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진짜 미친 탈곡기 맞구나
“저거 용감한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유메프랑 한 판 하자는 건가?”
“와, 존경한다. 진짜 리스펙이다.”
“쟤가 총대 멨으니 우린 그냥 주워 먹기 하면 되네.”
주위의 웅성거림엔 내 행동에 기겁한 기자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꺼내선 안 될 이름을 꺼내버렸으니까.’
불문율이란 게 있다.
암묵적으로 지키는 약속.
그곳의 분위기나 규율에 따라 금기시 되는 것들.
예를 들자면, 이 유메프 기자간담회장에서 빠진 ‘박지윤 홍보실장’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 것.
‘아마 예인도 그래서 돌려 물어 봤던 게 아닐까.’
사실 난 예인이 했던 두 번째 질문,
-내부직원이 문책을 당하거나, 연봉삭감이나 인사조치 등의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이건 분명 박지윤 실장을 겨냥했던 거라고 추측한다.
은상재 유메프 대표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놨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직원’한정이다.
난 더 확실하게 물어봐야 했다.
불문율을 깨서라도 말이다.
‘박지윤 실장은 초기 언론대응에도 실패했고, 이후 은상재 대표의 보도 자료에도 분명 관여했을 거야. 그런 상황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실질적인 반성이라 할 수도 없지.’
내 생각은 이랬다.
이 사건의 발단은 홍보실장과 상관없는 부서였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전개를 만든 건 분명 박 실장이다.
단 한 번의 보도 자료, 사과만으로 끝났을 일을 기자회견까지 하도록 키운 거다.
“빠른 대답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마이크를 입에서 뗐다.
은상재 대표는 척 봐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은 대표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그 틈에 다시 한 임원이 끼어들었다.
“첫 번째 질문은 제가 답변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유메프 상품기획실을 책임지고 있는 이세훈 실장입니다.”
문제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었군.
‘은 대표에게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건가.’
난 이세훈 실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저희 유메프는 상시적으로, 그리고 비상시 적으로 채용을 열어왔습니다. 그 때마다 참가자 분들의 가능성을 공통적으로 확인했습니다만, 다른 기준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과거 산출자료가 없어 구체적 답변은 어렵고. 단순히 채용기준이 계약한 상품의 개수만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 매력과 종류까지도 평가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답변이 아니다.
난 이전 채용기준과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구체적인 항목과 수치를 듣고 싶었던 거다.
이런 식의 에둘러 말하는 표현은, 사실상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럼 인성을 평가한다는 부분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당장 산출자료가 없다 해도 내뱉어 놓은 말이 있다.
인성이라는 항목이 면접에 들어갈 수야 있다.
하지만 과연 실무평가를 하면서 어떻게 이를 측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박지윤 실장이 ‘참가자들이 인성적으로 부족했다’는 어조의 말.
어떻게 해명할건가.
‘박지윤 실장의 업보.’
내 질문에 이세훈 실장이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하는 모양새다.
“그 부분과 두 번째 질문은, 다시 제가 답변 드리겠습니다.”
은상재 대표가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흠······그 말은 저희 측 소통이 실수입니다. ······면접을 볼 때 사람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을 인성으로 뭉뚱그려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참가자 분들께 두 번 상처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박지윤 홍보실장은······”
은 대표는 말을 길게 끌며 즉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기자들은 그의 입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기대하며 집중했다.
“일단 자숙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사태를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언론에 대응했던 점은 큰 잘못입니다. 하지만 박 실장에게 잘못된 정보가 전달 돼 있었고, 이걸 모두 찾아내 처벌한다면 사내 사기저하가 심화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잘못한 사실을 가릴 순 없으므로 한동안 홍보실장 업무에서 손을 떼고······사내문화 개선책을 강구할 예정입니다.”
어쩐지, 잠시 머뭇거린 뒤에 붙인 내용은 지금 막 생각해낸 게 아닌가 싶다.
