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특종-91화 (91/107)

91. 이날, 저희 견학 가는 걸로 하죠

난 이미 한 번 미래가 달라진 걸 경험했었다.

유메프 채용갑질 사건 때.

내 간섭으로 유메프 박지윤 실장의 보도 자료가 바뀌었다.

‘이 사고도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다.’

최우선은 아예 사고발생을 막아, 보도 자료가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

만일 이걸 실패한다면, 그 다음.

사망자 없이 단순 누출사고로 그치게 만드는 거다.

‘잘하면 질소 누출 기사 정도는 쓸 수도 있겠지.’

난 조심스레 생각했다.

솔직히 특종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렸다고 할 순 없다.

여건만 받쳐준다면, 당연히 기사를 내고 싶으니까.

‘자. 어쨌든, 이제 마음을 정했으니 방법을 강구할 차례인가.’

남은 건 파주에 있는 LC 디스플레이 공장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리고 어떻게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가.

이 두 가지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어쩐다.’

난 왼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단순하게 하나씩 생각을 쫓아본다.

일단 무턱대고 홀로 파주 공장을 찾아갈 순 있다.

차를 타면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가까운 거리니까.

문제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인데.

이를 위해선 LC디스플레이 측의 허락이 필수다.

‘거기다가, 사고가 발생할 P8공장의 9층. 거기까지 접근해야 돼.’

우연을 가장해 내가 그곳을 서성이는 건, 아예 불가능한 노릇.

‘그럼 역시 정공법으로 LC디스플레이에 협력을 요청해야 한단 소린데······’

어떻게 협력을 요구해야, 자연스럽게 공장 안을 돌아다닐 수 있을까.

사고가 발생 할 테니 날 들여보내 달라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LC디스플레이에서 믿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실제로 일이 벌어졌을 땐, 내 입장만 난처하게 될 거다.

‘일주일 후의 보도 자료란 건, 밝힐 수 없는 거니까.’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말이지.

그러니, 사고가 발생한단 사실을 밝혀선 안 된다.

다른 이유로 공장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역시 취재가 제일 그럴듯한 방안이긴 한데.’

단, 취재도 취재거리가 있어야 하겠다고 말할 명분이 선다.

공장 취재를 해서 당장 내놓을만한 기사가 있던가.

‘음, 혹시 선배들 중에 경험하신 분이 있나.’

이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난,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주진형 : 선배들. LC디스플레이 공장 방문취재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코코아톡 디지털투모로우 탈출 채팅방.

여기에 내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김기문 : 응? 방문취재? 주 후배 디스플레이로 넘어간 겐가?]

다른 선배들보다 기문 선배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주진형 : 네. 저 디스플레이 취재하게 됐습니다]

[김기문 : 오호, 마이뉴스24가 주 후배의 진면목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갑자기 왜?]

[상성훈 : ······내가 있기 때문이지]

상성훈 선배도 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이뉴스24 이직하고 상 선배 얼굴을 아직 한 번도 못 본 상태다.

다시 같은 매체 식구가 됐지만 어째 만나기가 쉽지 않다.

[김기문 : 아, 그러고 보니 상 선배가 마이뉴스 인터넷 담당이었구려!]

[이주연 : 상 선배. 창창한 후배를 위해 출입처 옮기실 생각은?]

[상성훈 : 없는데요]

[주진형 : ㅋㅋㅋㅋㅋ]

한동안 주연 선배와 기문 선배가 상 선배를 놀려댔다.

주느님이라고 부를 땐 언제고, 이제와 모른 체 한다느니 말이다.

결국 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끼어들었다.

[주진형 : 아무튼 일단 디스플레이 받았으니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근데 제가 디스플레이 분야는 초짜라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공장을 좀 가보고 싶은데]

[김기문 : 음, 내가 알기론 LC측에서 기자들 모아 공장견학을 시켜주는 걸로 아는데. 2분기마다던가? 그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견학인가.

딱 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주진형 : 오,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럼 견학하면 기사는 공장 르포로?]

르포기사, 현장을 취재해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기사.

보통 기사들이 있는 사실 그대로만 전달한다면.

르포기사는 기자가 자신의 시선을 기사에 실체화해 현장을 묘사한다.

[김기문 : 그런 것 같네. 아니면 디스플레이 제작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쓰더군.]

걸렸다.

내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때.

