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받아둬요. 꼭 필요할 일이 있을 테니까
잠시 후, 유메프 1층으로 세명의 사람이 내려왔다.
이일형 홍보팀장과 김봄, 김유동 대리.
“기자님!”
세 사람이 날 보고 인사했다.
“세 분이 다 내려오셨네요? 전 이 팀장님만 오실 줄 알았는데.”
내가 전화로 불러냈던 상대는 이일형 팀장.
그렇지만 사실 난 나머지 두 사람도 함께 내려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아, 주 기자님 오셨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나왔습니다.”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따라오고 싶어서 온 거에요.”
“맞슴다. 안 그래도 유일하게 저희 쪽 기사 내주셨는데, 인사 드려야하지 않겠슴까.”
이 팀장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두 대리가 잘 호흡을 맞춘다.
“바쁘시진 않으시구요? 티마 기사 대응하시느라 다른 기자 분들 안 만나는 걸로 아는데.”
그렇기 때문에 본사 도착해서 전화를 했던 거지만.
출발하기 전에 점심 일정을 잡으려 했다면, 아마 거절당했을 거다.
지금 유메프로썬 티마 측이 내놓은 자료가 재생산 되는 걸 최대한 막아야 하고, 그 외의 업무나 취재요청은 거부할 터다.
“그래도 밥은 먹고 해야죠! 주 기자님한테 대접해드리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이 팀장이 밝게 대답했다.
그래, 바로 어제 식사 대접하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얘기했었지.
물론 이 팀장도 내가 바로 다음날인, 오늘 이렇게 찾아올 줄은 예상 못했을 거다.
미안하지만, 내가 급하니 어쩔 수 없다.
“사실 전 오늘 그냥 들려본 거구요. 아마 박영기 기자가 홀로 취재할게 따로 있을 거예요. 첫 단독취재 하는 거라 옆에서 구경이나 좀 하려구요.”
난 뒤에 앉아있던 영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기가 쭈뼛거리면서 우리 앞에 섰다.
“저, 저번에 뵀었죠. 박영기입니다.”
“아, 기자님. 오늘 전화 주셨죠. 제가 아직 MD분들 의사를 전달받지 못해서.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봄 대리가 변명하는 사이, 난 이일형 팀장과 본사 후문으로 향했다..
“가시죠.”
“네. 팀장님 오시자마자 고생하시네요.”
난 걸어가며 이 팀장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아이고,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첫 출근을 좀 늦출 걸 그랬습니다. 더 쉬라는 걸 일부러 일찍 나왔더니 이 사단이네요.”
이건 분명 진심 섞인 말이다.
환영회를 하자마자 기사가 터지더니, 연달아서 티마와 진실싸움까지 벌이고 있다.
‘더 웃긴 건, 가장 최악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사건이 또 터진다는 거지.’
내 옆을 걸어가는 이일형 팀장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곧 발생할 인턴 갑질 논란.
이름만 들어도 기업들이 식겁할만한 프레임이다.
난 며칠 후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르는 이 팀장에게 연민이 느꼈다.
‘뭐, 내가 취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터질 사건도 아니니. 죄책감 느낄 필요야 없지.’
나쁜 건 언제나 불공정거래를 한 자들일 뿐이다.
그걸 공론화하고 비판한다 해서 내가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아 이쪽에 돈까스 잘하는 경양식 집 있는데, 거기로 가실까요?”
난 이 팀장 말에 고갤 끄덕였다.
“네, 전 좋아요. 다른 분들은?”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세 사람을 본다.
영기가 봄 대리와 유동 대리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흠, 아직은 무린가.’
평소 같았으면 영기가 굳이 홀로서기를 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녀석의 제 몫이 꼭 필요하다.
내가 직접 파고드는 건 너무 작위적인 까닭이다.
이상한 낌새 하나 없는 채용과정에 내가 갑자기 냄새를 맡고 취재한다는 것부터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게다가 그 상태로 사건이 터지면 여러 오해에 휩싸일 수도 있겠지.
‘뭐, 특종 내려고 면접자들을 부추겼다거나. 일부러 문제를 키웠다거나. 쓸데없는 논란은 피하는 게 맞아.’
조금 피곤하더라도 말이다.
난 가까이 온 영기의 어깨를 주물렀다.
“돈까스, 괜찮지?”
“네, 넵.”
그나마 나와 있을 땐 긴장이 덜 한 편이니 최대한 붙어 있어야 하는데.
중간에 다른 곳에서 일이 터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들어가시죠.”
우리 다섯은 웬 궁전처럼 생긴 경양식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내부는 고전적인 경양식 집 인테리어로 돼있었다.
