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할까 말까 망설일 땐, 하는 거 171007 수정
‘LC디스플레이 소속 임원진인가?’
김영수 과장의 말을 들어보니, 감이 섰다.
LC디스플레이 로고가 적힌 검정색 작업복.
이 무리의 맨 앞에 선 50대 후반 남성이 ‘이 전무’라는 거다.
김 과장은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이 전무라 불린 남자가 손으로 제지한다.
“괜찮아, 괜찮아. 앉아있어요.”
‘이 사람이 LC디스플레이 전무라고?’
난 천천히 이 전무라 불린 남성을 훑었다.
시선을 느낀 그도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이 분은······?”
이 전무가 물었다.
LC디스플레이 직원복도 안 입었고.
그렇다고 환자의 가족도 아닌 듯 보이니 궁금했을 거다.
“아, 그 오늘 도와주신 주진형 기자입니다.”
전무의 물음에 김 과장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 말에 날 바라보는 임원진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아-아! 이 분이 그! 안녕하십니까. LC디스플레이 경영지원 이장수 전무입니다.”
이장수 전무가 손을 내민다.
난 천천히 그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마이뉴스24 주진형 기자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주진형 기자님! 오늘 이렇게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식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인자한 말투로 물어오는 이장수 전무에게, 난 고갤 끄덕였다.
“예. 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네요.”
“그것 참 다행입니다. 그래도 몸조리 잘하셔야죠. 조만간 저희가 정식으로 찾아뵙고 꼭 감사인사 드리겠습니다.”
이장수 전무가 아예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내게 고마움을 표하려는 모양새긴 한데 그리 달갑지 않다.
난 그 손을 밀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됩니다.”
“······네?”
“감사인사 보다는 이 사고의 확실한 진상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전무님.”
이런 내 말이 건방져 보였던 걸까.
“허어-”
“거 참······”
내 말에 뒤에 서있던 임원들이 술렁였다.
불쾌한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난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반면 이장수 전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물론 그래야죠. 기자님 말씀대로 철저히 진상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자님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나 말에는 날이 서있다.
외부자인 네가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장수 전무의 그 속내가 난 느껴졌다.
“그러길 바랍니다. 저도 이런 안 좋은 사고는 오래 회자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여러모로 말이죠.”
지금 중태에 빠진 두 피해자가 잘못된다면.
언론은 또 커다랗게 기사를 낼 테고, 여론은 들썩이겠지.
그런 상황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
LC디스플레이가 진상규명을 철저히 행하지 못할 경우.
날 비롯해 여러 기자들이 움직일 거다.
언론은 장기전에 능하다.
“하하.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도 주 기자님께서 이렇게 구출 나서주신 덕분에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 점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장수 전무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진상조사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괜히 그 부분을 더 캐지 않기로 하고 인사를 받았다.
“쑥스럽네요. 저 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함께 구한 겁니다.”
내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괜히 겸손을 떠는 게 아니다.
실제로 나뿐만 아니라 김영수 과장을 비롯해 두 명의 직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옆에 서있는 김 과장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회사 측에서도 그런 점을 잘 파악해 상벌을 뚜렷이 할 계획입니다.”
상벌인가.
쓰러진 사람들을 구해낸 직원들에겐 상을 줄 테고.
사고방지를 하지 못한 자들에겐 벌을 내린다는 거겠지.
‘근데 과연 이 벌이 어디까지 적용될까?’
난 그 범위가 말단직원에게만 국한되는 뻔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에 대해서 언급하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이장수 전무의 말을 계속 들어봤다.
“참, 저희 대표님께서도 주진형 기자님께 감사의 자리를 한 번 마련하고 싶어 하세요.”
“대표라고 하시면······”
내가 이장수 전무에게 물었다.
“LC디스플레이 한석범 대표님입니다.”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LC반도체에서 그룹생활을 처음 시작해 LC디스플레이 사장까지 올라온 인물.
며칠 전 각 회사 대표들을 검색해봤을 때, 그의 사진을 본 적 있다.
‘한석범 대표가 나를?’
다소 과하다 싶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쨌든 큰 인명사고가 될 뻔한 걸 내가 막아준 거니까.
그 쪽 입장에선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거겠지.
“일단 알겠습니다.”
난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한석범 대표로부터 얘길 들은 것도 아니고.
상세한 일정이 잡히지도 않았으니, 벌써부터 유난 떨 필요 없었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본 뒤에.
거절이나 수락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다.
‘아마 진상조사가 모두 끝난 후에. 그 때 날 부르겠지. 그래야 자기들도 면이 설 테니.’
난 조심스레 이들의 행보를 추측했다.
나와의 대화 후.
이장수 전무와 임원진들의 누워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가 몇 마디 덕담을 했다.
그리곤 사고피해 직원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했다.
