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어디에 투자하러 오신건지 대충 알고 있거든요
“허허. 이거 딸한테 한 방 먹었구만, 그래.”
상황은 난감했지만, 장 킴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속인 예인을 향한 눈매는 웃고 있었다.
‘뭐야. 대견스럽다는 얼굴인가?’
나도 예인을 향해 고갤 돌렸다.
예인은 막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 상태였다.
‘우리 말하는 사이에 한 마디도 않더니. 어느새…… 참 대단하다.’
예인이 입가심 하듯, 앞에 있던 소주잔을 입속에 탁 털어 넣는다.
단번에 소주잔이 비었다.
“나 먼저 일어나요.”
말 그대로, 예인이 일어섰다.
“김예인. 혼나기 전에 도망가겠다 이거야?”
장 킴이 가소롭다는 듯 물었다.
“다른 일정이 있어요. 어차피 두 사람 만나게 하는 것까지가 내 일이었고.”
난 예인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짧고 강하게 한 번 깜빡.
자기 몫은 끝났다는 표시를 내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 조력은 원치 않았으니까.
“그럼 난 가요.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정말 예인은 가방을 챙겨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 행동엔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장 킴은 어이가 없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한탄했다.
“허어, 오랜만에 딸내미랑 천천히 밥이나 먹으려고 일정도 미뤘더니.”
그리곤 날 본다.
“이거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랑 단 둘이 밥 먹게 생겼네?”
예인의 남자친구에서 상관없는 사람으로 정정된 것은 참 기쁘다.
하지만 어째 그렇다고 일이 더 잘 풀릴 분위기는 아니다.
“이렇게 접근하게 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난 장 킴 대표에게 살짝 고갤 숙였다.
“뭐 사과할 건 없어. 어쨌든 정말 예인과 기자일 하다 만난 사이인 건 확실하니까. 친구 정도는 괜찮겠지?”
“네?”
잘 이해하지 못한 내가 반문했다.
“자넬, 예인이 친구라고 생각하겠다고. 뭐 서로 반말하고 지내는 걸 보니 가까운 관계인 건 확실하고. 나도 딱히 느낌이 나쁘진 않으니까.”
‘아아, 그런 뜻인가.’
듣다보니, 내 인상이 장 킴 대표에게 긍정적으로 박혔단 걸 알 수 있었다.
날 예인의 친구로 생각하겠다는 건.
적어도 이 자리를 바로 파투내지 않겠단 표시였다.
“그래서. 자네 정말 예인한테 관심 없나?”
“예?”
장 킴 대표가 예인의 남자친구 설정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린 듯하다.
난 황당했지만 괜히 호들갑을 떨거나 정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딸을 둔 아버지 앞인데, 상처를 드리면 안 되겠지.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저렇게 예쁜데?”
부모가 고슴도치처럼 자기 자식을 감싸는 거야,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예인의 외모가 연예인 뺨치는 것도 인정할 일이고.
다만, 예인에게는 그 잘난 외모를 가려버리는 아주 특출 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따님의 외모가 출중한 것만큼, 성격도 너무 독특합니다.”
솔직함도 언어를 순화시켜 최대한 부드럽게 포장해본다.
하지만 눈치가 있다면 내가 에둘러 말했음을 잘 알겠지.
역시나 장 킴 대표가 내 말을 듣곤 껄껄 웃기 시작했다.
“헛헛헛! 그렇지. 내가 봐도 예인이 쟤는 독특한 수준은 넘었어. 지-랄 맞지.”
저기 아버님,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 안하셔도 됩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이렇게 대답할 뻔했다.
저 표현은 공감은 가지만, 쉽게 동의해선 안 될 것 같다.
내가 침묵하자, 장 킴도 웃음을 멈췄다.
“뭐, 애가 저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지.”
갑자기 자조적인 분위기로 대화가 흘러간다.
아니, 아니 아저씨 갑자기 그렇게 침울해질 것 가진 없잖소.
이건 내가 바라던 취재의 그림이 아닌다.
“내가 일에 미쳐있었거든. 일에 빠져서 가족을 못 봤어. 워커홀릭이었지. 예인이가 어릴 때부터 난 미국생활을 했는데, 창업 후에 정신없이 미국과 한국을 오갔고. 상대적으로 애한테 신경을 못 썼어. 뭐, 지금도 마찬가지네.”
“……그러셨군요.”
나로썬 반응하기 어려운 가정사가 흘러나온다.
사실 마음 한편엔 그래도 당신들은 가난하게 살진 않았잖아, 라는 말이 맴돈다.
한창 학교를 다닐 땐, 부모의 부족한 재력을 속으로 원망해보기도 했던 나다.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번듯한 사업을 해온 이 집안은, 알지 못할 감정이겠지.
