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명예 LC디스플레이인이요?
뉴스룸 방송이 모두 마무리 된 후.
방송 관계자들 몇 명이 데스크에 앉아있던 내게 다가왔다.
“주진형 기자님! 저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 여기 사인 해주세요! 팬이에요!”
“기자님 진짜 응원할게요!”
보통 이런 광경은 유명 연예인이 출연했을 때에나 접할 수 있는 일 아니던가.
난 얼떨떨한 감정으로 그들의 요청대로 사인을 해줬다.
“과연 미친 탈곡기라 불리는 기자답군요.”
마지막으로 서있던 여성 스태프에게 사인한 종이를 건네는 순간.
지켜보고 있던 손정희 사장도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런 얘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저놈의 미친 탈곡기는 도대체 언제쯤 내게서 떨어져 나갈 런지.
난 머쓱해하며 손 사장에게 답했다.
“몇 달 전에 나왔던 얘기죠? 그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팬이었던 사람에게 듣는 말같다.
물론 손 사장은 내 팬도 아닐 테고, 그런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다.
단순한 사실, 그 자체를 읊조렸을 뿐.
‘하긴, 고글이나 KMR에 대한 뉴스는 JDBC에서도 다룰 법한 규모지.’
KMR의 탈 고글 기사를 기점으로 별명이 생겼으니.
충분히 손정희 사장이 내 별명에 대해서 알만하다.
“강현아 기자 통해서 주진형 기자에 대해 여러 번 들었습니다.”
‘아, 그쪽인가.’
강현아 선배가 나에 대한 정보보고를 손 사장에게 올렸던 모양이다.
“주 기자와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확실히 대단해요.”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날 크게 칭찬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난 손정희 사장에게 고갤 꾸벅하며 감사를 표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난 손 사장의 질문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인터뷰 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우선은 LC디스플레이의 반응을 기다릴 겁니다. 그쪽에서 빠르게 잘못만 인정해준다면 길게 갈 필욘 없겠죠. 유가족 분들이나 저도 그걸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준비 중인 후속기사를 내놔야겠죠.”
“그렇습니까. 준비를 철저히 했군요.”
사실, ‘철저히’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한 수준이다.
감정에 휩싸여서 몇 시간 만에 해치워낸 일들이니까.
난 굳이 세세한 이야긴 꺼내지 않고,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영리한 기자인 줄 알았다면, 이직제의를 해둘 걸 그랬네요.”
손정희 사장으로선, 스쳐가듯 내뱉은 말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엔 파문이 일었다.
이건 JDBC를 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마이뉴스24가 내게 제시했던 조건 이상을 충족할 매체는 없다.
다만, 손정희 사장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그 사실이 기쁜 거다.
‘지금의 JDBC 만든 사람이자, 대중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이 날 놓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손정희 사장의 기자 경력은 길지 않지만, 언론인으로서 산 햇수는 내 나이보다 많다.
게다가 종합편성채널 출범 후 줄곧 빌빌대던 JDBC의 보도국을, 국내 뉴스 시청률 및 언론 신뢰도 1위로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손 사장의 언론인으로서의 역량과 영향력은 뛰어났다.
“사장님이 이직 제의를 하셨다면 정말 고민 많이 했을 것 같네요.”
난 태연하게 손정희 사장에게 대답했다.
이를 들은 손 사장이 픽 웃었다.
“그래도 무조건 온다는 얘긴 안하는 군요.”
“마이뉴스24의 조건이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잘 된 일이죠. 지금 마이뉴스24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낸 걸지도 모르니까.”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이뉴스24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디스플레이 분야를 맡고 있을 리가 없지.
이전처럼 통신이나 인터넷 분야를 취재하면 편하게 지내고 있었을 거다.
“난 언론을 이렇게 생각해요.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
손정희 사장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아까 말하는 걸 보니 주진형 기자와 제 생각이 상통하더군요. 앞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손 사장의 응원은, 내가 틀리지 않게 나아가고 있단 걸 알려주는 증명서 같았다.
난 그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난 JDBC사옥을 나왔다.
