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특종-89화 (89/107)

89. 이런 대단한 분이 디스플레이로 오시다니

‘어쩐지 너무 순조롭게 흘러간다 싶었다.’

디스플레이는 전자제품의 화면표시장치를 뜻한다.

보통 액정이라 불리는 게, 이 디스플레이에 속하는 거다.

난 디스플레이 분야는 맡아본 적 없었기에, 사실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일단 내색하지 않았다.

차분히 김경은 국장의 뒷말을 듣기로 했다.

“알아요. 주 기자가 인터넷하고 통신 쪽 담당했던 거. 근데 지금 딱 디스플레이만 비어서······ 몇 달만 맡아줬으면 좋겠어요. 통신/모바일 맡고 있는 양대훈 기자를 나중에 엔터프라이즈로 옮길 거라. 괜찮겠어요?”

김경은 국장이 내게 친절하게 물어온다.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회사에 들어온 이상, 따라야할 부분은 따라야겠지.

어차피 IT기자로 지내다보면, 한 번쯤은 거쳐야할 분야기도 하고.

난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다만 잠시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디스플레이는 어깨너머로 본 것 밖에 없어서요.”

“물론이죠. 충분히 적응할 시간 줄 거예요. 이걸 미리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김경은 국장이 뒷말을 삼켰다.

그러게, 왜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알았다면 회사에 출근하기 전 미리 준비를 좀 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끝까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당장 양 기자에게 옮겨라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이해해줄 수 있나요?”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내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선배의 자리를 굴러온 돌이 밀어내고 앉는거라면, 나도 부담스럽다.

“그럼 다행이고. 다른 선배들하고 인사는 나중에 해야겠네요.”

김 국장의 말대로, 사무실에 남아있는 기자가 거의 없었다.

앞으로 내가 부대껴야할 정보통신팀 자리는 텅텅 비었고.

그나마 산업경제팀에 막내 기자로 보이는 자가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들 출입처로 곧장 출근한 것 같다.

“저쪽으로 가면 노트북 지급해줄 거예요.”

난 김경은 국장이 가리킨 방향, 경영지원실로 몸을 움직였다.

“여기 노트북 일련번호 적으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자신을 오경수 대리라고 밝힌 남자의 지시에 따라, 난 서류를 작성했다.

받아든 노트북은 그리 고급기종은 아니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뭔가 내게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꽤나 신선하고 감사했다.

디지털투모로우에선 이런 필수품도 무조건 자비로 준비 아니었나.

기자는 노트북이 필수인 직업인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노트북이나 하나 새로 살 걸 그랬나.’

내가 지금 쓰는 노트북은 구매한지 4년 된 제품이다.

게다가 당시에도 돈이 없어 최대한 저렴한 걸로 골랐다.

지금은 집을 사고도 돈이 많이 남아있으니,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될 것 같다.

“국장. 노트북 받아왔습니다.”

난 노트북을 들고, 다시 김경은 국장 앞에 섰다.

“그럼 일단 저기 빈자리에 앉아서, 기사라도 읽고 있을래요? 디스플레이 출입처 명단은 박선혜 팀장이 나중에 보내 줄 거예요.”

“알겠습니다.”

한 마디로 잠시 쉬고 있으란 소리였다.

첫날부터 땀나게 뛰진 않을 걸 알았지만,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난 깨끗이 치워진 책상자리에 앉으며 새 노트북을 구석에 올려놨다.

그리고 가방에서 내 노트북을 꺼낸다.

새 노트북은 아마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거다.

그러니 괜히 열어서 이것저것 설치하는 데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디스플레이인가······’

구동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생각한다.

기문 선배가 디지털투모로우에 있던 시절, 모바일 디스플레이를 취재 하던 게 생각난다.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일단 최근 기사부터 읽어볼까.’

난 메이버 뉴스 홈에 접속해 디스플레이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다.

한 30분 정도 훑어보니 최근 내용은 대충 알 것 같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쌍두마차는 단연 LC디스플레이와 사성디스플레이 두 곳.

두 기업 모두 흔히 액정이라 불리는 액체결정 디스플레이(LCD)를 생산한다.

거기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디스플레이 또한 개발 및 양산하고 있다.

‘내가 지켜볼 곳은 주로 TV와 모바일 패널이겠군.’

모니터나 사이니지에도 디스플레이 패널이 들어가지만, 업계의 주관심사는 아니었다.

주요 기사들은 이 두 부분에 집중 돼 있었다.

‘최신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패널이 자사기술의 척도가 되는 거군.’

디스플레이 기사는 주로 생산 공장의 세대나 장비증설 등에 대해 기술돼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 패널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음.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모바일에서도 피 터지는 경쟁 중이었군.’

각사는 최신 기술을 적용한 모바일 디스플레이 패널을, 계열사 스마트폰에 공급중이다.

양사의 자존심 싸움이 부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거다.

