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예열이 길었던 만큼, 거칠고 빠르게
장 킴은 흰 치아를 드러내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도 바로 손을 뻗었다.
전혀 사실이 아닌 말을 들었지만, 당장은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첫 만남부터 분위기를 깰 필욘 없는 법이다.
“반갑습니다. 디지털투모로우 주진형 기자라고 합니다.”
대신, 내 신분을 밝힌다.
난 이 자리에 남자 주진형이 아니라, 기자 주진형으로 온 거다.
그 점을 명확히 해야 했다.
“아아, 얘기 들었어. 그래 내 딸하고 같은 기자 일 하다 만났다고.”
근데 어째 소용이 없다.
‘······이건 뭐지. 맞는 말이긴 한데 뉘앙스가······’
장 킴이 자기 좋을 대로 내 말을 해석하는 기분이다.
난 급히 예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달란 눈초릴 보냈다.
예인은 내 눈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가요.”
“어어, 그래야지. 자 나가자. 내가 아주 기막힌 곳으로 데려가줄게.”
장 킴은 들뜬 모습으로 홀로 호텔 정문을 향했다.
그 사이, 난 예인에게 붙어 해명을 요구했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말했잖아. 널 소개하려면 구실이 필요했다고.”
“무슨?”
그러니까 그 구실이 도대체 왜 필요 한 건데?
내 물음을 이해한 건지 예인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는 철두철미한 사업가야. 나한테도 절대 정보 같은 건 흘리지 않아.”
글쎄, 인상만 봐서는 그냥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데.
난 의심의 눈초리로 예인을 봤다.
“······그래서, 취재를 위해 만나잔 소린 못했다. 그 얘기지?”
“그런 얘길 꺼내면 네가 아니라 나라도 못 만나.”
평소 예인이 무감정하게 툭 던지는 말투가 아니다.
묘하게 감정이 실린 해명이었다.
친딸이 이리 얘기하는 걸 보면, 공사구분이 강한 건 맞는 모양인데.
“그냥 소개해주고 싶은 남자가 있다고 했어. 직업은 기자고.”
이어진 예인의 설명을 들은 내가 기겁했다.
“야! 그거 완전 남친 소개 멘트거든!”
완전히 부모님께 연인을 소개시켜줄 때 수줍게 꺼내는 대사가 아닌가.
그걸 왜 해서 이렇게 오해를 사게 만드는 거냐.
“남친이라고 한 적 없어.”
그거야 당연하시겠지.
“아니, 부모님이 듣기엔 그렇지!”
어이없지만 착실히 설명은 해준다.
하지만 예인도 딱히 무지로 한 행동은 아닌 모양이다.
“상관없지 않아? 잘못 이해한 사람 문제지.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으면 넌 아빠랑 악수조차 못했을 걸.”
그러니까 알고도 저질렀단 뜻이다.
뭐- 예인의 입장에선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장 킴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예인은 그걸 들어주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뿐.
만약 예인이 솔직하게 취재를 요청한 기자가 있다고 설명했다면.
정말 내가 여기 올 수 없었을까?
‘장 킴 대표와 부딪혀보면 알게 되겠지.’
난 이쯤에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어. 일단 만나긴 했으니까. 넘어가자 그럼.”
“얼른 가. 아빠 기다린다.”
어느새 장 킴 대표는 호텔 입구에 서서 멀찍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예인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나만 빼놓고 아주 알콩달콩이네. 이거 딸 가진 부모의 심정을 너무 몰라주는구만.”
“아아, 죄송합니다. 잠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내가 사과했다.
다른 일정이었다면 한 회사의 대표를 기다리게 한다는 건 굉장한 실례였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아직 차가 안 왔어.”
장 킴이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잠시 후, 대리주차 요원이 연식이 꽤 돼 보이는 국산차를 하나 끌고 나타났다.
“타. 여기서 좀 가야돼 거기까지.”
“아, 네.”
난 일부러 조수석에, 예인은 뒷자리에 탑승했다.
차에 타고 보니 외관 그 이상으로 오래된 차였다.
‘이 정도면 새 차를 사도 한참 전에 샀어야 하는데.’
때가 낀 안전벨트를 힘들게 착용하며 내가 생각했다.
난 기사를 통해 유니콘벤처스의 몸집을 미리 파악하고 왔다.
당장 운용 가능한 투자금 규모만 3,000억 원이 넘는 투자사.
장 킴은 그런 회사의 대표다.
그런데 이런 구형차를 몰고 다니다니.
참 신선한 경험이다.
“차가 꽤 오래됐네요.”
난 최대한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좀 됐지. 예인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샀으니까.”
‘아니 그럼 좀 된 게 아니잖아. 20년 넘겼는데!’
놀랐지만, 차마 속마음 그대로 내뱉을 순 없었다.
다행히 차는 털털거리면서도 문제없이 주행을 시작했다.
“아, 중간에 차축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어도 엔진은 아직 멀쩡해.”
