재 대표도 티마 매각주관사가 선정됐다는 걸 알고 있는 거로군.’
아마도 사성증권은 유메프의 인수자문사로써 섭외된 듯 보인다.
‘미래라곤 해도, 유메프는 한 번 인수 의향을 내비쳤으니까. 현재라고 다르진 않겠지.’
난 아직 티마 매각 기사를 보도하지 않았다.
기사의 출고를 좀 늦추더라도, 웬만하면 유메프의 인수의사를 곁들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매각 기사에 동종업계, 그것도 라이벌의 위치에 있는 업체가 인수의향을 밝히면 얼마나 기사가 재밌어지겠는가.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기자로써, 욕심이 동했다.
다행히 아직 티마 매각 관련 기사는 어디에도 뜨지 않은 상태.
‘조금만 더 버티면 돼.’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뗀 난,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은상재 대표를 확인했다.
“아 이디넷 김예인 기자님이시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내일코코아 기사도 쓰셨죠? 잘 봤습니다.”
은 대표는 예인의 손을 잡고 활기차게 악수했다.
아무래도 최근 읽은 기사 중에 예인의 것이 가장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뭐, 예인이야 여전히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손만 끄덕일 뿐이다.
그리고 내 차례, 난 명함을 지갑서 한 장 꺼내놓고 은 대표를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하하.”
은상재 대표가 웃으며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유메프 은상재 대표이사 02-34XX-58XX]
그의 명함엔 역시 개인 연락처, 즉 휴대전화 번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회사 번호만 적어둔 것은, 기자들의 전화를 직접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고로 이 명함은 내가 은 대표와 만났다는 증거만 돼 줄 뿐.
딱히 쓸모 있는 건 아니다.
“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난 공손한 몸짓으로 은 대표에게 명함을 건넸다.
“······어?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님? 아아 정말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난 번 내일코코아 합병기사도 그렇고, 미튜브 기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쪽도 취재하시는 군요. 그럼 유메프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직접 내 기사를 읽은 걸까, 아니면 홍보팀에서 알려줬을까.
‘뭐가 됐든 상관없나.’
은상재 대표의 느릿한 칭찬을 들으며 난 고갤 끄덕였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히 나와 악수한 후, 은 대표는 옆자리의 이수경 기자에게로 넘어갔다.
그렇게 수분 후.
모든 기자들과 단독인사를 끝낸 은 대표가 다시 가운데 자리에 섰다.
“저는 이쯤에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자 분들은 환영회를 잘 즐겨주십시오.”
“에이, 이제 술 좀 마시기 시작했는데. 좀 더 있다 가세요.”
역시 연륜 있는 경태 선배다.
아무렇지 않게 은 대표에게 가지 말라며 투정 부리고 있다.
“하하, 죄송합니다. 따로 할 일이 좀 남아서.”
은상재 대표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경태 선배도 정말 붙잡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럼 어쩔 수 없다며 깔끔히 포기했다.
“실장님하고 홍보팀 여러분들도 그냥 자리에 계세요. 굳이 안 나오셔도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박지윤 실장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다가 다시 착석했다.
은상재 대표는 그렇게 홀로 식당 밖으로 향했다.
그의 몸이 사라진 후, 난 주변 눈치를 살짝 본 뒤 자리서 일어났다.
봄 대리가 힐끗, 내 거동을 봤다.
내가 씩 웃자, 화장실을 간다 생각했는지 그는 제재하지 않았다.
거리로 나오자 멀찍이 걸어가는 은 대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난 조용히 뒤를 쫓다가 어느 정도 식당에서 멀어졌을 때,
“은상재 대표님.”
은 대표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뒤를 돌아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 주 기자님? 무슨 일이신지요?”
침착하게 물어오는 은 대표에게 내가 미소 지으며 다가섰다.
“주차장, 가시는 건가요?”
“네. 마리츠 타워에 차를 대놨습니다.”
“가시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평소라면 이렇게 쉽게 뭔가 물어볼 기회가 없었겠지.
아니, 딱히 물어볼 건더기도 없었을 거고.
“예?”
