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특종-57화 (57/107)

57. 이 사태의 책임과 무관하게 직책을 유지합니까

“오늘 이렇게 저희 유메프 간담회에 참석해주신 기자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일형 홍보팀장이 바로 고개 숙여 기자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곤 다시 마이크를 잡고 간담회 사회를 이어나갔다.

능숙한 진행 덕분에, 박지윤 홍보실장의 공석은 충분히 잊게 해줬다.

“오늘 간담회는 우선 은상재 대표님의 채용논란과 관련한 발표 후, 기자님들의 질의응답 시간을 거쳐 식사와 기사작성 시간을 함께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팀장의 안내에 간담회장은 정적을 유지했다.

“그럼, 바로 은상재 대표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회장 뒤쪽에서 은상재 대표가 걸어 나왔다.

중간 길목을 막고 있는 카메라들 때문에 잠시 홍보실 인원과 영상기자들이 우왕좌왕했다.

간신히 길을 찾은 은 대표가 침착히 걸어 나와 단상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유메프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은상재입니다.”

은 대표가 마이크에 입을 대고 인사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핼쑥한 얼굴이었다.

지난 번 홍보팀장 환영회에서 봤을 때에도 유약해 보이긴 했다.

지금은 유약을 넘어선 병약함에 가까웠다.

앞자리에 앉은 기자들에게서 약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호응이 없던 탓에 곧 어색하게 잦아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돼 여러모로 송구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흐음, 과연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볼까.’

첫 마디는 확실히 사과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보도 자료로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으니, 말도 끝까지 들어봐야 할 일이다.

“우선 이 사건으로 유메프에 대해 실망하셨을 국민 여러분들과, 면접 참가자 11인 분들께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은상재 대표가 갑자기 단상 앞으로 나오더니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살집 없는 마른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영기씨, 지금이야. 사진 찍어.”

“네, 넵!”

영기가 부산스레 움직이며 사진을 찍었다.

지금의 이 사과장면은 다 홍보실에서 계획한 거다.

‘기사에 쓰이기에도 가장 좋은 모습이지. 진심어린 사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 세례를 터트린다.

10초간의 포토타임이 끝나고, 은 대표는 다시 단상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는 채용과정은 물론 유메프 사내에서도 갑질이라는 표현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은상재 대표가 준비된 자료들을 손에 들었다.

이후, 발표는 미리 나눠준 보도 자료에 명시된 대로 진행됐다.

“우선 채용 논란으로 인해 받았던 고용노동부 유메프 조사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메프 채용갑질 논란이 터지자, 고용노동부가 재빨리 진상조사에 착수했었다.

유메프 뿐만 아니라 삼성동 부근의 여러 업체들도 포함돼 있었지만, 명목상 가장 큰 먹잇감은 유메프였다.

그 결과가 오늘 은상재 대표의 입으로 발표되는 것이다.

‘뭐, 자료에 적혀있는 내용이지만.’

이미 보도 자료를 보고 기사로 작성해둔 부분이다.

“저희가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시정조치는 모두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실무 테스트 기간 중 발생한 면접 참가자 분들의 연장 및 야간 근로에 대한 정당한 수당을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적으로 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 문제없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박지윤 실장의 주장은 역시 틀렸다.

내가 기사로 지적했던 대로 임금 문제가 적발된 거다.

난 노트북으로 메모장 프로그램을 켜고 임금 문제에 대해 적어 놨다.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할 거리를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실무 테스트 기간이 있었음에도, 채용 공고문에 근무형태를 정규직으로만 명시해 구직자에게 혼란을 야기했고, 재발하지 않도록 계획서를 제출하라 명령 받았습니다.”

이로써, 지원자들과 회사의 엇갈렸던 인턴, 면접자의 호칭논란도 종결 된 것이다.

오해할 여지를 준 쪽은 회사, 유메프.

뭐, 유메프가 보도 자료를 통해 ‘소통에 오해가 있었다’라고 말한 건 이런 시정명령을 예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간제 근로자와 근로계약 체결 당시 휴일이나 취업장소, 종사 업무를 미명시한 부분에 대해서 과태료 840만 원이 부과됐습니다.”

