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오시자마자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하네요
마음을 정한 듯, 은상재 대표가 고수했던 의견을 한 발 물러섰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하지만 난 고갤 휙휙 저었다.
“아뇨. 대표님이 먼저 사성증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은 대표가 두 눈을 굴렸다.
내가 내뱉은 티마의 본심이, 과연 확실한 내용일지 계산하는 것일 테지.
만약 내말이 진짜라면, 추진 중인 인수계획은 헛수고가 될 테고.
가짜라면, 비밀유지만 어기게 되는 꼴이니 인수협상이 곤란해질 수 있다.
“······잠시 만요.”
은대표가 갑자기 휴대전활 꺼냈다.
‘뭐지? 혹시 이걸 티마 쪽에 직접 확인하려는 건가?’
순간 당황한 난, 급히 제지했다.
“티마 측에 물어본다 해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은 대표가 고갤 저었다.
“아닙니다. 허진 전 대표께 연락하는 겁니다.”
“유메프 창업자인 허진 주주 말입니까?”
내가 놀라 묻자,
“네. 잠시 통화 하겠습니다.”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은상재 대표는 내게서 고갤 돌리곤 낮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티마 인수에 대한 설명을 한 은 대표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릴 기다렸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통화가 끝나고, 은 대표가 다시 내 얼굴을 향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님.”
은 대표가 뜸을 들였다.
나로썬 어떤 대답이든 건지기만 하면 그만이다.
쿵쾅이는 심장을 모른 체하고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저희는 티마 인수전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그러기위해 사성증권을 인수자문사로 선정한 상황입니다.”
이 짧은 두 마디를 듣기 위해 참 많이도 돌아왔다.
허나 감격을 느끼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건, 허진 주주의 결정입니까?”
난 은상재 대표에게 다시금 확인했다.
은 대표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이내 수긍했다.
“네, 그리고 제 결정이기도 합니다.”
허진과 은상재, 두 사람의 뜻이 같다는 거다.
티마 인수에 대한 확실한 움직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럼 이제 제가 말씀드릴 차례군요.”
은상재 대표는 딱히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날 바라보며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는 듯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며칠 전 티마 신성현 대표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 때 티마가 매각절차에 들어갔음을 알게 됐고, 신 대표에게 장난삼아 유메프가 인수전에 뛰어들면 받을 거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 대표의 대답이 아주 강력했죠.”
내가 이야기를 잠시 끊자, 은 대표가 재촉했다.
“뭐라고 한 거죠?”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라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신 대표는.”
유메프가 인수전에 뛰어들 일이 절대 없다는 걸까.
아니면 티마가 유메프의 인수를 거부하겠다는 걸까.
중의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건, 티마 측이 유메프를 예비인수자로써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제 말이 좀 이해가 되시나요?”
“정말, 신성현 대표가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당혹한 얼굴로 은상재 대표가 내게 재차 확인했다.
난 그의 이 모습이 무척 안쓰러워보였다.
“저로썬 신성현 대표에 대해 거짓말할 이유가 없네요.”
그 말 그대로다.
내가 굳이 없는 소릴 만들어가며, 유메프와 티마의 사이를 이간질 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로써는 납득이 잘 안가는 이야기라서······”
“뭐, 티마 측에선 죽어라 싸우던 상대에게 인수되기 싫은 것 뿐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희는 몇 주 전부터 올쿠폰과 인수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제야 알았다.
티마 측과 유메프 측의 의견이 이렇게 엇갈리는 이유.
유메프는 티마가 아닌, 미국 올쿠폰 측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던 거다.
올쿠폰 입장에선 티마 지분을 인수할 자본력을 갖춘 기업이면 누구든 상관없는 거겠지.
유메프도 올쿠폰이 직접 접근해오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거고.
‘하지만 중간에 티마가 목소릴 내기 시작하면서 일이 틀어진다는 건가.’
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당장 말할 수 있는 범위의 얘기는 아니다.
“오늘도 올쿠폰 측과 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저희는 예정대로 예비입찰에 참가하기로 정한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티마 쪽은 그 부분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만.”
“······으음.”
은상재 대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고민이 많아지겠지.
순조롭게 흘러갈 줄 알았던 일에,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등장한 거니까.