“와, 이런 집은 오랜만인데요.”
“하하, 추억의 장소 같은 곳이죠. 저쪽 자리로 가시죠.”
테이블이 작았기 때문에, 우린 여급의 도움을 받아 두 자리를 합쳤다.
각자 식탁에 놓여 있던 메뉴판 펼쳤지만, 결국 우리의 식사는 돈까스로 통일됐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박지윤 실장님이 꽤 화가 나신 것 같던데, 오늘은 어떠세요?”
식사를 기다리며 내가 이야길 꺼냈다.
뭐 잔뜩 짜증이 나있단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지만.
“아, 뭐 오늘도 그리 좋진 않으세요. 아무래도 기사가 자꾸 나니까요.”
“박 실장님은 화가 나시면 주로 어떤 행동하시나요?”
큰 기대 없이 장난삼아 던진 말이었다.
헌데 이를 들은 김 봄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럴 땐 저희 진짜 죽어요. 괜히 사무실 내려오셔서 막 이것저것 지적하고 가세요. 딱 보면 알죠. 아 오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시구나.”
“핫핫, 그러시군요.”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이일형 팀장도 벌써 당해본 모양이다.
그도 봄 대리 말에 고갤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님이 나서주셔서 많이 살았죠.”
“제가요?”
이 팀장의 말에 난 갸우뚱했다.
“네, 박 실장님이 화가 아주 많이 나있었을 때에 직접 전화 주셔서 사실 확인 해주시고. 기사도 나가서 그나마 한숨 돌린 겁니다.”
그것참,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나야 티마 측 자료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물어본 것뿐이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무리한 점심식사 일정도 성사된 거고.
서로서로 잘 된 거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여급이 넓은 쟁반에 돈까스 접시를 들고 왔다.
대부분의 경양식 돈까스가 그렇듯, 흰 양송이 스프와 샐러드가 곁들여져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우린 이 말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가게 안에 열 명 넘는 인원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어?”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이일형 팀장을 발견한 상대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많이 드세요!”
“네, 팀장님도.”
이 팀장이 답하는 걸 들어보니, 상대 쪽도 직급이 팀장인 모양이다.
“누구세요? 유메프 직원인가요?”
내가 호기심에 물었다.
“네, 상품기획실 2팀장이에요.”
‘상품기획실이면······MD란 얘기잖아.’
난 그 말에 좌측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고갤 돌렸다.
만일 그렇다면, 영기의 취재접근이 더 간단히 이뤄질 수 있다.
“그럼 저분들 다 유메프 MD신 거예요?”
“아, 아뇨. 저랑 인사한 팀장 분만 재직 중이시고 다른 분들은 아마 면접 보러 오신 분들일 겁니다.”
“······네?”
순간적으로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 저희 지금 MD채용기간이라. 맞지?”
이 팀장이 김봄 대리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확실한 선고가 내 앞에 떨어졌다.
단순히 재직 중인 MD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바로 저기,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내 목표인원들이 앉아있다는 거다.
‘이게 어떤 행운인진 모르겠지만, 고글 때처럼 놓쳐선 안 돼.’
고글코리아 본사서 박진종 대표와 만나놓고도 알아보질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소모한 내 감정과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까울 뿐.
난 바로 영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기는 내 속을 모른 채 열심히 돈까스를 썰고 있었다.
‘어차피 영기에게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저 면접인원들이 내 취재에 필요하다는 건, 나만 알아야 하는 사실이다.
하는 수 없이 계획을 약간 변경하기로 했다.
“아, 봄 대리님! 이렇게 저분들하고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박영기 기자가 준비 중인 내용, 좀 바꾸는 게 어떨까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김봄 대리에게 기습적으로 말을 던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봄 대리가 내게 반문해왔다.
음, 예상범위 내다.
“음 박 기자가 경험도 쌓을 겸, 소셜커머스 MD분들 취재해보라고 던져 준건데. 여기서 유메프MD 취직 희망자들을 만났으니, 저분들 인터뷰 기사를 하나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와 봄 대리 사이에 낀 영기가, 대화를 들으며 놀란 눈을 했다.
방심하고 있던 사이 임무에 변화가 찾아 온 거니까.
당황 할만하다.
“음, 어떤 방향으로 쓰실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형일 팀장이 껴들었다.
“뭐 쓰는 거야 영기가 알아서 쓰겠지만. 제 생각엔 저분들이 유메프에 입사하려는 이유, MD의 비전에 대한 견해, 큐레이션 커머스에 대한 생각 등만 적어도 훌륭할 것 같은데요.”