상암동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난 좌석에 앉아 휴대전화로 도착한 메시지들을 읽었다.
[김경은 : 주 기자 인터뷰 잘 봤어요. 르포도 쓰느라 고생했어요. 잘 들어가요]
[박선혜 : 뉴스룸 인터뷰 멋졌어. 기산 순조롭다. 오늘은 푹 쉬어]
김경은 국장과 박선혜 팀장의 각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이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TV출연을 축하해줬다.
특히 ‘디지털투모로우 탈출’코코아톡 방도 수십 개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러나 난 모든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인터넷에 접속했다.
출고된 내 기사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르포]LC디스플레이 질소누출...1초가 긴박했다 - 마이뉴스24 주진형 기자]
마이뉴스24 사이트 메인에 걸린 내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사고당일 아침, 파주로 가는 버스부터 이야길 시작한다.
공장 견학까지는 간단히 서술 돼있고, 뒤에 바로 사고를 목격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난 LC디스플레이 직원이 들고 있던 출입키를 빼앗아 설비 실 출입문을 열었다······]
구출 과정은 다른 내용보다 상세하게 그렸다.
그게 이 르포 기사를 읽으러 올 독자들이 원하는 부분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마지막 네다섯 번 째 사람까지.
독자들이 궁금해 할 내용이 끝나면, 소제목을 넣어 화제를 바꾼다.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사고······ LC의 안일함이 터트렸다]
사고 발생 원인에 대해서 적기 위함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LC디스플레이가 주장한 거짓증거들을 파훼하는 게 목적.
뉴스룸에 출연해 입 밖으로 꺼냈던 내용이 더 상세하게 적혀있다.
[사고가 난 LC디스플레이 파주 P8공장엔 산소호흡기도, 산소농도측정기도 근처에 준비돼 있지 않았다]
[사고로 고인이 된 협력사 직원 문씨의 유가족은 “문제가 된 설비는 LC디스플레이가 가동을 멈추고 질소를 배출 한 뒤, 정상상태를 확인하고 점검을 하는 것”이라며 “질소 밸브를 확인하는 것도 LC디스플레이 측 업무인데 이를 자신들이 생략해놓고 협력사 직원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내가 뉴스룸에 출연해 했던 말들도 물론 담겨져 있다.
‘생각보다 괜찮네.’
보통 여러 번 퇴고한 기사라도, 출고한 뒤 다시 보면 아쉬운 부분이 뒤늦게 드러나곤 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웹으로 보니 아쉬움보다 만족감이 더 크게 들었다.
일단 르포 기사라 쉽게 읽히는 점이 컸다.
단순히 내가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장 취재의 장점을 살려 생동감 있게 쓴 덕분일 거다.
소제목으로 나뉜 후반부 논리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다가 JDBC효과까지 받았다면 꽤 많은 사람을 봤을 거라 생각해도 되겠지.’
기대감을 갖고 마이뉴스24 온라인기사 작성기에 로그인했다.
기사 목록을 열고 내 기사의 조회 수를 확인한다.
[조회수 4,214,265]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수치를 세 본다.
사백, 이십일만······사천이백육십오.
기사가 출고 된지 이제 1시간이 조금 넘은 시점.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수치가 내 앞에 새겨져 있었다.
‘420만 명이······넘게 내 기사를 읽었다고? 그것도 1시간 만에?’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만 명만 읽어도 특종이었던 디지털투모로우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숫자였다.
기사는 내 기대를 지나치도록 흥행에 성공했다.
‘JDBC 뉴스룸 출연 효과인가? 아니면······’
혹시나 싶어, 포털 사이트들을 확인해본다.
그러자 모바일 페이지 메인에 내 기사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여론 노출도로 치자면 JDBC 뉴스룸보다 여기가 한수 위다.
‘메이버 메인까지 걸리는 게,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내 생각보다 효과가 더 컸어.’
분명 긍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애처럼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기사가 나오기까지 고통을 짊어진 사람들의 피가 서려 있으니까.
난 그들을 위해 이 기사를 썼다.
‘이건 어디까지나 거짓을 고한 LC디스플레이를 압박하는 창일 뿐.’
