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모든 죄는 약자들이 짊어졌다 171007 수정
“JDBC 뉴스 룸을, 게스트로 말입니까?”
강현아 선배의 제안은, 내가 상정했던 범위 외였다.
영상 인터뷰 정도겠지 싶었는데.
영상은 영상이나 그 수준이 남달랐다.
“응. 알고 있지? 우리 목요일 마다 게스트 부르는 거. 어쩜 그게 딱 내일이네?”
“가끔씩 게스트가 나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목요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당장 내일이면, 기존에 섭외해둔 사람은 없는 겁니까?”
뉴스룸 출연에 대해 관심이 들었다기보다, 너무 급히 섭외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만약 정말 사람이 없어서 날 부르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이미 섭외된 사람이 있는 데에 날 꽂는 거라면 무조건 사양이다.
“음. 있었지. 근데 질소 노출 사고 터지면서 나오기가 애매해졌어. 가수인데 이 시기에 신곡 홍보하러 나오기가 좀 그렇잖아? 그래서 한 주 미뤄졌지.”
그럼 내가 대타가 되는 건가.
뭐 남의 차례 대신 나가는 정도로 기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딱히 나가야할 만한 이유가, 내게 보이질 않았다.
“잘 모르겠네요. 제가 굳이 뉴스룸에 나갈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내 말에 강현아 선배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난 번 윤태현 사건 때도 느꼈지만, 참 매체노출을 꺼리는 스타일이네. 기자로서 대외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구? 지금 주 기자를 향한 여론의 관심이 최대치야. 여기서 좋은 장면 보여준다고 해될 건 없지.”
‘대외적인 명성이라······’
글쎄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당장 뉴스룸에 출연해 인기를 끌 필요가 있을까.
물론 난 업계에서 인정받는 기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는 좋은 취재와 좋은 기사 뿐.
TV방송에 얼굴을 내비친다고 해서 훌륭한 기자가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지금 난 완벽하게 사람들을 구해낸 것도 아니다.
뭘 자랑하려고 그 자리에 선단 말인가.
“지금 당장은.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으음. 그래?”
“제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습니다.”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꼬투리 잡힐 게 뻔해서 굳이 꺼내지 않았다.
“우와, 너무하네. 그래도 싫진 않아. 딱히 이런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곳에 나가도 어차피 아까전과 동일한 얘기만 하게 될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일단 오늘 하루쯤은 생각해봐.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뭐, 알겠습니다. ······아참, 혹시 아까 전에 저한테 이상한 질문한 선배가 누군지 아십니까?”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문득 떠오른 인물에 대해 확인해보기로 했다.
“이상한 질문······? 아, 혹시 7분 뒤에 와서 안전할 줄 알았냐 이 질문?”
“네, 맞습니다.”
“하하하. 그 선배 머니데이 문강홍이잖아. 한동안 기사 못 내서 인터넷에서 디스플레이로 밀린 모양이던데. 주 기자한테 무슨 악감정 있나봐. 왜 주 기자는 인터넷에서 잘나갔었잖아.”
“머니데이······아, 아아.”
기억났다.
이제 거의 세달 전쯤이지.
유메프 채용갑질 사건 때, 내게 취재원 공유를 요구했던 남자였다.
‘그래서 그렇게 날이 서있던 거군.’
납득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죠.”
이 말을 끝으로.
난 드디어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주진형.”
문틈이 살짝 열리던 순간,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네?”
내가 고갤 뒤로 돌리자.
거기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있었다.
“김예인?”
이디넷코리아 김예인 기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옆에 서있던 강현아 선배가 우리 둘을 번갈아봤다.
꽤나 호기심 어린 눈이다.
“멀쩡하네.”
정말 간만에 듣는 저 무감정한 말투.
난 피식 웃음이 났다.
“병문안 온 거야? 아니면 취재하러 온 거야?”
예인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배 음료상자를 내게 보여줬다.
병문안을 왔다는 무언의 대답이다.
“누구······?”
결국 조용히 있던 강현아 선배가 내게 물었다.
“아, 이디넷코리아 김예인 기자에요.”
내 설명에 강 선배의 얼굴은 다소 밝아졌다.
“아~ 그렇구나. 반가워요. JDBC 강현아 기자에요.”
예인은 여전히 말없이 강 선배에게 목례했다.
“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고, 그냥 단순히 동료?”
강현아 선배가 내 팔뚝을 콕콕 찌르며 떠본다.