장 킴은 구형 차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호쾌한 웃음소리로 운전했다.
차를 탄지 5분 만에 우린 송파구 남서쪽에 위치한 한 음식점 앞에 도착했다.
‘······콩나물 국밥집?’
콩나물 국밥을 싫어한다거나 멸시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연속해서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지니, 나로썬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뭐해? 어서 들어와. 여기 맛이 아주 미국에서도 기억난다니까?”
“아 네, 들어갑니다.”
장 킴이 식당 입구에서 손짓하며 재촉했다.
난 대답 하며 예인과 함께 국밥집에 들어섰다.
“사장님 여기 국밥 세 개요.”
장 킴은 익숙한 모습으로 주문을 하곤 가운데 식탁자리에 앉았다.
“참, 소주도 두병 주시고.”
“예에~”
직원이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왔다.
“자네 술은 좀 하나?”
장 킴이 내게 물었다.
난 고갤 저으며 약하다는 티를 냈다.
“아뇨. 잘 마시지 못합니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한다고 얘기했을 터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예인은 자신의 주량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라했다.
그럼 장 킴 또한 굉장한 주당일 터.
그 앞에서 자만심을 표출하는 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거나 다름없다.
“뭐 두병은 마시겠지? 그래도?”
“아······예, 뭐.”
계속된 추궁에 하는 수 없이 대답한다.
장 킴은 신이 난 듯, 바로 소주병 뚜껑을 따고 내게 술을 권했다.
“자 받아.”
나도 급히 소주잔을 잡고 기울였다.
잔에 술이 쪼르륵 채워진다.
장 킴은 예인에게도 술을 따라주곤, 내게 소주병을 내밀었다.
한 잔 따라 달라는 의미다.
“아, 네.”
난 빠르게 술병을 받아 장 킴에게 술을 따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건 내가 상상했던 미팅 분위기가 아니다.
기자는 본래 어떤 인터뷰이와도 동등한 위치를 갖는 존재다.
기업 대표든 재벌 회장이든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랄까.
직장상사?
아니 친구 아버님과 술을 마시듯 위축되는 느낌이다.
“일단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고.”
어차피 술 마실 거면서 뭘 마시고 시작해.
내키진 않지만, 난 잔을 훌쩍 비웠다.
“잘 마시네 뭐. 어, 국밥 나왔다.”
직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 그릇을 들고 왔다.
그릇 안에 국밥이 맛있게 끓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 예인이 너도.”
장 킴이 털털한 웃음과 함께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예인도 국밥집이 익숙해 보였다.
난 취재 생각에 타는 속마음을 진정시키고, 우선 숟가락을 들었다.
‘이거 언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지.’
한술 떠서 먹어보니 장 킴 대표의 말대로, 국밥은 시원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그 맛을 음미하기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뭔 생각이 그리 많아. 팍팍 먹으라고.”
남의 속도 모르고 장 킴 대표는 허허 웃고 있었다.
“아, 예.”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식사자리인 데다가, 우리는 첫 만남이다.
대화는 분명 길어질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대화 중간에 틈은 생긴다.
난 그걸 노리기로 했다.
“그래. 자네도 기자라고 했지? 자식이 기자이다 보니, 고생하는 거 잘 알지. 주말도 없이 일하고 잠자는 시간 쪼개서 기사 쓰고. 일은 어때, 할 만한가?”
내 예견대로 장 킴 대표가 입을 열었다.
헌데 꺼낸 주제가 영······ 아저씨 같다.
아니, 아저씨가 맞으니까 당연한 건가.
“예, 뭐. 적응 했습니다.”
“보니까 1년차 던데, 기사도 잘 쓰고 말이야. 예인이가 좋아할 만 해?”
내 칭찬을 하는 장 킴을 본다.
뒤에 덧붙인 말도 거슬리긴 하지만, 중요한 건 앞부분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
예인이 장 킴에게 날 미리 설명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원체 그가 구구절절 늘어놓는 성격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까 얘기했던 걸로 추측하자면, 예인은 단순히 내 이름과 직업 정도만 털어놓은 듯하다.
‘미리 검색해서 기사까지 읽어본 건가. 1년 차 기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허허 긴장할 것 없어. 언론사 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은 거니까.”
의심 섞인 내 눈빛을 놓치지 않고 읽어낸 모양이다.
장 킴 대표가 알아서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예인인 어디가 그렇게 좋았나?”
“푸흡, 컥컥, 죄, 죄송합니다.”
전혀 기대도 안한 질문에 놀라, 사레들린 내가 기침했다.
밥알이 몇 개 튀어나가긴 했지만, 다행히 내 주변에 떨어졌다.
“어? 아닌가? 그럼 예인이가 좋아했나?”
넌지시 장킴이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예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밥만 먹을 뿐이다.
“허허. 젊은 녀석들이 자존심 싸움인가. 알았다 알았어. 다른 얘기나 하지.”
아주 다행이다.
“자네는 요즘 꽤 잘나가는 모양이던데. 내가 아는 친구가 자넬 눈독들이고 있더라고.”
