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특종-73화 (73/107)

73. 나랑 탈곡기 가동 한번 하자

‘응?’

뭐랄까, 기이한 악연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왕따 주동자를,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업무적으로 만나게 되다니.

‘그나저나 영기가 왕따를 당했었다니.’

이 얘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영기가 대인기피증에 걸릴 정도로 사람을 피한다고 보진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다 느꼈었다.

그게 왕따 경험 탓이었나.

“그놈이 절 알아보곤 막 웃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그리곤 자기 방송 참관하라면서 옆에 세웠는데······그 방송하는 내내 제가 왕따였단 얘길하면서······절······ 갖고 장난치더군요.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방송 채팅창엔 절 비웃는 글들이 막 올라오고. 예전처럼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고 말도 안나와서. 바보같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어요······ 끝나고 그놈이 저한테 웃으면서 욕을 막 했어요. 옛날처럼.”

“뭐라고?”

그다지 유쾌한 소린 아니었겠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등신 새끼 여전하다고······너 같은게 무슨 기자를 하냐고.”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담배라도 하나 꼬나물고 ‘등신 새끼, 여전하네?’라고 웃으며 말하는 거다.

그럼 완벽한 쓰레기 왕따주동자 아닌가.

“그런데 영기씨 당신은, 가만히 있었다고? 아무말 못하고?”

“네······”

나로썬 잘 납득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신을 왕따시키고 괴롭혔던 주동자.

그런 놈을 만났는데 왜 가만히 있다가 여기서 술을 먹고 있나.

법적인 문제는 미뤄두고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소심한 성격 때문에 왕따를 당한 건가.’

난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야? 그 BJ.”

“네?”

“이름 뭐냐고 그놈.”

내 닥달에 영기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안엔 미튜브 앱이 켜져있었다.

내가 자세히 들여다 보자, [윤태현의 뭐든한다]라는 영상채널이 눈에 들어왔다.

“윤태현? 이 놈이 그 놈이야?”

난 화면에 눈을 떼지 않고 영기에게 물었다.

“네.”

영상 목록을 살피다보니, 오늘자로 올라온 영상이 하나 있었다.

‘설마 이거, 오늘 영기가 갔을 때 찍은 건가.’

난 확인하기 위해 영상제목을 클릭했다.

그리고 곧 재생된 영상엔 정말 영기가 나오고 있었다.

스스로 고백했던 대로, 영기는 말 한 마디 없이 경직된 자세로 앉아있다.

반면 옆에 상당히 들뜬 얼굴의 남자도 있다.

이 녀석이 윤태현이겠지.

[안녕하세요! 윤태현입니다~]

예상대로, 윤태현이 먼저 인사를 한다.

[오늘은 진짜 특별게스트가 있어요? 예? 제 고등학교 때 아주 사랑했던 친구새끼가 기자가 돼서 절 취재한다네요? 그래서 방송 함 보라고 쳐앉혀 놨습니다!]

스피커에 나오는 윤태현의 목소릴 듣고 영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일단 어떻게 굴러간 상황인지 보기 위해 계속 영상을 시청했다.

[자, 자기 소개!]

[······]

영기는 쉽게 입을 떼지못했다.

그러자 윤태현이 짜증난다는 듯 영기의 뒤통수를 쳤다.

[아~ 이 새끼 여전하네. 말을 하라고 덜떨어진 새끼야]

그 뒤로 윤태현의 거친 욕설과 구타가 방송에 계속 이어졌다.

난 그걸 보면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영기가 말했던 것처럼, 채팅창에 윤태현을 욕하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재밌다고 웃거나, 영기의 어수룩함을 욕하는 내용만 가득.

‘뭔 방송이 이따위야?’

평소 일이 많아 미튜브 방송을 많이 볼 순 없었다.

그럼에도 나름 유명한 BJ들의 방송 스타일은 꿰고있다.

욕설이나 선정적인 행동 없이 하던 그들과, 윤태현의 방송은 전혀 딴판이다.

[아 제가 얘랑 고딩때 진짜 매일같이 놀았거든요? 얜 그때부터 이랬어요. 아 겁나 찌질해 진짜. 그래서 개조를 좀 시켜준다고 바지벗기고 운동장 뛰게하고 자신감있게! 어? 교장실 앞에다가 오줌싸게하고! 에? 별짓을 다시켰거든요 큭큭크]

윤태현의 말에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5959 : 와 진짜 호구새낔ㅋㅋㅋㅋㅋㅋㅋㅋㅋ]

[M없다 : 완전 괴롭혔네 ㅋㅋㅋㅋㅋ 윤태현 진짜 인성]

[머갈장군 : 여기서도 오줌파티 한 번 가나요?]