이 정도의 말만 들어도, 연식이 쌓인 홍보 인에겐 기사가 그려지겠지.
내가 일부러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사 뼈대를 설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내 노림수대로, 이 팀장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내 고갤 끄덕인 이 팀장이 봄 대리에게 물었다.
“봄 대리, 가능하겠어?”
“그게 저분들이 아직 저희 정식 직원 분들이 아니라서 저희가 인터뷰를 왈가왈부 하긴 좀 그렇구요. 인재관리실 쪽에 먼저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인재관리실이라면 HR(인적자원)부서를 가리키는 듯하다.
하긴 아직 채용 전 인원들이니, 유메프 입장에선 좀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겠지.
“아니면,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저분들께. 유메프에선 시간만 약간 양해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
내가 빠르게 말했다.
일처리가 길어지기 전에 잘라낼 심산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아직 소속이 확실하지 않은 분들을 저희 쪽 인터뷰로 내기가······”
봄 대리가 덧붙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잘 알아들었다.
저들은 아직 입사자들이 아니다.
그저 면접을 보고 있는 일반인일 뿐이다.
유메프 취직 희망자라고 기사는 나갔는데, 정작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이나 유메프나 꽤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겠지.
“물론, 저도 압니다. 그러면 굳이 유메프라고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기사에 유메프를 직접 명시하지 않고 소셜커머스 A, B, C로 표현하면 된다.
종사자들이나 인터뷰 내용을 상세히 보고, 어딘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
일반 독자들은 어딘지 알 수도 없다.
“아······”
내 말뜻을 알아들은 봄 대리도, 더 이상 딴죽 걸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팀장님. 쉽게 가시죠. 박 기자도 온 김에 일처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은근히 압박했다.
그러자 이 팀장이 곤란한 듯 헛헛 웃음 지었다.
옆에 앉은 영기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본인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사자가 모르는 눈치다.
그리고 20분 뒤 근처 카페.
“자, 음료수 드시면서 하세요.”
난 카페 테이블 위에 주문한 음료 잔들을 내려놨다.
테이블 주위로 앉은 사람은 총 5명.
유메프 면접인원 4명과, 경양식 집과 똑같은 얼굴의 영기까지.
이일형 팀장이 MD팀 협조를 얻은 덕택에, 면접자들 중 취재 지원자를 뽑아 온 거다.
“영기씨,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아······아무 얘기도 안했는데요.”
그걸 말이라고.
어색하게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도 말을 했어야지.
“영기씨, 이렇게 모르는 분들 앞에서 나 좀 창피하게 만들지 마.”
난 한숨을 쉬며 영기 옆 자리에 앉았다.
“우선 이렇게 처음 뵙는 분들 계시면, 편안한 주제로 대화를 나눠야지. 특히 이분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으로, 응? 아 우리 박 기자가 사실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수습이라서요. 양해부탁 드릴게요. 하하.”
영기를 가르치다 말고 면접자들에게 설명했다.
“유메프 MD채용 면접 보시는 걸로 아는데, 면접을 길게 보나 봐요. 밥도 챙겨 주는 걸 보니까.”
난 영기에게 보고 배우란 듯이 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내 말을 들은 네 명 중, 한 남자가 대꾸했다.
그의 목에 걸린 유메프 출입증에는 김성철이라고 이름이 적혀있었다.
“네. 면접이 아니라 인턴십 하면서 실전평가 받는 겁니다.”
“실전평가요?”
“네. 저희도 시작한지 일주일 좀 넘었는데 이주 동안 진짜 MD처럼 일하고 나온 성과를 바탕으로 정직원 채용이 결정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본 일주일 후의 보도자료 내용과 흡사하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이들은 스스로를 단순한 면접자가 아니라 ‘인턴’.
즉 영기와 같은 수습사원이라 생각한다는 거다.
“그렇군요. 아참, 저희 소개를 제대로 안 드렸네요. 아까 대충 설명은 드렸지만, 자 여기 명함입니다.”
난 준비해뒀던 명함 네 장을 꺼내, 면접자들에게 나눠줬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라고 합니다.”
“엣, 전 디지털투모로우 박영기 기자입니다.”
내 행동을 보고 영기도 명함을 급히 꺼냈다.
‘아직도 멀었구나, 영기씨.’
면접자들은 건네받은 명함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들끼리 궁시랑 대기 시작했다.
“디지털투모로우?”
“처음 듣는데······”
“어, 나도. 여기 어디지?”
이게 일반 독자들에게 미치는 듣보잡 매체의 영향력이다.
난 생긋 웃으며 그들에게 강조했다.
“잘 받아둬요. 꼭 필요할 일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