“그렇고 그런 사이가 뭡니까. 그냥 동료 맞습니다.”
“헤에······그래?”
강 선배는 대충 납득하는 모양새다.
헌데 예인은 맘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여자 친구.”
“뭐, 뭐?”
훅 치고 들어오는 예인의 말에 내가 당황했다.
“뭐어?”
“전혀 아닙니다. 선배. 여자 사람 친구입니다.”
내가 사람을 힘주어 발음했다.
여자 친구라고 하면 마치 연인사이처럼 들리지 않는가.
저거 자신의 아버지한테도 오해 살 짓 하더니.
이젠 처음 보는 선배한테까지 장난질이다.
“아, 여자 사람, 친구?”
이해했다는 듯, 강현아 선배가 고갤 천천히 흔들었다.
곧 두 여성의 시선이 부딪힌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싸늘했다.
“흐응, 좋아. 난 볼일 끝났으니까 그만 가볼게. 주 기자는 여사친씨랑 잘 대화하고.”
“네. 들어가세요.”
강 선배가 떠나고.
난 예인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어, 누구? 진형이 여자친구?”
우릴 발견한 엄마는 수줍게 웃으며 예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아뇨. 기자 친구에요. 우리 어머니이셔.”
난 재빨리 예인을 소개했다.
묘한 오해를 받는 건 질색이다.
“그러니. 아유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이런 것도 사올 필요 없는데! 참 예쁘네.”
엄마가 예인이 건네는 음료선물을 받아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배가 기관지에 좋다고 해서 사왔어요.”
“어머나. 마음씨도 참 좋네.”
예인은 웬일로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표정도 복도에서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고.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라 해서 이렇게 태도를 바꿨을 린 없다.
그간 내가 봐온 예인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괜히 이상하게 여길 필욘 없겠지.’
난 병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인에게도 바로 옆 침대에 앉으라고 권했다.
서로 마주본 채로, 우린 대화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더니.”
뭐, 연락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실제로 우리 둘은 근 한 달 넘게 접촉한 일이 없었다.
디지털투모로우 퇴사 전에도, 내가 통신 분야를 전담하게 되면서 만날 기회가 줄었고.
이해는 한다.
기자 일이라는 게 워낙 일상생활과 업무시간의 분리가 안 되다 보니.
물리적 거리가 생기면 이걸 극복하기 쉽지 않다.
“죽을 뻔 했다며.”
예인은 다시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그래. 죽을 뻔? 하긴 했지.”
“백 선배가 몸조심하래.”
백 선배라 함은, 이디넷코리아 백봉사 선배를 뜻하는 것일 터.
“아, 감사하다고 전해줘. 나중에 찾아뵙겠다고도.”
“그럴게. 근데 왜 디스플레일 맡았어? 통신이나 인터넷으로 올 거라 생각했는데.”
“어. 회사사정. 3달 후에 통신 쪽으로 옮겨준다는데. 모르지. 어떻게 될지는.”
“빨리 와.”
“응?”
뜬금없이 아련한 예인의 요구에, 난 당황했다.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대화전개다.
“인터넷이든 통신이든. 광화문으로 빨리 돌아오라고.”
“······그거 신종 쾌유의 기원이야?”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만한 기자가 없으니까, 나도 의욕이 잘 안 생겨.”
“그거 선배들이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네.”
“사실이야.”
예인은 자기 말에 참 당당한 사람이다.
언행일치를 잘한다는 점에선, 존경할 만하다.
“뭐 노력해볼게. 내 마음대로 될 일은 아니지만. 나도 통신이나 인터넷이 제일 재밌으니까.”
“그래.”
예인은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금방 자리서 일어났다.
“정말 내 인터뷰 따러 온건 아니었구나?”
“이 병원에 송영주 선배 있어. 그 선배가 이디넷 디스플레이 담당이야.”
정말 병문안만을 위해서 올 줄은 몰랐는데.
뭔가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멀리 배웅은 안할게. 잘 돌아가.”
“응.”
우린 짧은 작별인사를 나눴다.
예인이 떠난 이후.
김정효 선배와 영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 사람 모두 내 건강상태와 근황을 물었다.
김 선배는 그나마 담담했지만, 영기는 통화하는 내내 울먹이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선배, 진짜 그렇게 목숨 위험하게 사시면 안돼요. 유정이한테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어······어 영기씨. 미안하네, 그거.”
내가 왜 사과를 하고 있는 거지?
어쨌든 두 사람과의 애정과 관심이 담긴 통화를 끝내고.