[커엽나 :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내가 한창 올라오는 글들을 읽고 있을 때,

“선배! 그만 보세요!”

여기서 더 치욕스러운 장면들이 이어지는 걸까.

영기가 다급하게 말렸다.

얼마나 급했는지 내 손에서 휴대전활 뺏어 화면을 아예 꺼버렸다.

난 머릴 감싸잡았다.

“영기씨. 이런 말 웬만하면 안하려고 했는데. 당신 바보야?”

너무나도 한심함에 난 결국 영기를 탓했다.

“······”

영기는 자신도 알고있다는 듯 대답하지 않은 채.

푹 고갤 숙였다.

“바보냐고! 기자가 돼서 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

“그럼- 제가 어떻게······ 저같은게 무슨 기자하냐는 말에······솔직히 저도 반박을 할수가 없는데 어떻게해요! 저도······ 선배처럼 자신감있게 굴고 싶은데 안된단 말이에요!”

“하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증이다.

“영기씨.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지금껏 내가 홍보팀장이나 실장들 멱살 잡고 싸운 적있어? 아니면 욕을 내뱉는다든지.”

“······아뇨.”

“나나 영기씨나 기자잖아. 기자의 무기는 뭐야? 기사야. 이런 무개념한 놈들에게 정의를 알려줄 수 있는 펜을 쥐고도 왜 자각을 못해?”

“하지만······”

영기가 지금 준비중인 기사는, 미튜브BJ의 긍정적 행보에 대해 담을 예정이었다.

이 때문에 영기는 다른 논조의 기사를 쓴다는 생각을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은 없어. 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거야. 그러니까 나랑 탈곡기 가동 한번 하자. 내가 마침 이런 놈들을 많이 싫어해서 말이야.”

“서, 선배······”

내 말에 간신히 영기가 고개를 들었다.

“영기씨가 분명 나름대로 괴롭고 고민도 많이했을 거 알아. 하지만 내 입장에선 너무도 간단하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를 갖고 끙끙대는거. 난 못 기다려. 영기씨도 좋은 기자가 되고 싶다 했지?”

그 말이 진짜였다면, 여기서 이렇게 좌절해선 안된다.

더 강하게.

더 날카롭게.

자신의 마음을 단련시키고 상대를 몰아부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영기씨의 성장속도? 엄청 더뎌. 스스로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상태로는 정식 기자, 되기 힘들어. 하지만! 난 이걸 이겨내면 충분히 발돋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영기가 고민하듯 눈을 굴렸다.

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할 거야, 말 거야? 마음 가는대로 정해. 존중해줄테니까.”

물론, 그 선택에 따라 나와 영기의 관계는 그대로 끝날 수도 있다.

영기는 내게 답하지 않고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꿀떡꿀떡, 단박에 술을 넘긴 후.

영기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선배.”

“오케이.”

영기의 결정이 났다.

난 휴대전화를 꺼내 김정효 팀장에게 연락했다.

우선 영기의 사정을 팀장에게 상세히 설명한 후.

정해놨던 기사의 방향을 바꾸겠노라 보고했다.

-······그래 진형아. 내가 예전에 해줬던 말 기억하냐? 기사는 객관적으로, 하지만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대중이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된다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기로 했으니까, 철저하게 해라.

조용히 영기에 대한 얘길 듣던 김정효 팀장은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적극적인 지지이자 분노였다.

그 마음을 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난 영기에게 말을 이었다.

“영기씨. 내일 윤태현이 올린 방송영상들 다 확인하면서, 법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문제될만한 것들 다 찾아놔. URL 다 따놓고 영상 신고도 다 해놔. 욕설 나오는 방송,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 모두 다. 알았지?”

“네, 넵.”

영상 하나만 봐도 얼마나 문제가 많은 방송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다른 영상들도 분명 이와 다르지 않겠지.

아니, 더 심한 것들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런 근거자료들을 충분히 모은다면 윤태현이란 사람, 그가 하는 방송 자체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다.

‘고글에서도 실드를 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

머리속에 대충 계획이 짜여나갔다.

예견 컨대, 고글코리아는 금방 윤태현으로부터 등을 돌릴 거다.

그만큼 여론에 민감한 곳이니까.

[배달의겨레 성경호 팀장]

한참 생각하고 있던 사이.

성호경 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골드앤실버 투자 건, 드디어 결착났나.’