‘위로금인가. 안주는 것보다야 낫지만.’
대응이 나쁘다 볼 순 없지만, 찝찝했다.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협력사 직원 가족들에겐 이런 위로금이 무슨 소용이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장수 전무와 임원들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곧 기자들의 큰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고원인은 파악하셨습니까?”
“사고피해 직원들에게 어떤 말씀 하셨습니까?”
“장비엔 문제가 없다고 브리핑하셨는데, 그럼 쓰러진 직원들이 장비조작을 잘못했던 겁니까?”
역시 기자들의 의문은 비슷한 모양이다.
기자들이 거침없이 이장수 전무에게 던진 질문들은 나 또한 알고 싶던 내용이다.
난 다시 김영수 과장에게 말을 걸었다.
“김 과장님. 아까 제가 여쭤보던 것 말인데요.”
“네?”
질문내용을 까먹었는지, 김 과장이 내게 잘 모르겠단 표정을 보였다.
“챔버 안에 있던 두 사람. 협력업체 직원이라면서요? 왜 협력사 직원들이 거기에 있었던 거죠?”
그제야 김영수 과장이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아아, 그건 말이죠. 그 TM3설비가 협력업체 거라서 그렇습니다. 장비 유지보수만 협력사에서 담당하고 있거든요. 라바코라는 곳입니다.”
“라바코요?”
아직 LC디스플레이의 협력사를 모두 알아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시 생소했다.
하긴, 그 많은 협력 업체들을 벌써 다 파악한다는 건 무리지.
이제 디스플레이를 전담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상태니까.
“네. 그리고 저기 누워있는 저 분 있죠. 저 분도 코나벡이라는 협력업체 직원입니다.”
“코나벡이요?”
“네. 라바코의 협력사인데. 저희하고는 직접적으로 계약된 곳은 아닙니다만, 협력사의 협력사. 그래서 같이 점검을 왔던 겁니다.”
그러니까 챔버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은 모두 협력 업체 직원.
바닥의 두 명은 LC디스플레이 정 직원이다.
‘······? 뭔가 이상한데.’
난 고갤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보통 협력업체 직원들이 정비할 때, LC디스플레이 직원 분들도 함께 합니까?”
“네. 그렇죠. 안전 감독관 한명이 작업 과정을 보면서 감독을 해야 합니다······ 아!”
내 의문을 깨달은 걸까.
김영수 과장이 입을 벌리며 탄식하는 소릴 냈다.
“아······ 기자님.”
“말씀하세요, 과장님.”
김 과장은 난감한 얼굴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걸 제가 말씀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할까 말까 망설일 땐,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난 김 과장을 재촉했다.
“사실 그 장비 아래에 쓰러져있던 직원들은, 안전 감독관이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 사실을 눈치 챈 건, 클린룸 밖에 서있던 직원 둘 덕분이다.
-일단 저 아래 두 사람은 이제 2-3분 정도 됐어요!
클린룸 바닥에 쓰러져있던 직원들이 룸 내부로 출입한 시간.
그것만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는 분명 이전까지 동행했거나, 룸에 들어가기 직전 서로 만났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만일 안전 감독관이 현장에 있었다면, 챔버 속에 사람이 둘 더 있단 사실을 몰랐을 리 없지. 감독관이 아니라 내부 순찰조가 아닐까.’
어차피 저 둘이 깨어나면 자연스레 밝혀질 일이다.
지금은 두통과 메스꺼움 때문에 자고 있지만, 깨어나 인터뷰만 하면 바로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
“······저희 측 잘못입니다.”
김영수 과장이 고갤 푹 숙였다.
“그거 말고도 한 가지 더 있죠.”
“네? 그, 그렇습니까?”
“아까 전에 과장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질소가 다 방출되지 않은 걸 파악 못하고, 장비점검에 들어간 것 같다고.”
“네 그랬습니다.”
“헌데 장비 점검 전 질소가 방출 돼야 하는데, 안됐다. 그런데 이를 협력사 직원들은 몰랐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비 제조사가 그 협력사라면서요?”
“아······”
김영수 과장이 얕은 신음을 냈다.
협력사 직원들은 ‘자신들이 만든 설비’를 점검하기 위해 P8 공장에 출입한 거다.
이들이 TM설비에 질소가 들어간단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중간에 뭔가 빠진 게 있다는 얘기인데. 질소 농도를 외부에서 파악을 못하게 돼있습니까?”
“아니요. 측정기계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근데 왜 직원들은 그냥 돌입한거죠?”
난 계속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건······ 아마 저희 쪽에서 TM설비의 가동을 관리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말씀은, 협력사가 아닌 LC디스플레이 측이 설비의 질소를 빼야한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네······”
김 과장으로선 난감한 일이겠지.