‘어쩌면 나름 재밌을지도. 디스플레이 쪽도.’

난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했다.

디스플레이는 처음인지라 난감한 건 사실이다.

허나 어차피 기자를 하다보면 ‘처음’으로 공부해야할 것들이 산적해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겨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겐 남들이 갖지 못한 무기가 있으니까.’

일주일 후의 보도 자료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

이런 커다란 걸 쥐고도, 업계에서 자릴 못 잡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가 게으른 탓 일거다.

***

마이뉴스24에 입사 후 며칠 간.

난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준비 기간을 가졌다.

출근해선 디스플레이 관련 기사와 자료를 읽는다.

쓸만한 소재는 갈무리 해두고, 퇴근 후 집에서 기사 계획서에 정리해 넣는다.

디스플레이 출입처 연락명단도 받았다.

직속상관인 박선혜 정보통신 취재팀장을 통해서였다.

박 팀장은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사근사근한 말투가 특징이었다.

“전에 디스플레이 취재하던 기자가 주고 간 건데, 연락처가 많이 없을 거야.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어. 진형씨가 열심히 뛰는 수밖에.”

아마 기존 디스플레이 담당기자가 취재원을 공유하지 않고 나가버린 듯하다.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기자가 보유한 취재원은 그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다.

기자 서로가 경쟁상대인만큼, 자원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는 간다.

‘상관없어. 어차피 처음이니 다 부딪혀 봐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대표이사와 만날 수 있다 한들, 큰 도움 안 될 테니까.

난 직급에 상관없이 무조건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팀장, 나가보겠습니다.”

입사 3일차.

난 드디어 사무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응. 오늘 LC 트윈즈타워?”

박선혜 팀장이 확인했다.

“네. LC디스플레이 이한중 부장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미 보고를 올렸던 내용이지만, 재차 설명한다.

LC디스플레이 이한중 홍보부장.

디지털투모로우 재직시절이라면 쉽게 만나기 어려웠을 인물이다.

헌데 역시 회사 배경이 좋긴 하다.

초짜 기자의 요청에도 마이뉴스24 소속 덕분에 바로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음. 이한중 부장인가. 응, 알았어. 끝나고 난 뒤엔 사무실 돌아올 것 없어. 트윈즈타워 기자실에서 있다가 퇴근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형씨만 괜찮으면 내일 부터 기자실로 바로 출근해도 돼.”

박선혜 팀장이 덧붙였다.

나로썬 무척 달가운 얘기였다.

디지털투모로우에 있을 땐, 무조건 오전 사무실 출근이었다.

반면 대부분 매체 기자들은 담당 출입처 기자실로 출근하는 게 일반적이다.

‘좋네. 여기가 그 일반적인 곳이라서.’

아무래도 사무실은 눈치가 많이 보이는 장소 아닌가.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취재하는 게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다.

“네. 그럼 도착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난 박 팀장에게 인사한 후 여의나루역으로 향했다.

마포대교로 들어가기 바로전의 고층의 쌍둥이 건물이, 트윈즈타워다.

LC그룹의 여러 계열사들이 이 안에 자리하고 있다.

“기자실 들어가려는데요.”

난 건물 로비의 안내데스크로 가, 직원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신분증하고 명함 주시겠어요?”

난 안내원의 요구에 따라 신분증과 명함을 건넸다.

일전에 와봤기에 절차는 파악하고 있다.

[마이뉴스24 편집국 정보통신팀 기자 주진형]

새로 받은 명함이다.

명함을 제출하면서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몇 달 전만 해도 내가 마이뉴스24 소속 기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마이뉴스 주진형 기자님이시군요. 여기 출입증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난 출입증을 받아들고 곧장 기자실로 이동했다.

LC트윈즈타워 내의 기자실은 두 곳.

동관과 서관, 건물마다 하나씩 조성돼 있다.

난 동과의 기자실로 들어와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놨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꺼내 만나기로 한 이한중 부장에게 전활 걸었다.

“네, 부장님. 저 오늘 뵙기로 한 주진형 기자입니다.”

-아, 기자님. 오셨어요?

이한중 부장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네. 지금 기자실인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지하 1층으로 오시겠어요? 거기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난 다시 기자실을 나왔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1층으로 내려가자, 이한중 부장의 말대로 꽤 넓은 카페가 보였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쩐지 마주치는 시선이 있다.

혹시나 싶어 휴대전활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띠리리링.

예상대로 내 앞에 앉아있던 40대 초중반 남성의 전화벨은 울린다.

그가 곧 나를 인식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물었다.

“주진형 기자님?”

“안녕하세요, 부장님. 디지-, 아니 마이뉴스24 주진형 기자입니다.”

순간적으로 입에 배어있는 디지털투모로우가 튀어나올 뻔 했다.

난 가까스로 매체 명을 정정하며 명함을 건넸다.

이한중 부장도 뒤이어 명함을 건네며 소개에 나섰다.