난 영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수신을 눌렀다.

-기자님! 배달의겨레 성경호입니다!

“네 팀장님. 투자건은 잘 성사되셨나요?”

별다른 이변없이 일이 풀렸을거라 짐작하면서.

난 예의를 차려 성 팀장에게 물었다.

-네! 덕분에 투자유치 성공했습니다. 기자님, 이제 기사 내셔도 됩니다.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이한 이사님께서도 감사하다고, 나중에 식사나 함께하자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 진심이겠죠? 제가 조만간 연락드려도 놀라지 마세요.”

반농담 식으로 내가 말했다.

-하하하! 진심이죠 당연히. 기자님, 앞으로도 많이 도움받겠습니다. 참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성 팀장이 유쾌하게 내 말을 받았다.

“기사는 걱정하지 마세요. 뭐 배달의겨레에 흠 날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서 심심할 지경이니까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주말 푹 쉬세요!

“네, 팀장님도 좋은 주말 보내세요.”

성경호 팀장이 통활 끊었다.

난 술을 자작하고 있는 영기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영기씨, 주말에도 할일 많은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일단 나가자.”

“······네, 선배.”

영기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내 뒤를 따라나왔다.

이제 시간은 오후 6시 반.

대학생들이 여유롭게 신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난 지하철을 향해 걸어가며 영기에게 말을 걸었다.

“우선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어. 내일 부터 아까 말한 자료 준비하고. 알았지?”

“네······넵.”

“마음 강하게 먹어. 영기씨. ······자신이 나온 영상조차 무기로 쓸 수 있어야 돼.”

아까전엔 황급히 꺼버린 그 문제의 영상.

그걸 직접 다시 보고, 스크리샷을 찍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영기는 달라질 수 있을 거다.

“마지막 기회야. 부디 영기씨가 계속 기자일을 할 수 있길 바랄게 난.”

“알겠습니다.”

떨림없이 단단한 대답이었다.

‘그래, 이정도면 믿어봐도 되겠지.’

난 영기를 먼저 지하철 역사로 보내놓은 뒤.

근처 카페에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운영체제가 가동되자 마자 온라인 기사작성기에 저장해둔 [작성중)배달의겨레, 골드앤실버로부터 400억 투자] 기사를 불러왔다.

간단한 수정끝에,

[[단독]배달의겨레, 골드앤실버 400억 투자유치]

제목까지 고쳐 기사를 송고했다.

이제 김정효 팀장이 기사를 확인하고 웹으로 출고하기만 하면 된다.

[주진형 : 팀장, 배달의겨레 투자 기사 송고했습니다]

난 코코아톡으로 김 팀장에게 전달했다.

[김정효 : ㅇㅋ 지금 볼게]

보통 이 시간대엔 차를 몰고 퇴근하는지라, 문자메시지 확인도 제대로 못할 텐데.

이렇게 빠른 답장이라니.

아마도, 김정효 팀장은 내 기사를 기다린 듯 했다.

[주진형 : 네 감사합니다]

10분 후.

김정효 팀장으로부터 내 기사가 출고됐다는 연락이 왔다.

-진형아 고생했다. 주말 동안 네 기사로 도배가 되겠네?

“그럴 것 같습니다. 배달의겨레 측도 고생좀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

게다가 내일은 편안히 쉬어야 할 주말이다.

헌데 이런 특종이 터져버렸으니, 기자들이 시도 때도없이 홍보팀에 전활 해대겠지.

-그래. 너도 이제 퇴근해라. 그리고 영기, 네가 잘 도와줘.

김정효 팀장도 영기의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이게 마지막이다.

아픈 과거가 있었다곤 해도,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이상.

‘영기는 기자로써 살아갈 수 없을 거야.’

모든 업무를 마무리 한 난, 카페를 나와 지하철을 탔다.

퇴근시간과 겹쳐 꽉 끼는 전동차 안.

바지주머니에 놔둔 휴대전화가 힘껏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간신히 손을 주머니에 넣어 꺼냈다.

보니까 코코아톡 메시지가 수십개씩 도착한 거였다.

[상성훈 : 충성충성충성! 주느님! 기사 실화입니까!]

[최경태 : 에라이 미친놈아 또 금요일 밤에 단독을 내냐!]

[정광현 : 야 진형아 너 기사 이거 뭐냐?]

[이수경 : 주 기자님! 배달의겨레 투자 기사 이거 뭐예요?]

[성경호 : 기자님! 기사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릴게요!]

대화목록을 훑던 난, 휴대전활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주말 동안, 심심할 새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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