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오늘 견학할 P8라인으로 가볼까요
-다음 주 수요일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한중 부장이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부장과의 통화가 끝나고.
“휴.”
난 조용히 숨을 내쉬며 스트레칭 하듯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수십 통의 전화를 쉴 새 없이 돌려가며, 간신히 불시견학을 성사시킨 거다.
뿌듯함과 안도감이 동심에 전신에 감돌았다.
‘이제 견학가기 전까지 근근이 기사 쓰면서 버텨야겠네.’
김경은 국장이나 박선혜 팀장 모두, 내게 부담 갖지 말고 준비하라곤 했지만.
일주일 동안 기사를 한 건도 안내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기사의 중요도나 신선도가 낮을지라도, 일단은 꾸역꾸역 내볼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LC디스플레이의 라이벌, 사성디스플레이 측은 물론.
국내외 디스플레이 제조 협력사들도 하나씩 접촉해나가야 할 터다.
‘철저히 준비해보자.’
난 마음을 다잡았다.
[OLED 대형화의 쓴맛...사성전자 제조공정 고민]
[OLED TV 생산 때문에...사성 ‘잉크젯’카드 꺼낼까]
[LC, WOLED로 승승장구...사성 QD-LCD로 대응]
[외산 도배된 OLED 핵심장비...국내업체 기회 엿본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난 선배들의 기사를 참조해가며, 디스플레이 초짜 티가 줄줄 흐르는 기사들을 내놓았다.
시의성이 약간 떨어지는 기사들도 있지만, 편집국에서도 이해하는 바였다
‘역시 기자란 직업은 참 매력적이야.’
아침 출근길, 난 여의나루역에서 LC트윈스타워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공부를 하고 이에 대해 글을 쓰면 돈을 벌 수 있다니.
디스플레이 기자가 되고나서 새삼 기자의 매력을 느낀 나였다.
슬슬 내 머릿속엔 디스플레이 시장의 흐름이 잡히고 있는 중이다.
‘적응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큰 고비가 남았군.’
트윈스타워가 멀리서 내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대망의 수요일.
드디어 LC디스플레이 파주 공장으로 견학을 가는 날이다.
“어! 선배!”
트윈스타워 정문 앞 주차장.
내가 들어서자 모여 있던 몇 명의 기자들이 날 보고 인사했다.
그들 중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단신의 여성이 내게 달려왔다.
“아, 유정씨. 왔어?”
디지털투모로우 소속기자 이유정이다.
나보다 두 살 연하지만, 나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지라.
영기에게 그러하듯 호칭은 ‘씨’다.
“아, 선배 감사해요! 저도 견학 껴주셔서.”
유정이 친근하게 내게 말했다.
공식 견학행사가 있었을 때, 포함되지 못했었다고 하니.
이렇게 가게 돼 기쁘겠지.
하지만 나도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유정이 필요했을 뿐.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다.
“나도 유정씨가 필요해서 부탁한건데, 뭘.”
“제, 제가 필요해서요?”
왠지 모르게 유정이 말을 더듬었다.
“어······ 이 견학 최소 열 명 모아야 가능하거든.”
“아, 아아.”
내가 설명하자 유정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튼 이참에 잘 갔다 오자. 어, 저쪽에 기문 선배도 와계시네. 인사는 했어?”
기자들 무리 속에 기문 선배도 있었다.
기문 선배가 맡고 있는 출입처는 통신/모바일.
선배는 모바일을 담당하며 디스플레이까지 묶어서 취재하고 있었다.
이뉴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네. 기문 선배도 디지털투모로우에 계셨다면서요?”
내가 기문 선배를 가리키며 말하자, 유정이 고갤 끄덕였다.
“응. 유정씨 들어오기 전에 나가셨지.”
난 유정과 함께 무리 속으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선배.”
“어, 주 후배! 왔는가! 이렇게 기업 행사도 기획하고, 역시 대단하네.”
기획이라기 보단 요청이었지만.
난 피식 웃으면서 기문 선배의 호들갑에 대응했다.
“에이, 뭘 또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성사된 겁니다. 다른 선배들께서 안 오셨으면 애초에 안됐을 거고요.”