내겐 다른 기자들이 얼마나 함께 창을 들어주는지가 중요했다.
메이버에서 질소 누출 키워드로 기사를 검색했다.
곧 나온 기사 검색 결과에 내가 원했던 답들이 적혀있었다.
[LC디스플레이 질소누출 “협력사 탓 아니다”-아이티데일리 한주엽 기자]
[질소누출 진상조사 “잘못됐다” 유가족 분노 -이디넷 송영주 기자]
[질소누출 영웅 주진형 “잘못은 LC디스플레이가”-디지털투모로우 이유정 기자]
[주진형 “질소누출은 LC디스플레이 잘못” -이뉴스 김기문 기자]
[······]
많은 기자들이 나와 뜻을 같이 했다.
물론 단순히 받아쓰기 한 자들도 있겠지만, 중요치 않다.
언론과 여론이 정도로 움직였다면, LC디스플레이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이르면 내일 입장발표를 다시 하지 않을까.
[LC디스플레이 이한중 부장]
그 때, 내 예상을 보란 듯이 뛰어넘고.
LC디스플레이 이한중 부장이 내게 연락해왔다.
난 휴대전화 화면에 뜬 그의 이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장에게 악감정은 없다.
다만 이 통화 후에도 좋은 감정이 유지되길 바랄 뿐.
“네, 이 부장님. 주진형입니다.”
-아······기자님. 지금 통화가능하세요?
“네. 말씀하세요.”
내 담담한 말투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오늘 인터뷰 나오신 거 잘 봤습니다.”
이윽고 이한중 부장이 JDBC뉴스룸 출연에 관해 입을 열었다.
“보셨습니까.”
LC디스플레이 홍보팀 부장이다.
자신의 회사에 대해 논하는데 안 보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그렇지만 나 또한 이 부장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침착하게 생각하며 말을 꺼내기로 했다.
-네. 기자님 카메라 잘 받으시던데요? 하하. 얼굴이 더 멋지게 나와서 놀랐습니다.
내 경계심을 풀기 위함인지, 이한중 부장이 농담을 건넨다.
난 한쪽 입 꼬릴 올리면서도 그가 이어 말할 내용에 대비한다.
“말씀 감사합니다.”
-방송 보고서 저희 이장수 전무님이 생각이 좀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들어볼까.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이한중 부장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저······ 주 기자님. 다음 주에 저희 LC디스플레이에서 ‘명예 LC디스플레이인’ 상을 기자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뭡니까.”
거칠게 달리는 지하철의 굉음 때문이 아니었다.
난 말소린 정확하게 알아들었지만, 저 ‘명예 LC디스플레이인’ 상이 도대체 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저희 직원은 아니지만, 회사에 큰 공헌하신 분들께 드리는 상입니다. 하하.
회사 내부직원이 아닌, 외부인에게 주기 때문에 명예 LC디스플레이인.
납득했다.
하지만, 내가 그걸 뭐 하러 받는단 말인가.
“이 부장님. 명예 LC디스플레이인이요? 제가 그걸 받아서 뭐합니까.”
내 물음의 의도와 달리, 이한중 부장은 수상시의 이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뭐 기자님이 저희 회사 직원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이 상을 받으신 분껜 매년 저희가 좋은 제품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제품이요?”
-네. 저희 그룹사 시그니처 TV라든가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이죠.
LC전자의 시그니처TV를 말하는 모양이다.
시그니처TV는 일종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당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격도 보통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만.
내겐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얘기였다.
“부장님. 그런 상은 사실 기자 된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은데. 그런 것 보다 다른 걸 좀 주셨으면 하는데요.”
난 이한중 부장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어, 어떤 게 좋으신지 말씀 해주시면······일단 상부에 물어 보겠습니다.
이한중 부장은 당황했으나 곧 노련하게 대처했다.
수 천만 원짜리 TV를 준다는데도 마다한 거다.
아마 이 부장은 내가 할 요구가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긴장하고 있겠지.
허나 내 요구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내일 아침. 진상조사 결과 발표 정정하시고, 사과문 내주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