어차피 나완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모두 얻었고, 이제 빠르게 기사만 써 올리는 일만 남았다.
“기사는 당장 쓸 생각입니다. 괜찮으시죠?”
“······네.”
내 말에 은상재 대표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솔직히 은 대표로썬 기사가 나는 걸 피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나와 거래한 이상 피할 길은 없다.
“대신, 유메프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을 잇자 은 대표가 반색하며 물어왔다.
“엣? 어떻게, 말씀입니까?”
“대표님 신분노출 없이, 유메프 관계자로만 기사를 내보낼 겁니다. 멘트처리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면 대표님이 말한 게 아니라 제가 비공개 루트로 캐낸 정보가 되는 거죠.최대한 유메프가 티마 인수 협상에 피해보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기업 대표가 나서서 비밀을 발설했다는 사실을 숨겨주겠다는 거다.
취재원의 이름이 명확히 공개되지 않는 건, 기사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걸 뜻한다.
그래도 괜찮다.
은 대표가 내 취재원인 이상, 유메프는 기사를 부정할 수 없을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유메프와의 관계개선을 생각하면, 나로써도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그, 그래주시겠습니까?”
은 대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내 말을 반겼다.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딱히 유메프를 힘들게 하고 싶은 생각 없구요.”
“가, 감사합니다. 주 기자님.”
은 대표가 가까이 다가와 내 양 손을 잡았다.
이런 얄찍한 남자한테 손을 잡히니 기분이 묘하다.
날 바라보는 표정도 심상찮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황한 내가 손을 떨쳐내려고 흔들었지만, 은 대표는 쉽게 놓지 않았다.
“그럼 기자님만 믿겠습니다.”
“······네. 말씀드린 건 확실하게 지켜드리죠.”
내가 확신을 준 후에야 은 대표는 붙잡은 손을 놓았다.
“그럼 믿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 기자님.”
“네. 나중에 뵙죠.”
은상재 대표와 헤어진 후, 난 휴대전활 꺼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이 식당에 있으니, 지금 쓸 수 있는 건 스마트폰 뿐.
스마트폰 시대가 된 후, 좋아진 점은 바로 이렇게 모바일로도 기사를 작성하고 송고할 수 있다는 거다.
난 클라우드 저장소에서 미리 써뒀던 기사 초고를 불러왔다.
그리고 은 대표가 말한 내용을 첨가해 기사를 완성시켰다.
[유메프 관계자에 따르면 유메프는 올쿠폰과 티마 인수에 대한 논의 중인 것으로······]
은 대표와 약속한 대로, 그의 이름이나 신분은 적지 않았다.
[주진형 : 팀장, 방금 기사 송고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벌써 퇴근했을 김정효 팀장에게, 난 코코아톡 메시지를 보냈다.
[김정효 : 어, 진형아. 알았다. 바로 볼게]
김정효 팀장의 답장이 빠르게 돌아왔다.
아마도 집에서 쉬고 있던 중이겠지.
[김정효 : 진형아. 봤는데 이거 관계자가 누구냐? 확실한 거야? 널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 기사는 멘트도 없고 해서 말이야.]
팀장으로썬 충분히 미덥지 않은 요소겠지.
나도 휴대전활 두드려 그에게 답했다.
[주진형 : 네 확실한 겁니다. 관계자는 은상재 유메프 대표입니다.]
[김정효 : 뭐? 정말? 근데 왜 기사엔 뺐어?]
[주진형 : 은 대표가 원했습니다. 협상 중인 올쿠폰 측과 비밀유지 때문에요.]
[김정효 : 아, 그러냐. 알았다. 바로 출고할게. 수고했다!]
[주진형 : 네.]
난 씩 미소 짓고, 휴대전화를 다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환영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야 주진형이! 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와?”
다시 환영회 중인 중식당에 들어서니, 최경태 선배가 날 보며 소리쳤다.
“네, 잠시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경태 선배가 일어서 나에게 왔다.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귓속말을 했다.
“야, 쟤는 뭐하는 애냐?”
나도 덩달아 조용하게 대답했다.
“네? 누구요?”
“아니, 쟤. 김예인 말이야. 완전 술고래야. 말 한 마디도 없이 지금 고량주 거덜 내고 있어. 네가 좀 어떻게 해봐라. 이거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고.”