말뜻은 이해했지만, 약간 당혹한 한 마디였다.
“만약 티마가 매각절차를 밟으면, 인수하실 의향 있으십니까?”
돌려 말하거나, 은근히 떠 볼 시간은 없다.
속전속결.
혹시나 여기서 제대로 답을 얻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더 지체하지 말고 매각 기사라도 내놔야 한다.
“네? 티마요? ······무슨 말씀이시죠.”
처음엔 당황, 다음엔 시치미를 뗐다.
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역시 대표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이다.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는 잘 알겠지만, 간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다 알고 있습니다. 티마가 매각 절차 밟고 있다는 것도, 유메프가 사성증권과 만나기 시작한 것도요.”
난 일단 가지고 있는 패를 깠다.
이정도면 은 대표도 대화를 거부하진 않겠지.
유메프가 사성증권과 만난다는 사실은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평소 연이 없던 증권회사와 접촉한다는 건, M&A.
즉 인수자문 혹은 매각자문을 위한 경우다.
현재 유메프가 매각을 고려하고 있나?
‘아니, 창업자 허진의 일신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역시 인수 뿐이지 않은가.
“······그러시군요.”
은 대표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먼 산을 바라봤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티켓마스터, 혹시 인수하실 마음 있으십니까?”
난 다시 한 번 은상재 대표에게 물었다.
그가 쉽게 부인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아니요. 없습니다.”
“네!?”
예상외의 답변이 내게 돌아왔다.
난 자동적으로 인상을 쓰며 빠르게 물었다.
“그럼, 지금 사성증권과 만나시는 일은 뭐 때문입니까?”
“그건 지금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은데요.”
이렇게 나오다니.
-예상투자자 들에게 먼저 정보를 뿌렸을 순 있지만, 비밀유지협약 때문에 투자자들 입에서 새어나오진 않겠죠.
일전에 도현이 내게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비밀유지협약.
은 대표가 만약 먼저 정보를 얻은 ‘예비투자자’의 입장이라면, 비밀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거다.
‘헌데······ 티마가 유메프에게 입찰안내를 하진 않았을 것 같고.’
티마가 유메프의 인수참여를 극히 거북해한다는 건, 미래의 보도자료만 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얼마 전 만난 신성현 대표 또한 유메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나.
그 이유가 동종업계 라이벌을 향한 자존심 지키기 인지, 다른 연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유메프가 티마로부터 예비입찰 안내서를 받아볼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거다.
‘티마 아니면 다른 쪽으로 정보통이 있는 건가.’
난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은상재 대표에게 시선을 줬다.
“그렇다면 유메프는 티마 인수의향이 없다고, 기사를 내도되겠습니까?”
한 번 더 떠본다.
인수협상을 준비 중인 입장에선, 이런 기사가 독이 될 테니.
“네, 그러시죠.”
하지만 정말 상관없다는 듯, 은 대표가 확인사살을 했다.
나도 더 시간을 지체할 여유는 없다.
유메프의 인수참여 내용을 챙기지 못하더라도, 티마 매각 기사는 빨리 내야했다.
그래도 이쯤 되니 오기가 오른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난 비꼬듯 그에게 한마딜 던졌다.
“알겠습니다. 뭐 어차피 티마도 유메프 측 인수는 극구 거부할 생각으로 보이니, 별 상관없겠군요.”
난 몸을 다시 식당 쪽으로 돌렸다.
한 발 내딛는 순간, 은상재 대표가 내 어깰 잡았다.
“예? 기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죠?”
난 고갤 돌리고 은상재 대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관없는 내용 아닙니까? 어차피 인수전에 참여도 안하실 건데.”
“아······”
은 대표가 날 잡았던 손을 놓는다.
“실례했습니다. 기자님······ 하지만 왜 티마 쪽에서 저희를 극구 거부한다고 보셨습니까?”
“저도 지금 말씀드리긴 힘듭니다.”
난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에게 원하는 걸 받으려면, 그가 원하는 것부터 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의 한 마디를 내지른 거다.
잠시 침묵하던 은상재 대표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기자님께서 그 말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 저도 사성증권에 대한 얘길 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