사건의 전후를 밝힐수록 회사의 잘못이 계속 밝혀지는 꼴이니까.
차마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를 잇지 못하는 김 과장 대신.
내가 진실을 꺼냈다.
“그럼 질소배출을 했는데도 클린룸 내부에 질소농도가 높았던 건, 해당 관리부서의 실수일 가능성이 크단 말씀이군요.”
“······그럴, 겁니다. 저희 쪽 직원이 판단하고 점검인원을 들여보내게 돼 있으니까요.”
내 추측에 대해 김영수 과장이 어렵사리 긍정했다.
이건 LC디스플레이 안전관리 부서 전체의 위기를 불러올 큰 실수다.
설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직원, 그리고 직속상사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란 거다.
‘이게 밝혀지면 임원진 중 누군가도 자리보전하기 힘들겠군.’
정상적인 회사라면 말이지.
“일단 알겠습니다. 과장님. 이 일은 회사에 제대로 보고해주십시오. 진상조사가 확실히 될 수 있도록. 물론 저도 기사를 준비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난 웬만하면 LC디스플레이가 직접 이 사실을 밝히길 바랐다.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고, 잘잘못은 저지른 자들이 직접 푸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네, 기자님도. 가서 좀 쉬세요.”
영수 과장을 비롯해 다른 직원들이 내게 인사했다.
난 병실 문을 열고 빠끔히 밖을 훔쳐봤다.
이장수 전무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직도 복도 중앙에서 길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 조사 끝난 다음에 발표하겠습니다. 좀 비켜주세요.”
임원들이 열심히 몸으로 막아섰지만, 큰 소용은 없는 형국.
난 내게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쉽게 내가 있던 병실로 들어가려던 찰나.
“주진형 기자.”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걸린 건가 싶은 맘에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어, 강현아 선배- 시군요.”
다행히 면식이 있는 JDBC 강현아 선배였다.
“몸은 어때, 괜찮아?”
강 선배의 따듯한 질문에 눈물이라도 날 뻔했다.
“아까 보셨잖아요. 이제 말짱합니다. 걱정해주실 거면 질문하기 전에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감정 섞어 대답하자, 강현아 선배가 재밌어하며 웃었다.
“하하하. 삐쳤어? 그 상황에 나만 안부 묻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합시다. 그래서 아까도 궁금하긴 했는데. 선배 디스플레이를 맡으신 겁니까?”
방송국 기자들의 업무 분담에 대해 알진 못하지만.
산업전문 기자를 기준으로 보자면, 디스플레이와 인터넷 분야는 간극이 크다.
나처럼 매체를 옮긴 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달라질 리가 없단 소리다.
“맡았다기보다. IT산업 담당 기자가 나 혼자야. 그나마도 다른 산업부에 일터지면 거기도 나가야 되고. 우린 그래.”
“그렇습니까. 바쁘시겠습니다.”
“바쁘지 않더라도 바쁘게 일을 만들어 내야지. 그게 우리 일이니까.”
동감하는 바였다.
특별히 큰 사건이 없다면, 뭐라도 만들어 내는 게 기자다.
그러기 위해서 발제기사를 계획하고, 취재하는 거니까.
“암튼. 주 기자 이름 보고 나도 깜짝 놀랐어. 마이뉴스24 갔단 건, 들었는데. 갑자기 디스플레이에서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이런 대형 사고를 치다니.”
“제가 친 사고가 아닙니다만.”
내가 무표정하게 강 선배의 말을 정정했다.
“그렇긴 하지만. 뉘앙스 다른 거 알지?”
“그래서. 무슨 할 말이 더 남으셨던 겁니까?”
난 병실 문고리를 붙잡고 강현아 선배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이 복도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강 선배만 날 놔준다면 말이지.
“딱히 길게 할 말이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얘기하고 싶었어.”
“그럼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언제 또 선배들한테 둘러싸일지 몰라서요.”
내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혹시 나중에 인터뷰 가능해?”
강 선배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짧은 머리칼과 이 강렬한 눈매는 참 잘 어울린다.
도발적이고, 다부진 면모가 엿보였다.
“저 말입니까?”
난 일부러 강현아 선배에게 반문했다.
“여기 주 기자 말고 다른 사람 없잖아.”
뻔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강 선배가 입 꼬릴 올렸다.
하는 수 없이 대답해준다.
“아까 다 같이 계실 때 말씀 드린 게 전부입니다. 더 말할 건 없을 듯싶은데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따로 준비해야할 기사가 있다.
다른 언론사에 협력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거지.
헌데 강현아 선배의 표정이 내 예상과 달랐다.
‘뭐지 이 귀여워하는 불쾌한 웃음은?’
강 선배가 다시 묻는다.
“아~하하. 그런 인터뷰 말고. 게스트로 JDBC 뉴스룸에 출연해볼 생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