“아, 알겠습니다. 선배.”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식탁을 보니, 분명 두 세병뿐이었던 고량주가 한가득 세워져 있었다.
‘설마 저 많은 걸 혼자 다 마셨······아니지 가능하지 저 여잔.’
난 고갤 저었다.
“어딜 갔다 왔어요?”
내가 옆에 앉자, 예인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밖에 일이 좀 있어서요.”
“혹시 은상재 대표?”
눈치 더럽게 빠르네.
“곧 알게 될 겁니다.”
난 그저 미소 지었다.
환영회 분위기는 꽤 무르익은 듯 했다.
예인이 있는 가운데 테이블만 조금 위축돼 있을 뿐.
영기조차도 신 나서 술을 마셨고, 기분을 회복한 박지윤 실장은 맨 좌측 테이블에서 이야길 주도하고 있었다.
“주 기자님!”
조용하게 음식을 주워먹고 있던 내게, 이일형 홍보팀장이 다가왔다.
“아, 팀장님. 유메프 오신 거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무슨 말씀을. 저야말로 정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자, 한 잔 받으시죠.”
이 팀장이 내게 술병을 내밀어 보였다.
난 식탁에 놓여있던 빈 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어쩌나······”
“네? 왜 그러시죠?”
내 중얼거림에 술을 따르던 이 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오시자마자 고생하시게 해서 죄송하네요.”
곧 기사가 터지면, 오늘 환영회는 엉망이 되겠지.
난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이 팀장에게 사과했다.
“어······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파악을 못한 이 팀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변했다.
그때, 경태 선배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뭐야 이 시간에, 어. 나야. 왜? 뭔데. 뭘 확인해보라는 거야······어?”
경태 선배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신속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티마 매각돌입······ 유메프 인수전 참여? 뭐냐 이거!”
‘기사가 드디어 떴구나.’
난 찰랑이는 술잔을 바로 꺾어 마셨다.
“주진형! 이 미친놈! 밖에 나가서 기사 쓰고 온 거냐!”
기사를 확인한 경태 선배가 소리쳤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인데?”
“왜 그러세요. 선배?”
“어머, 뭐에요?”
환영회에 참석한 기자들이 난리가 났다.
“아오, 불금에 무슨 짓이냐고 이 미친 탈곡기야!”
경태 선배의 절규가 식당 안에 메아리쳤다.
분위길 파악한 영기가 내게 달려왔다.
“서, 선배. 저희 기사 나간 겁니까?”
“응, 확인해봐.”
[티마 매각돌입······유메프 ‘인수전 참여’- 주진형, 박영기 기자]
다른 기자들에게도 소속매체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식당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마 오늘 당직자거나 부장급 이상의 기자들이 기사체크를 한 거겠지.
“기, 기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 앞에 서있던 이일형 팀장이 당황한 안색으로 묻고 있었다.
“팀장님. 기사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터트려서 죄송하지만, 시기가 딱 겹칠 수밖에 없었던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기자님!”
박지윤 실장과 김봄, 김유동 대리도 달려왔다.
“이, 기사 내용 사실인가요?”
박 실장이 내게 따져 물었다.
“네 사실입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기자님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박 실장도 티마 인수에 대해선 파악이 전혀 안 됐던 모양이다.
그는 급히 전화를 걸더니, 곧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은 대표님! 기사 봤어요? ······네? 뭐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박지윤 실장은 광고대행사를 다니다 창업주 허진과의 친분으로 위메프에 입사한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사내에서 굉장히 오만하게 구는 걸로 명성이 자자했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긴 해도, 대표인데 저렇게 막 대하는 걸 보니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유메프 홍보팀이 혼돈에 빠져있을 때.
이미 내 기사를 읽은 기자들도 모두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
“와 이 무서운 놈. 그렇게 웃고 앉아있더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주 기자님,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출처 확실하신 거예요?”
“아니 김 대리님, 이거 사실 확인 지금 안돼요? 어떻게 된 거야. 야 진형아, 뭐라고 말 좀 해봐.”
경태 선배와 이수경 기자, 정광현 선배 등.
숱한 기자들이 나와 홍보팀 사이서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참 곤란해 하고 있던 차에, 내 바지주머니에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들고 화면을 확인하자,
[티마 김서정 홍보팀장]
역시나 예상했던 통화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