“네?”
난 다시 고갤 들어 장 킴을 본다.
예인도 이 얘기에 관심이 동했는지, 숟가락질을 멈추고 자신의 아버지를 살핀다.
“몰랐나? 마이뉴스24 박호창 대표가 내 지인이네. 그쪽에서 아직 연락 안했나 보군.”
그리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일전에 이윤철 대표가 박호창 대표로부터 내 칭찬을 들었다고 했었으니까.
다만 이렇게 직접적인 정보.
즉, 마이뉴스24가 날 원한단 얘길 들을 줄은 몰랐다.
“네······ 연락은 없었습니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 당장 오지 않더라도 실망할 필요 없어. 언론사들이 자넬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습니까.”
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군. 아니면 워낙 자신감이 강한 친구거나.”
“내색만 안할 뿐입니다.”
자신감이 강하다는 장 킴의 평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기쁜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표님이야 말로, 기자들의 레이더망에 늘 주시되는 분 아닙니까.”
이제 내 차례다.
장 킴 대표 덕분에 드디어 업계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됐다.
“허허, 그런가. 기자들이 날 좀 좋아하긴 하지?”
빼지 않는 군.
역시 예인의 아버지다.
뭐 언뜻 보면 융통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돌직구 예인보단, 더 세련된 어투지만.
“대표님께서 한국 벤처 투자를 주도하고 계시죠.”
“어허, 정확하게 얘기해주게. 내가 유니콘벤처스의 한국 투자를 움직이는 건 맞지. 한국 벤처 투자시장을 주도하는 건 아니고.”
노련함이 느껴지는 대처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에 대해서 확실한 파악, 그리고 차단.
이런 일엔 경험이 많단 증거다.
“후후. 전 어느 쪽이든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벤처 투자사 중 가장 큰 규모의 투자 금을 운용 중이니까요.”
유니콘벤처스가 국내 벤처 기업과 스타트업에 투자한 금액은 800억 원 규모.
투자받은 업체들 또한 미래가 기대되는 유명한 곳들이다.
그 중에 포함된 게 바로 배달의겨레.
뿐만 아니라 부동산 앱 서비스, 콜택시 앱 서비스, 영상/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핀테크 등.
정말 다양한 분야의 업체들을 돕고 있다.
“역시 기자는 기자로군. 많이 공부한 티도 내고? 그래 맞아. 우린 국내 스타트업 18곳에 투자했지. 한국 스타트업은 매력적이야. 모바일 시대에 빠르게 대처해 나가고 있고, 대기업들을 이길 가능성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어. 투자 할 만하지.”
“하지만 지금껏 엑싯에 성공한 사례는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만.”
엑싯(Exit).
말 그대로 투자를 종결하고 빠져나오는 걸 뜻한다.
엑싯에 성공했다는 건, 투자한 업체가 성공했다는 소리와 같다.
주로 엑싯이 이뤄지는 건, 업체가 인수 합병되거나 기업공개(IPO), 상장했을 때.
그래야 투자사는 투자 지분을 매각해 투자금과 이익금을 챙길 수 있다.
“맞아. 그것도 거의 10년 전 얘기지. 하지만 단기이익만 봤다면 벤처투자를 왜 하겠나? 우린 단타를 치는 트레이더가 아니야.”
문득 장도현 과장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그는 법인영업부에 속해 있기에, 주식을 직접 매매하는 트레이더완 다르다.
“그 말씀은?”
“한 스타트업이 성장해 IPO가 이뤄지기 까지 평균적으로 12년이 걸리지. 그동안 우린 그 스타트업들의 꿈을 키워주고 사회의 분위기와 구조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거야. 도전을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기존 대기업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기업이 탄생하는 거. 그 과정을 돕는 게 내 역할이지.”
현재 대다수 스타트업들이 꿈꾸는 성공은, 대기업에게 인수되는 거다.
이 때문에 난 장 킴이 제시한 비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었다.
허나, 존경심이 들만큼 순수하면서도 훌륭한 말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전제하에.
“멋진 이야깁니다. 그럼 지금껏 투자하신 스타트업들이 모두 그만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슬슬 시동을 건다.
난 지금껏 예열이 길었던 만큼, 거칠고 빠르게 달릴 생각이었다.
“물론.”
“궁금하군요. 과연 이번엔 어떤 예비대기업이 대표님의 선택을 받을지 말입니다.”
난 당신이 왜 한국에 들어왔는지 알고 있다.
그건 바로 한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서지.
스타트업 이름이 배달의겨레란 것도 물론.
“······”
내 말에 장 킴 대표는 잠시 생각하듯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다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조용히 웃는다.
“후우- 이거, 조금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역시 내가 예인이한테 속은 거겠지?”
“네?”
난 반문한다.
전혀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온 탓이다.
“주진형 기자, 너 예인이 남친 아니지.”
드디어 기다려 마지않았던 때가 왔다.
“네 전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