초치는 문장이 화면에 떠올랐다.

[상성훈 : 그거 이미 두 달 전인가 갔다 왔어. 아마 올해 말쯤이나 다시 갈걸?]

[주진형 : ······아, 너무 머네요.]

이미 두 달 전에 진행했다면, 다음 견학은 4분기라는 건데.

시간이 맞질 않는다.

난 당장 다음 주에 공장에 들어가야만 하니까.

[상성훈 : 아니면 개인적으로 부탁해봐야지. 주느님 클라스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상 선배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당장은 선배가 해준 조언 외엔 답이 없어 보였다.

난 코코아톡 앱을 종료하고 통화 앱을 켰다.

방금 전 만나서 받았던 LG디스플레이 홍보팀 명함들을 살핀다.

그 중 이국현 과장의 명함에서 연락처를 찾아,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010-39XX-23XX LC디스플레이 이국현 과장]

전화를 연결한다.

신호가 몇 번 울리기 전에 이국현 과장의 목소리가 나왔다.

-네, 이국현 과장입니다!

“과장님, 저 아까 뵀던 마이뉴스24 주진형 기자입니다.”

-네! 기자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거 때문에 전화 주셨나요?

난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국현 과장에게 털어놨다.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파주에 있는 공장이요. 거기 견학을 좀 가고 싶어서요. 얘길 들어보니까 정기 견학은 이미 갔다 오셨다고 하더라구요?”

-아, 네. 두 달 전에 벌써 갔다 왔네요. 아마 다음에 기자님들 모시고 가는 건 가을 지나고 나서 일 것 같아요.

그 때가 되면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할 이유가 없지.

“근데 제가 당장 지식도 부족하고 기사거리도 없어서요. 공장 견학하면서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풀어내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내 부탁에 이국현 과장은 길게 곤란함을 표했다.

-아······글쎄요. 제가 바로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서요. 일단 부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이한중 부장님이요?”

내가 확인했다.

-네. 이 부장님이 담당하시거든요.

“그럼 제가 직접 연락드려도 될까요?”

중대한 사안이니 만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다.

내가 직접 이한중 부장에게 접촉해 어떻게든 긍정적인 답을 끌어내야 한다.

-아, 그러시겠어요? 그럼 일단 말은 전달해놓을게요.

“알겠습니다.”

난 전화를 끊은 후, 곧장 이한중 부장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이 부장은 10초 정도 신호음이 울린 뒤에 내 전활 받았다.

-네, 주 기자님. 말씀 하세요

“부장님, 아까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한데 부탁드릴게 있어서요.”

-네. 얘기 들었어요. 파주 공장에 견학을 가고 싶으시다구요.

이한중 부장이 용건 내용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말했다.

이국현 과장이 바로 내 말을 전한 모양이다.

난 진지한 태도로 이 부장에게 설명했다.

“네. 어렵다는 건 알지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장 준비 중인 기사취재에도 필요하고. 이 일만 잘되면 앞으로 LC디스플레이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의미심장하게 뒷말을 덧붙여 본다.

하지만 이한중 부장이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린 없다.

그저 ‘좋은 기사를 써주겠다는 건가’ 싶겠지.

-아, 하. 그게 말이죠. 기자님들을 공장으로 한 번 모실 때 저희가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아서요.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주 기자님 한 분을 모시고 공장 견학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한중 부장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난 그의 표현을 잘 이해했다.

나 하나 공장 견학시키기 위해 소모되는 자원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본래 기자단을 이끌고 갈 때엔, 본사의 버스지원을 받고 단체로 이동하겠지.

다수의 기자들을 소수의 인력으로 관리 및 인솔하면, 비용 대비 효과가 꽤 괜찮다.

헌데 나 혼자라면?

들어가는 비용은 똑같은데 효과가 영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최소한 결과 값을 유사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줘야겠지.’

판단을 끝낸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몇 명 정도면 견학신청이 가능하겠습니까?”

-네?

“저 혼자라서 부담스러우시다면, 다른 기자 분들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인원은 최소 몇 명이 돼야 견학이 가능할까요.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사실 다른 기자들을 끌어 모을 자신은 없다.

내가 디스플레이에 오래 몸담은 기자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제 3일차인데 무슨 전문기자들의 인맥이 있겠는가.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여기서 간절한 마음인 건 나밖에 없으니까.