약간 애매하게 넘어갔지만, 이건 채용갑질과는 별도의 문제인 듯하다.

고용노동부에서 조사하다 보니 딸려 나온 사건이겠지.

은상재 대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에 대해 저희 유메프는 해당 면접참가자 분들께 미지급한 근무 수당을 지급했으며, 부과된 과태료까지 모두 납부를 마쳤습니다. 향후 내부 임직원 의견을 수렴해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내부 소통도 적극 강화 할 계획입니다.”

자, 이제 고용노동부 조치에 대해선 다 얘기했다.

남은 건 오늘의 핵심 사안.

채용갑질에 대해 털어놓을 시간이다.

“그리고 이미 보도 자료를 통해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저희는 실무 테스트 과정에서 불합격 처리했던 11명의 면접참가자 분들을 모두 합격처리로 정정했습니다. 그분들 중 입사를 원하신 10명만 현재 회사에 근무 중입니다.”

입사 거부를 대대적으로 선언한 김성철을 제외하고, 남은 열 명은 모두 유메프 입사를 선택했다.

개인적으론 성철의 선택이 아쉬웠지만, 뭐 개인의 판단이니 내가 뭐라 할 권리는 없다.

그저 더 잘되길 바랄 뿐.

“사실 이번 지역 영업직 채용면접은, 이전과 달리 매우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적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은 대표의 해명에 내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지금껏 똑같은 기준으로 채용을 해왔다면, 유메프 내 신입MD는 극히 드물었을 터다.

“지역 영업직은 회사 내에서도 업무 강도가 가장 높은 직종입니다. 그 때문에 퇴사율 또한 높아 채용 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지나친 의욕으로 인해 과도하게 높은 기준을 제시했고, 이에 대한 명확한 공지도 이뤄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보도 자료에는 실지 않았던, 진심어린 반성이 드디어 나왔다.

모든 걸 덮어둔 채 의사소통의 문제로만 치부했던 지난날의 항변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만약 언론이, 여론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합격 기준이 애매한 걸. 좀 물어봐야겠는데.’

난 질문내용을 적어둔 메모장에 ‘합격기준’을 추가로 넣었다.

“또 부적절한 표현의 사과문까지 내보냄으로써 입사지원자 분들을 두 번 상처를 줬습니다. 제가 직접 당사자 분들을 뵙고 거듭 사과 드렸으며, 그 분들의 말씀을 수용해 향후 저희 유메프에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채용 과정 절차를 전면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의 조언을 받아 앞으로 건강한 사내문화를 만들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상재 대표의 발표가 마무리 됐다.

단상 기준으로 우측에 서있던 이일형 홍보팀장이 따로 마이크를 들고 진행에 나섰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질의응답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질문하실 기자님들께선 손을 들어주시면 저희가 마이크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본게임에 들어간다.

어차피 준비된 쇼는 그리 중요치 않다.

기자들의 송곳 같은 질문들이 은상재 대표와 유메프의 진심을 확인할 거다.

‘물론 나도 거기에 동참할 거고.’

난 미리 적어둔 메모장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했다.

“네, 거기 둘째 줄에 앉으신 가운데 기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성함을 다 못외워서. 다음에 뵐 땐 꼭 다 외워 오겠습니다.”

이일형 팀장이 손을 든 기자를 지목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네, 녹두일보 최경태 기자입니다.”

“어?”

그곳엔 정말로 마이크를 든 경태 선배가 서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못 보다니, 나도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채용갑질 사건에 대해 허진 전 대표와 교류가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 듣고 싶습니다.”

경태 선배는 짧고 명확한 질문을 던졌다.

창업자인 허진 전 대표는 과연 이 사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대응하라 지시했는가.

이에 대해 듣고 싶다는 말이었다.

‘명목상 물러난 전 대표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니까.’

지난 번 티마 인수 때만 봐도, 은상재 대표는 허진의 지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채용갑질 논란도 물론 함께 얘길 나눴겠지.

“어······이 사안이 발생한 뒤, 허진 전 대표께서는 중요한 일임을 파악하고 참가자 분들의 마음을 잘 챙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허 전 대표도 함께 책임을 통감하며 이 일을 계기로 유메프가 더 발전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난 고갤 돌려 영기가 제대로 녹취를 하고 있는지 힐끔 확인했다.