[주 기자님! 괜찮으신 겁니까? -장도현]
문자메시지를 보내준 장도현 과장에게도 괜찮다고 답장했다.
[[르포]LC디스플레이 질소누출...1초가 긴박했다]
이후, 난 침대에 누운 채 노트북으로 기사를 써나갔다.
본래 쓰려했던 LC디스플레이 파주공장 견학 기사 대신.
직접 경험한 사고내용을 르포기사로 쓰기로 한 거다.
난 간단히 공장에 견학을 가게 된 계기부터, 그 과정까지 서술한 후.
오늘 12시에 있었던 일을 적었다.
[오후 12시 30분 경. 난 LC디스플레이 종합공정팀 김영수 과장과 P8공장의 9층으로 향했다]
그 다음 내용을 적어 가던 도중.
병실 문이 열렸다.
마이뉴스24 김경은 국장과 박선혜 팀장이었다.
“국장! 팀장도 오셨습니까.”
“괜찮아요? 주 기자.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그러게. 진짜 깜짝 놀랐어.”
박호창 대표가 미리 말해줬듯, 다행히 김 국장과 박 팀장은 화가 나있진 않아보였다.
박 팀장은 쌀음료가 든 음료선물세트를 부모님께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진형이와 같은 부서의 팀장입니다.”
“아유, 감사해요. 이렇게 다 와주시고.”
“당연히 와봐야죠. 주 기자가 저희한테 어떤 인재인데요. 하하.”
잠시 낯간지러운 대화가 오가고.
김경은 국장은 큰 일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과, 며칠 푹 쉬어도 좋다는 말을 해줬다.
“그 때 속보 메시지 보낸 거 보고 놀랐어요. 전활 걸었는데 주 기자는 안 받고. 사태는 급박해보여서 안낼 수도 없고. 그래도 주 기자 믿고서 냈죠. 그 믿음, 충분한 가치가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도 너무 경황이 없어서······”
내가 김 국장과 박선혜 팀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할 거 뭐 있어. 다 이해해. 아니 오히려 대단하지. 그 순간에도 기사 낼 정신이 있었다는 게. 후후.”
박선혜 팀장은 도리어 날 칭찬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몸조리 잘하고. 사고 기사 르포로 쓰고 있다고? 한동안 이 사고가 이슈몰일 할테니. 천천히 내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러니 무리 하지 마. 국장, 괜찮으시죠?”
“그럼요. 주 기자 건강이 먼저에요. 건강해지고 나서 봐요.”
뭐, 이미 충분히 건강은 회복했는데.
배려를 해주겠다니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음 날 오후.
난 퇴원 수속을 밟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질소가스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쉰다고 문제될 건 없었지만, 이 이상 누워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움직여야 할 때가 됐어. 지체할 수 없겠다.’
병원 1층 로비.
난 대기석에 앉아, 다른 환자들과 거치된 TV속 뉴스를 지켜봤다.
화면에는 LC디스플레이 이장수 전무가, 뭔가 발표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다.
[사고는 당일 오후 12시 40분 경 이전에 발견됐고, 소방대가 5분 만에 출동해 상황종료 됐습니다······]
질소 누출 사고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였다.
헌데 소방대 출동이 5분이라니.
저거 시간을 너무 줄여놓은 거 아닌가.
게다가 사고 발생 시각을 특정하지 못해 애매한 발견시간을 공표하고.
‘저래서 내가 12시 40분에 사고가 터지는 줄 알았던 거라고.’
난 갑갑한 마음으로 방송을 지켜봤다.
[이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장비의 결함이나 불량 문제는 아니었으며, 장비점검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걸 파악했습니다]
‘과연 제대로 파악된 걸까.’
방송을 보며 드는 슬픈 예감.
그리고, 설마 정말 그렇게 되겠느냐는 희망이 엉켰다.
난, 주의 깊게 이 전무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말을 이어나간다.
[당시 장비를 점검하러 간 협력사 직원들이 본사 규정을 어기고, 장비 내 질소를 제대로 배출하지 않은 상태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열려있던 질소밸브 잠금장치 확인과 산소측정기 사용 절차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질소농도가 빠르게 높아져 호흡한 협력사 직원들이 호흡곤란과 질식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아아.
슬픈 예감이 들어맞았다.
모든 죄는 약자들이 짊어졌다.
[결국 장비를 유지 보수하던 인원의 실수로 빚어진 사고였습니다]
쐐기를 박듯 이장수 전무가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