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디지털투모로우를 탈출한 선배들의 공습
이메일 발신 날짜는 바로 오늘.
미래의 보도 자료가 아니었다.
‘설마 미래가 바뀐 건가?’
내가 한 번 더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난 곧장 메일을 눌렀다.
뭐가 됐든 본내용을 확인하는 게 먼저다.
[유메프 지역MD 채용 3차 현장 테스트 참가자 11명, 전원 최종합격으로 정정 했습니다]
이메일 제목은 본문에 한 번 더 배치돼 있었다.
난 급히 그 아래 내용을 눈으로 쫓았다.
[안녕하십니까. 유메프 대표 은상재입니다]
‘허허······’
한 번 더 박지윤 실장이 자료를 보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은상재 유메프 대표가 직접 움직인 듯하다.
옳은 판단이다.
아니, 처음부터 박 실장에게 맡기지 말았다면 더 좋았겠지.
[국민 여러분께 저희 문제로 심려 끼쳐드린 점 죄송합니다.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임원진과 밤샘회의를 통해 대책을 강구했고, 이에 대해 오늘 결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곧바로 두 번째 문단으로 넘어간다.
[사과드립니다]
그곳엔 두꺼운 볼드체로 이 한 마디가 작성돼 있었다.
그 글자의 존재감이 내 가슴을 벅차게 때렸다.
희소식을 듣고 기뻐할 성철과 그 외 10명의 모습이 눈이 선했던 까닭이다.
그런 벅찬 마음으로 세 번째 문단을 읽기 시작했다.
헌데 첫 문장을 보자마자, 난 고갤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희 소통이 미숙했습니다. 저희 의도를, 진심을 제대로 전달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뭔가 싸한데.’
유메프의 잘못은 명백히 밝혀진 상태다.
그걸 단순히 소통미숙으로 묶어 치부해버리면 안 되는 거다.
자신들의 과오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못한단 얘기니까.
[저희는 가장 자부심 넘치는 진정한 지역 상품 기획자들을 양성하고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기에 3차 면접의 통과 기준을 최고 수준으로······소중한 취업준비 시간의 기회비용을 아껴드리고자 2주 만의 과정으로 최종판단을······저희 서툰 설명이 오해를 만들었······]
이젠 미간을 찌푸리게 된다.
내 불안함을 적중시키듯 비겁한 변명의 행렬이었다.
‘취업준비 시간의 기회비용이라.’
그걸 아는 사람들이 3차까지 면접을 보고, 2주간 실전 시험을 치렀나.
이쯤에서 나도 느낌이 섰다.
유메프는, 은상재 대표는 진짜 잘못을 사과할 생각이 없는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합리화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다.
‘유메프가 맞는 소릴 하네. 쳐맞는 소릴.’
마우스를 쥔 내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미 내가 기사를 통해, 채용갑질 사태는 오해가 아님을 밝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딴······
‘똑같다. 똑같아. 누굴 욕하고 그럴 문제가 아니었어. 진짜 실망이다. 은상재 대표.’
어이가 없었다.
적어도 은상재 대표가 박지윤 실장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던 내 판단을 부순 거다.
난 머릿속에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던 은상재 대표의 이미지를 찢어버렸다.
[11명 현장테스트 참가자 모두 최종합격으로 정정합니다]
네 번째 문단도 역시 이 문장만 두껍게 담겨 있었다.
그 아래엔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채용과정을 개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저희가 달을 가리켰지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본다면, 그건 저희가 말을 잘 못 전하게 맞습니다······저희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에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런 개 역겨운 새끼들이······”
내 분노가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결국 자신들은 갑질을 한 적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는 말 아닌가.
그걸 ‘달을 가리켰더니 가리키는 손만 봐서 달은 잊는다’는 고사 성어.
견지망월까지 써가며 부득부득 우기고 있는 거다.
언론과 여론의 공세에 ‘우린 잘못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해하게 했으니 미안하다’ 우롱하는 꼴이다.
정말 비겁하고 구질구질했다.
“왜, 왜 그래 진형아?”
“서, 선배?”
한창 바쁜 오전 사무실, 적막을 깬 내 욕설에 주위 사람들이 놀랐다.
평소 이 시간엔 업무전달 외에는 말 한마디 안 꺼내던 나다.
“팀장, 유메프 쪽 자료 보셨습니까?”
내가 분을 삭이며 김정효 팀장에게 물었다.
“-아 어, 안 그래도 지금 제목 봤다. 뭐 문제 있냐?”
“이 놈들 사과 하는 척만 하고 끝까지 자기 잘못은 없다고 써놨습니다.”