헌데 그런 날 타박하듯, 장 킴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예인이가 아직 초등학생 때였을 거야. 애 엄마가, 암 투병하다 죽었어. 난 미국에서 늦게 귀국했고. 혼자 남겨졌던 애가 꽤 상처를 받았나봐. 하아. 뭐 그전에도 그랬지만, 이후로 많이 냉담해졌지. 뭐 내가 예인일 두고 미국으로 돌아간 탓도 있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예인의 어머니가 암 투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건.
‘하긴, 우리가 그런걸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건 아니지……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일전에 예인의 집에서 신세를 졌을 때.
가족사진을 보고 물어본 적이 있다.
예인은 내게 부모님이 미국에 계신다고 했을 뿐.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얘긴 꺼내지 않았다.
‘평소 성격만 본다면,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말했을 것 같은데.’
내가 예인에 대해 오해를 한건가.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역린이라는 걸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까 보니 대화는 문제없이 하시는 것 같던데.”
방금 전 식당을 나서며 말하던 예인을 떠올렸다.
내가 봤을 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예인이다.
“글쎄. 보다시피? 전화나 문자는 그나마 자주 했으니까. 어색하진 않아. 하지만 봐봐. 일부러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있잖나. 혹시나 일적으로 실수할까봐 싶은 것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아보여도 실은 예인일 대하기가 어려워. 떨어져서 산지 너무 오래됐으니까. 그래서 자네와 함께 만나자 했을 땐,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었지. 하하.”
장 킴이 술을 마시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광진구 집을 놔두고 호텔에서 묵고 있던 이유가 이거로군.’
딸이 기자기 때문에, 일적으로 보안유지를 위해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부녀 관계로 대하기도 어렵다라.
당연하게도 이 상태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될 계기는 없어 보인다.
“근데 왜 예인일 한국에 두고, 혼자 미국으로 가신 겁니까?”
주제넘지만, 묻기로 했다.
내 기준으론 어머니 잃은 아이를 혼자 내버려뒀다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맞어. 이후에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본인이 극구 거부해서 말이야. 그냥 애 이모한테 부탁해서 한국생활하게 해뒀지. 가정부도 붙여주고. 그렇게 자라서 그런가? 내가 봐도 좀 차가워. 남들이 보기엔 좀 이상하기도 할 거야. 애가 워낙 제재 없이 커서 거침이 없으니까.”
예인의 무감정한 모습들.
그건 단순히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탓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홀로서기를 해왔던 만큼.
타인과의 교감에 큰 가치를 두지 않게 된 걸 수도 있다.
‘뭐, 내가 아동심리학자도 아니고. 다 알 수야 없겠지만.’
어쩐지 어린 예인을 상상해보니 참 쓸쓸하다.
“예인이에 대해선 이정도로 하자고. 내가 이런 얘기했다는 건, 비밀이네. 알지?”
장 킴 대표가 찡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만……”
지금 같은 태도로는 예인과의 장 킴 대표의 부녀관계 회복은 어려워 보인다.
‘아니다. 내가 지금 남의 가정사에 오지랖을 펼칠 여유가 없지. 이 자리에 온건 오로지 취재 때문인데.’
잠시 생각하던 난 판단을 내렸다.
당장 닥친 업무가 우선이다.
“대표님. 아직 제 물음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응? 그랬나?”
“네. 어떤 예비대기업에 투자하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내가 이렇게 예인의 남자친구가 아님을 들키게 된 원인.
저 질문을 다시 꺼낼 시간이다.
“핫하하!”
장 킴 대표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단해 아주. 한 번 물면 문 자리를 그대로 기억하는 구나.”
“이빨 자국이 남으니까요.”
장 킴의 비유에 나도 농담조로 말했다.
“내게 접근했던 원 이유가, 그거겠지? 어디에 투자할지 알아내려고.”
솔직하게 물어오니 나도 속 시원하게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좋아. 왜 내가 투자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지는 물어보지 않겠어. 그렇지만 투자하러 왔다한들, 내가 그걸 왜 자네에게 말해줘야 되나?”
투자를 하러 입국한 게 사실이든 아니든, 말할 의무가 없다는 거다.
예상은 했지만, 참 직설적이다.
‘그러니까 예인이 저런 성격인건. 제재 없이 큰 탓이 아니라 장 킴 대표, 당신 유전자 때문인 것 같은데.’
난 피식 웃었다.
“뭐 준비해온 거라도 있나? 아까부터 꽤나 자신만만한데.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 신뢰받는 사업가거든. 여태껏 내 딸한테도 투자정보는 흘린 적 없어.”
벤처투자자라는 직업은 자기자본투자만 하는 게 아니다.