영기는 열심히 노트북 타자를 두드리며 두 사람의 말 속도를 쫓고 있었다.

경태 선배 뒤로 여러 기자들이 질문을 펼쳤지만, 딱히 귀에 꽂히는 내용은 없었다.

게다가 몇 기자들은 미리 상의라도 한 듯, 채용갑질 마녀사냥이 억울하지 않은지 옹호 성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마녀사냥? 억울해? 이미 사실을 다 밝혔는데 무슨 질문이 저 따위야.’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네, 뒤쪽에 계신 이디넷 김예인 기자님. 마이크 드리겠습니다.”

이일형 팀장이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난 그의 손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늦게 도착했는지, 예인은 잘 보이지 않는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네. 이디넷 김예인입니다.”

마이크를 잡아든 예인이 자리서 일어나 있었다.

“대표님께 두 가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우선 정정하신 참가자 전원 합격과 이 간담회 등의 조치가 유메프 매출하락과 회원 탈퇴현상을 급히 수습하기 위함이 아닌지요. 또······”

‘으악! 저 돌아이가 또!’

무례할 정도로 묵직한 돌 직구다.

그래, 매출하락과 회원탈퇴는 유메프가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악재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이 민감한 부분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찔러놓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내부 직원이 문책을 당하거나, 연봉삭감이나 인사조치 등의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아예 난도질을 한다.

‘하나론 모자랐냐······칼을 두 개나 꽂네.’

간담회장 내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히 예인이 던진 폭탄의 위력을 다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내 질문은 딱히 튀지도 않겠군.’

나 또한 나름 잘 벼린 질문을 준비해뒀지만, 예인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음······우선 저희의 대처가 매출과 탈퇴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상재 대표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간다.

“전 이 기자회견이 유메프 매출에 더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사과를 한 번에 끝내지 못하고 반복하는 건, 그만큼 저희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고객분들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전 이전의 사과문과 다른 진정성 있는 사과를 꼭 해야겠다고 판단해 이렇게 진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급한 불을 끄기 위함 때문만이 아님을 길게 설명한 거다.

글쎄, 유매프 측에선 매출하락은 시간이 지나봐야 파악할 수 있다 설명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온라인 시대에 페이지뷰, 구매수, 구매금액 등의 통계는 일분, 한 시간 마다 다 파악이 된다.

점잖은 대의명분을 내놨지만 역시 완전히 수긍할 만한 대답은 아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직원들 중, 우려하시는 불이익을 겪은 직원은 지금까지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대표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은 대표의 책임지겠다는 말, 꽤 멋진 대답이었다.

예인은 이 답변에 만족했는지, 더 질문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다음······”

이일형 팀장이 다시 질문할 기자를 물색하는 순간.

난 오른 팔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아······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님. 마이크 갖다드리세요.”

나와 눈이 마주친 이 팀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내 이름을 불렀다.

“주진형······?”

“어디어디?”

“와, 쟤가 주진형이야?”

“주 기자님이다!”

“재수 없는 놈······”

주위에서 온갖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 중에는 내게 궁금함을 가진 사람도, 적대감을 가진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적대감 가진 사람은 SGT기자실에서 한 소리 들었던 인원이려나.

‘알게 뭐람.’

난 질문 잘하고 기사만 잘 쓰면 그만인 것을.

김유동 대리가 웃으며 다가와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뜬금없이 내게도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댔다.

내가 질문하는 장면을 찍어서 뭐에 쓰려고.

강한 빛 때문에 잠시 인상을 썼다가, 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채용과정 중 논란이 됐던 합격 기준이 이전 합격 사례와 비교해 어느 정도 차이가 났는지 알고 싶습니다. 자세한 매출 기준이나 계약 건수를 좀 알고 싶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상 좌측으로 서있던 임원진 중 한명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난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까 은상재 대표님은 이 사건과 관련됐던 직원들에게 불이익이 없을 거라 하셨는데요. 그럼 임원인 박지윤 홍보실장도 이 사태의 책임과 무관하게 직책을 유지합니까?”

“와······저 미친놈.”

경태 선배의 넋 나간 목소리만이 얼어붙은 간담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