“허허, 그런가. 아무튼 즐겁구만. 주 후배와 같이 파주로 드라이브라니!”
드라이브라니, 무슨 뜻인지.
영문 모를 소릴 하는 기문 선배를 잠시 피해, 난 다른 기자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선배, 안녕하십니까!”
내가 먼저 깍듯이 인사를 올린 상대는 아이티데일리의 한주협 기자.
아이티데일리 사이트에 등재된 그의 사진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요 근래 내가 존경하게 된 제대로 된 디스플레이 전문기자였다.
“어, 네가 주진형이지? 반갑다.”
30대 후반의 강한 인상의 얼굴.
말투는 위압적이지 않고 담백했다.
“요즘 선배 기사 진짜 잘 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한주협 선배의 기사는 단순히 수박겉핥기 식의 내용이 아니다.
진짜 속을 하나하나 파헤쳐, 기술과 그 원리 등을 상세하고 쉽게 서술해낸다.
현직 엔지니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절로 존경하게 될 정도였다.
그건 전문기자의 역량을 중시하는 아이티데일리 소속 기자들 대다수가 그랬다.
“뭘 또 그런 말을. 그래, 네 얘기 나도 많이 들었어. 인터넷 쪽 레전드였다며? 디스플레이도 열심히 해.”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선배도 지난 번 견학 때 못가셨습니까?”
“어. 다른 쪽 취재하느라 놓쳤네. 잘됐지, 이번에 이렇게 가게 돼서.”
한주협 선배는 사실 내가 초청한 게 아니다.
직접 LC디스플레이 측으로부터 이야길 듣고 이 행사를 참가하게 된 거다.
주엽 선배뿐만 아니라, 어디선지 소문을 듣고 참가 의사를 밝힌 매체가 7곳.
그래서 총 18개 매체의 기자단이 공장견학을 가게 됐다.
난 주엽 선배 외에 함께 견학을 가게 된 기자들에게 모두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뉴스24 주진형입니다.”
“오, 반가워요. 그 유명한 주진형 기잘 여기서 볼 줄이야.”
“얘기 많이 들었다. 잘 부탁해.”
“앞으로 잘 지내봐요. 이런 일 있으면 꼭 좀 불러주고.”
그렇게 안면을 트고 있을 무렵.
LC디스플레이 이한중 부장이 나타났다.
“기자님들, 안녕하십니까.”
그의 등장으로 기자무리가 더욱 더 시끌벅적 해졌다.
“어, 부장님. 오셨네요.”
“오늘 부장님이 인솔가시는 건가요?”
“네, 제가 갑니다. 아무래도 비정기 견학이라 인력 많이 빼긴 힘들고. 그렇다고 여러분들 홀대할 순 없으니. 제가 직접 가야죠. 하하.”
나도 이한중 부장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이렇게 시간도 내주시고.”
“어, 주 기자님! 별 말씀을요. 저희도 이렇게 인원이 많이 모일 줄 몰랐는데. 주 기자님 덕분에 일 제대로 하는 거죠.”
딴에는 고맙다고 얘기하는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나 때문에 할일이 늘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이 그러하니,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버스는 한 10분 뒤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잠시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네에!”
이한중 부장의 말대로, 우릴 실어갈 LC디스플레이 버스는 10분 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우린 이 부장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 탑승했다.
“선배! 옆자리 앉아도 되죠!”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내 옆으로, 유정이 다가와 앉았다.
허락 없이 앉을 거면서 뭐 하러 물어보는 건가.
뭐, 어차피 거부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어, 아이고! 주 후배 옆에 벌써 이 후배가 앉았구만. 이거 내가 앉으려고 했더니만. 선수를 빼앗겼네.”
버스 복도를 걸어가던 기문 선배가, 우리 둘을 보고 탄식했다.
“아 선배, 그렇게 됐네요.”
“헤헤, 죄송해요 선배.”
유정은 전혀 죄송하지 않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기문 선배에게 말했다.
“괜찮네. 이 후배도 주 후배가 제일 편할 테니, 이해하겠네. 하지만 돌아갈 땐 놓치지 않을 것이야.”
기문 선배는 사뭇 진지하게 통보를 하고는, 우리 둘을 지나 뒷좌석으로 가 앉았다.