투자 펀드기금을 조성하고 여기에 출자할 투자자들도 물색해야 한다.
헌데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자내용을 왈가왈부한다면.
투자자들이 이를 심적으로 달가워 할 리가 없다.
그 탓인지 장 킴은 입을 열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대표님.”
난 장 킴 대표를 부르며 운을 뗐다.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다.
사실 킴 대표는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다.
미국에 본거지를 둔 회사기 때문에 주워들은 정보도 적고, 투자의 단서도 부족하다.
단박에 그로기 시킬 강한 무기가 없으니, 작은 칼부터 차근차근 써보기로 했다.
“우선 확인을 좀 하고 싶군요. 대표님이 아까 말씀하셨던 벤처투자에 대한 신념. 그게 정말 진심입니까?”
난 장 킴 대표가 설명했던 그의 벤처투자자 비전에 대해 물었다.
스타트업을 대기업으로 일궈내는 것.
그게 장 킴 대표의 이상이다.
“진심이지.”
“그렇다면 제게 알려주시는 게 맞습니다.”
뜬금없다 느껴질 수 있는 한 마디.
“왜? 그거랑 이거랑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데.”
물론.
장 킴 대표의 신념과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허나 내가 정보를 얻는 대신, 그 신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제가 투자 스타트업의 나팔수가 돼 드리겠습니다.”
“나팔수?”
언론 쪽에선 부정적인 어조로 쓰이는 표현이다.
특정 정치색이나 기업에 맞춰 기사를 쓰는 등.
중립적이지 않은 매체나 기자들을 욕할 때 붙이는 말, 나팔수.
다만 지금 내가 내뱉은 나팔수는 좀 더 본연의 의미에 가깝다.
“전 인터넷 취재 기자입니다. IT관련 스타트업도 취재범위 안에 있죠. 저라면 유니콘벤처스가 투자하는 스타트업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표님이 바라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스타트업들은 홍보력이 약하다.
좋은 기술이나 서비스를 갖고 있어도, 이목을 끌지 못하고 묻히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
난 그런 스타트업들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설명한 거다.
“하하하! 자네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하지만 나한텐 조악한 제안일 뿐이야. 겨우 그 정도는 다른 기자들에게 부탁하면 그만 아닌가? 아까도 말했을 텐데. 언론계 쪽에 친구가 꽤 있다고. 게다가 내 딸도 기잔데 왜 자네에게 그런 부탁을 하나.”
오다가 주운 칼이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이런 급조 제안으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군.
‘그래, 나도 상정했던 부분이다.’
이미 예인으로부터 들었던 성격 아닌가.
난 최대한 태연한 척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 킴 대표님. 대표님께 직접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어진 내 말에 장 킴은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나한테? 뭘?”
“벤처투자사들에게 필요한 건 뭘까요? 자금력? 인맥? 안목?”
“정보겠지.”
장 킴 대표의 대답에 내가 고갤 끄덕였다.
벤처투자는 돈이 많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투자 금이야 투자자들을 모아 벤처 펀드를 만들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능성 있는 기업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기업의 장단을 모두 파악하려면 정보가 필요한 거다.
“제가 아는 좋은 스타트업에 대한 정보를 드리도록 하죠. 잠재력 있고 유니크한……”
“필요 없는데?”
끄응.
난 바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두 번째 공격은 더 간단하게 격파 당한 거다.
‘아니 도대체 왜? 벤처투자자들 목매는 게 스타트업 정보 아닌가?’
양질의 정보가 있어야 스타트업 원석을 가려내고 투자를 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발로 뛰고 귀로 들은 정보들을 내놓겠다는 제안도 필요 없다니.
……그래, 감이 잡힌다.
장 킴 대표에겐 서로 이득을 얻어가는 제안 따윈 통하지 않는 거다.
‘칼질이 들어가지 않으니 작전 급선회다.’
난 빠르게 머릴 굴렸다.
준비해왔던 도박용 패가 하나 있다.
그걸 꺼내기로 했다.
“하는 수 없군요. 제가 졌습니다. 말 안 해주셔도 됩니다.”
“헛헛. 벌써 포기인가? 마이뉴스 대표가 탐내는 기자치고 오기가 별로 없구만!”
이제야 다시 웃는 낯을 보여주네.
난 그런 장 킴 대표의 얼굴을 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기사는 쓸 겁니다. 사실 전 대표님이 어디에 투자하러 오신건지 대충 알고 있거든요.”
“으, 응? 어딘데?”
떨떠름한 어투로 장 킴이 내게 묻는다.
그래, 그렇게 당신이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쿠퐁에 재투자를 추진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난 거짓말을 내뱉은 후,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