“아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홍보팀 이한중 부장입니다. 이쪽은 저희 홍보팀 직원들입니다.”

이한중 부장의 손끝에 3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도 기립해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홍보팀 이국현 과장입니다.”

“전 차세현 과장이라고 합니다.”

“문준철 대리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자님!”

줄줄이 인사를 해대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고작 나 하나 만나는데 홍보팀 네명이 동시에 나올 필욘 없다.

“어, 이렇게 많이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주진형 기자입니다.”

“하하. 일단 앉으시죠. 음료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이한중 부장이 내게 물었다.

“아, 전 그냥 따듯한 차 아무거나 주시면 됩니다.”

내 말에 이국현 과장이 문준철 대리에게 눈치를 준다.

“문 대리?”

“네. 갑니다.”

의중을 안 문준철 대리가 주문대로 걸어갔다.

“주 기자님 기사 찾아보니까, 이전에 디지털투모로우에 계셨더라구요?”

이국현 과장이 나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열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네. 지난달까지 있었습니다. 그땐 주로 통신 쪽을 맡았구요.”

이한중 부장이 끼어든다.

“기자님 정말 기사를 많이 쓰셨더라구요. 하루에 10개 이상 쓰시는 날도 있고. 대단하십니다.”

그거야 위에서 달달볶으니까.

기사 수 욕심만큼은 남달랐던 이윤철 대표가, 적은 수의 기자들을 힘껏 굴린 결과였다.

“에이, 그거야 뭐 거의 보도 자료들이죠.”

“그래도 대단한 거죠. 보통 기자 분들 하루에 5개 기사 쓰기도 힘들어하시는데.”

“그리고 내신 기사들도 다 단독보도던데요? 내일코코아 합병도 먼저 쓰시고. 아유 깜짝 놀랐습니다. 아 이런 대단한 분이 디스플레이로 오시다니. 그래서 다 같이 뵙고 인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국현 과장과 이한중 부장이 번갈아가며 날 칭찬했다.

두사람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홍보팀이 몰려온 건 납득했다.

‘예전 기사를 알아봤단 말이지.’

내가 어떤 인물인지 다 같이 봐두려는 거겠지.

“뭐 그래도 디스플레이는 진짜 초짜라서요. 많이 여쭤보겠습니다.”

일단 나를 낮추며, 이 머쓱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아, 그럼요. 그게 저희 일인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이한중 부장의 말에 난 요 며칠간 궁금했던 것들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LC에서 생산하는 OLED는 뭔가 좀 구조가 특이하던데요?”

아무래도 답변자는 이국현 과장인가 보다.

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저희가 OLED 대형화로 사용한 기술이 WOLED라고, 화이트OLED로 이뤄진 패널입니다.”

“근데 WOLED는 진짜 OLED디스플레이로 보긴 힘들단 얘기가 있던데요. 사성 건 RGB소자가 자체적으로 색을 내지만, WOLED는 컬러필터로 색을 낸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관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알아둬야 할 건 물어봐야지.

이국현 과장은 크게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부정했다.

“음, 네. 컬러필터로 색을 내는 건 맞는데. 진짜 OLED 디스플레이로 보기 힘든 건 아니죠. 저희가 화이트 OLED층이 있는 게 아니라 RGB를 다 배열해서 화이트를 만드는 겁니다.”

정확히는 RGB화소를 독립적으로 배열 하는 게 아니라, 적층방식으로 증착하는 거겠지.

“알고 있습니다. RG와 B로 2층 탠덤 구조로 쌓아서 대형 WOLED를 만들고 계시죠.”

“아, 벌써 거기까지 공부하셨어요?”

이국현 과장이 놀랍다는 듯 날 바라봤다.

나도 꽤나 머릴 싸매고 공부했던 내용이다.

아직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순 없지만, 대충 구조는 파악하고 있다.

“어쨌든 컬러필터를 거치는 이상, 기존 LED TV와 크게 다른 점을 모르겠네요. 사성전자 RGB OLED는 각 소자가 자체적으로 색을 내기 때문에 색 재현력이나 휘도 면에서 더 나은 것 같던데요.”

“그렇긴 한데······”

내 추궁에 이국현 과장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연다.

“여러모로 대형화에선 WOLED밖에 답이 없습니다. 사성도 모바일 디스플레이야 잘나가지만, 대형 OLED의 경우 수율이 안 나와 생산을 못하고 있거든요.”

“그럼 모바일 OLED 쪽은-”

내가 질문을 이어가려던 찰나,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대화중에 실례였기 때문에, 난 전화기 화면을 살짝 곁눈질 했다.

헌데, 얼핏 들어온 글자가 망치처럼 내 머릴 치는 느낌이었다.

“······어? 어,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다급히 휴대전화를 들고 내용을 제대로 확인한다.

[오늘 파주공장 질소누출 사고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 LC디스플레이 홍보팀]

일주일 후의 이메일이 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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