버스는 곧 출발했다. 여의도에서 파주 공장까지는 약 60km.
한 시간 동안 강변북로를 타고 북쪽으로 힘차게 달리는 거다.
“선배, 마이뉴스24는 어떠세요? 역시 디지털투모로우랑은 많이 다르죠? 그죠?”
사고시각이 가까워질수록 내 심경은 복잡해져 갔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 잠을 청하려던 내게, 유정이 말을 걸어왔다.
“어? 어어. 다르지. 규모부터 차이가 나니까. 편집국도 확실하게 분리돼 있고.”
마지못해 대답해준다.
유정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계속 물었다.
“좋겠다아. 업체들도 잘 대해주죠? 전 진짜 지난번에 너무 서러웠어요. 견학 참가하고 싶다고 용기내서 말했더니 이미 꽉 찼다는 거예요. 근데 다른 매체 기자들은 받아주는 거 있죠.”
나도 디지털투모로우에서 9개월 간 취재를 했기 때문에 잘 안다.
일주일 후의 보도 자료, 그 능력을 얻기 전까진 온갖 홀대를 다 당했다.
이제 기자가 된지 3개월이 된 유정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거다.
디지털투모로우란 소속과, 다른 메이저 언론의 대우가 크게 다르다는 걸.
“어쩔 수 없지. 기업체도 자신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매체를 선정했을 테니까. 열심히 해, 유정씨. 매체 이름에 묻히지 않는 기자가 되면, 다들 무시 못 하니까.”
내 말에 유정이 빙그레 웃는다.
“선배처럼, 요?”
나처럼, 인가.
유정의 말이 틀린 소린 아니다.
나도 디지털투모로우라는 장벽을 넘어서 기사로 승부해낸 거니까.
다만,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시피 그게 온전히 내 힘은 아니었다.
천운.
그래, 하늘이 도와서 기회를 붙잡았을 뿐.
“난 사실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유정씨. 나보다도 저기 아이티데일리 한주협 선배가 진짜 대단하시지. 한 선배를 본받아봐.”
“헤헤 네. 그리고 진형 선배도 충분히 대단해요. 내는 기사마다 다 특종이었구. 바로 마이뉴스24로 들어가셨잖아요. 1년도 안 되서.”
유정은 내가 한 말을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낸 모양이다.
뭐 그래도 이렇게 칭찬해주니, 선배 된 입장에선 뿌듯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그래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대놓고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 김빠진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이 뒤로도 유정은 내게 취재나 매체, 내 개인적인 부분까지 이것저것 물어왔다.
“선배, 안 만나주는 업체 취재는 어떻게 해요?”
“계속 들이대야지.”
“선배, 마이뉴스24는 밥 맛있는 거 사줘요?”
“비슷해.”
“선배, 여자 친구 있어요?”
“아니.”
얘가 이렇게 수다스런 애였나.
디지털투모로우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유정은 상당히 수다스런 녀석이었다.
‘이거, 생각 정리도 하기 전에······도착 했군.’
사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난 이미지트레이닝을 할 계획이었다.
질소 누출 사고를 어떻게 막을지, 어떤 식으로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는 거다.
헌데 유정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다 보니 어느새 파주였다.
“자, 다 도착했습니다.”
LC디스플레이 파주공장 단지.
그 안에 들어서자 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단 공장단지의 거대한 규모가 일차적으로 놀라웠다.
그 다음으로 공장건물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일반적으로 공장하면 떠올리는 투박한 건물들 대신, 고층의 오피스텔들이 서있었던 까닭이다.
“대단하네, 여기.”
“진짜요. 와.”
나와 유정이 감탄하는 사이, 이한중 부장이 버스에서 먼저 내렸다.
버스를 하차하려는 기자들을 따라 우리도 좌석에서 일어났다.
“진짜 넓네요. 건물들도 크고.”
밖으로 나와 이한중 부장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하하. 이정도 규모가 돼야 셀부터 모듈까지 착착 진행하죠. 자, 그럼 오늘 견학할 P8라인으로 가볼까요?”
이한중 부장의 인솔에 따라 기자들이 이동했다.
난 점차 가까워지는 P8공장 건물을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드디어······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