-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잠시 만요. 제가 확인해보고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다행히 긍정적인 신호가 나왔다.

“네, 물론입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가능성이 보였다.

‘어떻게든 공장에 들어가야만 해.’

하지만 난 최악의 상황도 상정해두기로 했다.

충분히, 공장 견학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럴 경우엔 강행돌파 외엔 답이 없나.’

딱히 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나, 진상 짓을 부려서라도 파주공장에 들어간다.

그 날 하루 쯤.

진상 기레기로 낙인찍히더라도 괜찮다.

나만 움직이면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깟 자존심과 평판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순 없다.

‘그래, 마음 굳혔다.’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심적 부담감이 한결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내가 막장 기레기가 될 필욘 없었다.

-주 기자님. 파주 쪽하고 얘길 해봤는데요. 기자님 포함해 열 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30분이 지나서 온, 이한중 부장의 연락.

그의 말을 듣고 난 속으로 환호했다.

이로써 나를 포함해 기자 열 명만 모으면 공식적으로 LC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엘 갈 수 있는 거다.

‘10명인가. 쉽게 모일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시작해볼까.’

디스플레이 분야에선 난 무명이나 다름없는 기자다.

게다가 나와 친분 있는 기자들 또한 없다.

어쩔 수 없이 한 다리를 건너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디지털투모로우인가.’

그나마 지금 내 입장에선 가장 부탁하기 쉬운 매체가 아닐까.

난 디지털투모로우 김정효 팀장.

아니 김정효 선배에게 코코아톡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주진형 : 선배. 안녕하십니까. 주진형입니다]

여태껏 팀장으로만 부르던 사람에게, 선배라고 부르려니 몸이 막 간지러워진다.

그래도 감사함과 친근함을 담아 간신히 문자를 쳤다.

[김정효 : 어어, 진형아. 어때 잘 지내고 있냐. 마이뉴스24는 어때]

[주진형 : 네, 선배. 이제 3일째라 잘 모르겠지만 괜찮은 것 같습니다]

[김정효 : 당연히 괜찮아야지. 디지털투모로우랑 비교하면 천지 차이일 텐데]

내가 차마 못한 말을, 오히려 김정효 선배가 가볍게 꺼낸다.

[주진형 : 하하. 저 마이뉴스에서 디스플레이 분야를 맡게 됐습니다]

[김정효 : 네가? 갑자기 그쪽을 맡을 줄은 몰랐는데]

김경은 마이뉴스24 편집국장의 말에 따르면, 두세 달 정도만 맡으면 될 거라 했다.

이후엔 다시 통신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근데 왠지 통신과 디스플레이 두 가지 모두를 취재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주진형 : 저도 몰랐습니다만, 뭐 일단 맡게 됐으니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김정효 : 그래야지]

[주진형 : 그래서 말인데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내가 본론을 꺼냈다.

[김정효 : 어? 뭔데?]

[주진형 : 처음으로 LC디스플레이 파주공장을 견학가려 하는데, 같이 갈 기자들이 필요합니다. 디지털투모로우 디스플레이 담당기자와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내가 알기로 디지털투모로우 내 디스플레이 담당은 이유정 기자.

영기의 입사 동기다.

뭐 한달 새에 출입처가 바뀌었을 린 없겠지만, 단정 짓진 않고 물어본다.

[김정효 : 그래? 잘됐네. 유정이가 사실 지난 번 견학 때 기자단에서 제외됐었거든]

그것 참.

역시나 디지털투모로우랄까.

매체가 많다보니까 기업이 기자 전부를 챙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담당기자 본인이나 매체의 입장에선 상당히 굴욕적인 얘기였다.

‘어찌됐든 지금 내게 있어서는 상당히 잘 된 일이지 뭐.’

이렇게 인원을 한명 채웠다.

남은 인원은 8명.

난 디지털투모로우를 탈출한 선배들과, 그간 알고 지냈던 기자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다.

그 결과 디지털투모로우와 이뉴스, 데일리뉴스, 이디넷코리아, 뉴데이트, 녹두일보 등등.

일이삼류 매체가 섞인 기자단이 탄생했다.

간신히 열 명 명단을 채운 난, 이한중 부장에게 다시금 연락했다.

일정을 통보하기 위해서다.

“그럼, 부장님. 다음 주 수요일. 이날, 저희 견학 가는 걸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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