홍보실장에게 사내문화 개선책을 만들라 시키겠다니.
재밌는 이야기다.
‘어쩔까. 여기서 하나하나 딴지를 걸어볼까. 아니면······’
난 마이크를 다시 쥐고 말할 듯 자세를 취했다.
좌측에서 간절한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고갤 살짝 돌리니, 이일형 홍보팀장이 애처롭게 날 보고 있었다.
-기자님, 제발 거기까지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이런 의미의 눈빛이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비록 원하던 답을 완벽히 듣진 못했으나, 난 멈추기로 했다.
여기서 더 꼬치꼬치 캐묻는다 해서 명확한 정보를 알려주진 않겠지.
애초에 민감한 주제를 질문한 만큼 어쩔 수 없다.
“네, 답변 감사합니다.”
난 이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마이크는 다시 김유동 대리가 받아 돌아갔다.
그 후로 몇 기자들이 지원들의 부서배치와 근황 등에 대해 질문했다.
영기는 내 기대보다 더 정확하게 받아 적기를 해냈다.
‘이제 행사는 혼자 다녀도 되겠네.’
흐뭇한 얼굴로 옆에서 영기를 바라봤다.
“질문이 많아 예상했던 시간보다 20분가량 지체 됐는데요. 이제 그만하고 식사 겸 기사작성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와주시고, 또 관심 가져주신 기자 여러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이 다 빠진 음성으로 이일형 팀장이 질의응답 시간을 마무리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점심식사 예정시간이었던 12시 정각을 한참 넘긴 뒤였다.
그만큼 기자들의 질문이 넘쳐났고, 은상재 대표나 임원진으로써는 가시방석 같은 시간이 이어졌던 거다.
곧 은상재 대표가 안내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장을 빠져갔다.
“어이, 주진형이-”
나와 영기는 다음 일정을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사이.
최경태 선배가 다가와 내 목을 졸라맸다.
“이거 완전 대형 돌아이네! 햐 너 깡다구 좀 있다?”
“억억, 선배-”
난 목을 감싸고 있는 선배의 팔을 끌어당기면서 소리쳤다.
“특종 내는 거 봐서 엔간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미친 탈곡기 맞구나. 이야!”
소란스러움에 다른 기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너지? 그 참가자 애들 연락처 다른데다가 뿌린 거. 정효한테 얘기 들었다. 대표가 막았다며? 기사?”
아, 김정효 팀장이 벌써 얘기를 했단 말인가.
난 곤란하다는 듯 목소릴 냈다.
“서, 선배. 그 얘긴 여기서 하심 안 될 것 같은데······”
보는 사람들도 있고 유메프 관계자들도 있는데, 굳이 꺼내봐야 분위기만 싸해진다.
벌써 몇몇 기자들이 이 얘길 듣고 타자를 빠르게 쳐댄다.
오늘 정보보고에 올릴 작정인가 보다.
“지는 별 결 다 물어봐놓고 큭큭.”
재밌다는 듯 경태 선배가 웃었다.
“오늘 질문, 멋졌어.”
어느새 옆에 온 건지, 예인도 서 있었다.
“오, 너희 반말 하냐?”
“네, 그렇게 됐어요.”
“그래 돌아이 커······아, 아니다.”
뭔가 발음하려던 것 같은데.
예인의 차디찬 시선에 경태 선배가 한 발짝 물러났다.
“오우! 주느님! 어! 김예인 기자!”
그리고, 시끄러운 상성훈 선배까지 나타났다.
‘완전 난장판이구만.’
경태 선배에 예인, 상 선배까지.
정신없는 사람들의 공세에 휘말렸다 생각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주진형 기자되시죠? 전 SBC 정재욱 기자입니다.”
“기자님, 코리아투데이 박정모 기자입니다!”
“메일이코 윤성호 기자입니다!”
“아시아이코노믹 이혁진입니다.”
열 명 넘는 기자들이 내게 인사를 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언뜻 들어본 이름도 있었고, 처음 보는 기자들도 수두룩했다.