“후우. 그랬어? 근데 진형아······흐음, 아무래도 유메프는 여기까지만 다뤄야 할 것 같다.”
“예?”
예기치 못한 김 팀장의 말에, 당황한 내가 큰소릴 냈다.
“잠깐만, 나가자.”
김 팀장이 신호를 보냈다.
사무실 안에서 말하기는 곤란하단 뜻이다.
말귀를 알아듣고 난 자리서 일어났다.
계단을 통해 사무실에서 2층이나 내려간 뒤.
김 팀장이 내게 못내 미안한 듯 상황을 설명했다.
“유메프 박지윤 실장이 우리 대표와 대학 선후배 사이란다.”
이건 무슨,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관계냐.
“어제 네 기사 나가고 나서 박 실장이 대표한테 전화한 모양이야. 광고도 넣겠다고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 했다더라. 이 일에 힘 좀 써달라며. 대표가 대학 선후배는 못 알아봐도 돈은 확실하게 보잖냐. 유메프 기사,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쓰라고 지침 떨어졌다.”
“아······”
사무실에 대표가 있으니,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그대로 납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 자료도 그대로 내보내란 말씀입니까?”
“뭐- 그래야겠지. 괜히 유메프가 진짜 사과를 한 게 아니라는 식으로 쓰면, 대표가 안 내보 낼 거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김정효 팀장이 말했다.
본래 정상적인 매체는 영업부와 편집국이 별도 분리가 돼있다.
그 말인 즉, 편집국장이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고 회사의 손익과 상관없이 기사를 출고할 수 있다는 거다.
헌데 우리, 디지털투모로우는 이윤철 대표가 우리 매체의 국장대행.
사실상 국장을 맡고 있는지라, 아무 짝에 소용없는 소리다.
“다른 매체들보다 저희가 나은 건, 취재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건 피해자의 목소리를 실으려면 기사가 공격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빼야겠지.”
그러니까, 단독 기사를 포기해서라도 유메프를 지켜야겠다는 거다.
물론 이것이 김정효 팀장의 진심은 아니겠지만,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진형아. 네 마음 충분히 안다. 나도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내고 싶지만, 그래도 대표는 대표야. 국장이기도 하고. 일단 우리는 따라줘야 돼.”
그래, 팀장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작은 매체를 키워보겠다고 이디넷을 박차고 나온 것 뿐.
난 할 수 없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쪽에서 분명 기사를 낼 겁니다.”
난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김정효 팀장에게 말했다.
그걸 이해한 팀장도 웃었다.
“그래,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말이야.”
팀장이 사무실로 돌아간 사이.
난 그 계단에 남아 유메프 면접 참가자, 김성철에게 연락했다.
“주진형 기자입니다.”
-네. 기자님!
성철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 가능하세요?”
-물론이죠.
난 지체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철씨 혹시 유메프 측에서 전화 받았나요?”
-전화요? 아뇨. 없었는데요.
“곧 있으면 새로 유메프 기사가 뜰 거예요. 불합격 면접자 전원 합격으로 정정한다구요.”
-저, 정말요?
기대에 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들에게 정말 잘 된 일이다.
허나, 과정을 듣고도 기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약간 문제가 있어요. 유메프가 내놓은 사과문엔 갑질이나 자신들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의아하다는 듯, 성철이 물어왔다.
“모든 건 오해였고, 의사소통 문제였을 뿐. 진짜 갑질이 있었던 건 아니다. 유메프 측 자료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진짜인가요.
성철은 심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곧 있으면 인터넷에 기사 뜰 겁니다.”
-하아-
“그래서 이에 대해 인터뷰를 따야 하는데 말이죠······ 제가 기사를 못 내게 됐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성철 입장으로썬 당혹의 연속이겠지.
지금까지 기사로 도와주던 내가 빠지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유메프에서 저희 쪽에 손을 썼더라구요. 유메프 측에 불리한 기사가 막혔습니다.”
-기, 기자님······
성철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날 불렀다.
난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다독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저한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성철씨하고 다른 분들에겐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매체는 많고, 기자는 그보다 더 많습니다. 저 말고 다른 기자의 손을 빌리면 되는 일입니다.”
-아아······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뭐······사실 저한테 득 될 건 없는 일이지만. 유메프 하는 꼬라질 보니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정신 차릴 때까지 두들겨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하······그렇죠.
그나마 감정이 좀 풀린 억양으로 성철이 웃었다.
“그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아는 기자 분들께 성철씨나 혜진씨 연락처를 보내놓겠습니다. 유메프측 태도에 대한 인터뷰 받을 수 있도록 말이죠.”
-아, 그럼 애들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네. 그래야죠. 의견 기다리겠습니다.”
성철과의 전화를 끝낸 후.
나도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윤철 대표가 날 힐끔 보며 안색을 살피는 듯 했다.
난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하던 일들을 재개했다.
[김성철 : 기자님. 애들하고 상의해봤는데, 인터뷰 하고 싶다는 애들이 4명 있었습니다]
10분쯤 흘렀을 때, 성철로부터 코코아톡이 왔다.
내용을 확인한 난, 그들 안에서도 꽤나 의견이 갈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1명 중 4명, 성철까지 합해 5명만이 유메프의 태도에 직접 맞설 생각이다.
아마도 나머지 6명은, 유메프의 합격통보를 받아들일 작정이겠지.
‘그들은······그들의 생각도 이해해줘야지. 그러기 위해서 싸운 거니까.’
나도 답장을 작성했다.
[주진형 : 알겠습니다. 성함하고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바로 넘기겠습니다]
그러자 곧장 성철로부터 5명의 연락명단이 넘어왔다.
‘자! 철퇴를 휘두를 시간이다.’
난 휴대전화를 조작해 ‘디지털투모로우 탈출’ 코코아톡 그룹채팅 방에 들어갔다.
[주진형 : 선배들. 유메프 면접자들 연락처 드리겠습니다]
[상성훈 : 오오오오오오오 주느님!!! 어서 제게!!!]
[김기문 : 와우 주 후배, 진짜 주는구만]
[이주연 : 오 진형아 땡큐땡큐! 휴. 이제 부장이 그만 갈구겠네]
[주진형 : 선배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난 어제 기자실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며 메시질 작성했다.
[상성훈 : 어어어어어 뭡니까아아아[email protected]%$%^#]
[주진형 : 이 명단, 선배들 소속 매체 외엔 안 퍼지도록 해주십시오. 다른 기자들에게 넘기시면 안 됩니다.]
[김기문 : 오우 알았다네 주 후배. 그 정도야 가능하지!]
[이주연 : 음, 그럼 내가 담당기자한테 얘기해둘게]
[주진형 : 특히 머니데이 문강홍, 조선일간 김호정, 헤럴드이코 이윤정. 이 세 기자에게는 절대 명단이 넘어가선 안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셋은 기자실에서 주도적으로 내게 연락철 요구한 기자들이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이 셋만큼은 절대 좋은 꼴 보게 할 수 없다.
[김기문 : 뭐,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네]
[이주연 : 오키.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임]
[상성훈 : 내가 그놈들 다 죽여줄께에에에!!!!!]
가장 믿지 못할 상 선배만 제외하면 다들 안심이다.
난 성철이 작성한 연락명단을 채팅방에 올렸다.
[상성훈 : 오예~ 5명이나 있네. 주느님 만세!]
[이주연 : 굿굿!]
[김기문 : 주 후배, 갓블레스유라네]
연락처 전달까지 마쳤으니, 난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난 메이버 사이트에 접속해 유메프 보도자료가 얼마나 퍼졌는지 파악했다.
[채용갑질에 무릎 꿇은 유메프...11명 합격정정]
└[유메프, MD 불합격자 11명 전원 합격정정]
└[유메프 “채용갑질 죄송...전원 합격처리”]
└[유메프 은상재“불합격자 11명 전원 합격 결정”]
이미 여러 매체의 기사가 출고 돼 있었다.
대부분 유메프 측 자료를 그대로 읊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긴, 이를 비판할 취재원을 내가 독점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기사, 기자들은 분명 있다.
[사과 아닌 사과하는 유메프, 갑질채용 전면 부정 –이디넷 김예인 기자]
난 홀린 듯 기사 제목에 마우스 포인터를 갖다 대고 클릭했다.
[하지만 은상재 대표의 사과문에는 갑질채용을 인정하는 문장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는 격언을 이용, 언론과 국민들의 몰이해를 비난하고 있다······]
기사 내용을 빠르게 읽은 난 입 꼬릴 올렸다.
‘흥, 그나마 볼만한 기사를 내놨네.’
뭐, 성격에 큰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예인은 처음 봤을 때부터 강단 있고, 똘끼를 취재에 쓸 줄 아는 기자였다.
‘다른 기자들이 이런 건 좀 본받아야지.’
난 예인의 기사 페이지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메이버 검색결과 페이지를 열고 새로 고침 했다.
뉴스 페이지에 익숙한 매체 이름이 새로 떠있다.
[“유메프 사과문, 영혼 없다······입사 안할 것” -마이뉴스24 상성훈 기자]
‘때가 왔다.’
만족한 내가 눈을 감았다.
드디어, 디지털투모로우를 탈출한 선배들의 공습이 시작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