“서로 연락처를 좀 교환하고 싶은 데요!”
“혹시 면접참가자 분들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저, 참가자들이 주 기자를 언급했던데. 혹시 서로 상의됐던 내용입니까?”
별의 별 요구들이 다 쏟아졌다.
옆에서 날 지켜보던 영기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당황했다.
난 내게 몰려든 기자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내 반응을 보기 위해 그들이 입을 다물었을 때,
“선배 기자 분들께 제 연락처는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 제 명함 두고 갈게요. 하지만 취재원 연락처는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제 이름이 뜬 건, 제 의도도 아니고 언질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럼, 선배들 식사 맛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영기씨, 가자!”
“어? 네? 넵!”
우린 인파를 뚫고 세미나실 밖으로 나왔다.
“기, 기자님 식사 안하세요? 어?”
도시락을 바구니 째 들고 오던 김 봄 대리가 우릴 발견하곤 물었다.
그러다가 내 뒤를 쫓아오는 다른 기자들을 보곤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점심 약속 있어서요! 나중에 봐요 대리님!”
나와 영기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니 기자들끼리 취재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저 사람들은!’
난감했지만 별 수 있나.
그대로 붙잡혀있느니 내가 도망치는 게 낫다.
“후우.”
유메프 건물을 나온 우리는, 지하철 입구를 내려간 뒤에야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헉헉, 선배.”
“후, 어?”
“꼭 이렇게 뛰어야 하나요?”
“그러게. 안 뛰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 휴우. 그래도 따돌렸잖아. 거기 시간 뺏기면 약속 시간 늦는다.”
“허억, 네. 그렇죠.”
‘그래. 이제 이 건은 끝난 일이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바로 다음 일을 하러 가야지.’
어쨌든 유메프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그간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남은 건 아직 종결되지 않은 사건.
‘티마 인수 건을 다시 만나볼 차례지.’
우린 10분 정도 걸어서 삼성동에 위치한 한 한식 식당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계산대에 서있던 안내직원이 우리에게 물었다.
“네. 송강욱으로 돼있을 거예요.”
티마 송강욱 홍보실장.
오늘 우리 두 사람이 만날 상대다.
지난 주 그가 먼저 전활 걸었고, 이후 오늘의 일정을 잡은 거다.
“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을 따라 움직였다.
식당의 좌측 복도 안쪽 깊숙이 들어간 후.
직원이 나눠진 별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아, 주진형 기자님?”
방 안 쪽에는 이미 간단한 찬이 차려져 있었고,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한명은 처음 보는 인물로,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돼 보였다.
‘저 사람이 송강욱 실장인가.’
내가 짐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신성현 대표님?”
신성현 티마 대표.
일주일 전, 내게 인상 쓰며 사라진 그가 있었다.
“아 들어오시죠. 옆에는 박영기 기자님이시죠?”
“아, 네!”
나와 영기는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석이 놓인 자리에 각각 앉자, 송강욱 실장이 말을 이었다.
“두 분 다 늦었지만 이렇게 뵙게 돼 영광입니다. 전 티마 송강욱 홍보실장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송 실장이 내민 손에 나와 영기는 차례대로 악수했다.
우린 실장과 명함을 나눴고, 신 대표는 침묵을 유지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티마 신성현 대표님입니다.”
“네? 에에에에?”
미처 몰랐던 영기가 볼썽사나운 소릴 내고 말았다.
아마 영기 눈에는 자신 또래로 보이는 신 대표가, 그저 홍보실 대리급 직원처럼 보였을 테니까.
뭐 녀석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난 창피함을 무릅쓰고 명함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명함 못 드렸었죠.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이 자리에 신 대표가 나왔다는 건, 나와의 관계를 나쁘게만 가져가진 않겠다는 의미다.
“다시 뵙는군요. 그때는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네?”
내가 당황해버렸다.
신 대표의 입에서 너무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 때 일을 사과한다고? 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