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0화 (1/168)

[0. 원점으로.]

이번에도 죽음을 피하긴 그른 것 같다.

“잘 가라.”

체념한 채 눈을 감자, 심장에 검이 꽂혔다.

[죽음의 경계로 이동합니다.]

***

붉은 눈의 사내에게 죽임을 당한 게 벌써 천 번째.

이것으로 결론 났다.

무슨 수를 써도 나로선 저 자식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겠지. 아무리 인간의 몸에 강림했을지라도, 초월자는 초월자. 한낱 인간이 상대하기엔 벅찰 수밖에.」

“깜짝이야!”

언제나처럼 내 생각을 멋대로 읽으며 등장한 ‘죽음의 경계’ 주인. 덕분에 난 보기 좋게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나올 거면 인기척이라도 보이라고!”

「자네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군. 초월자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인간은 자네밖에 없을 거네. 그나저나 이번 귀환에서도 429, 514, 515, 821번째 죽음을 겪었을 때와 같은 실수를 범했더군.」

“굳이 그렇게 자세히 언급할 필욘 없잖아.”

「그러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를 해보지. 다음 귀환 때는 어떻게 할 거지? 이번에야말로 죽음을 피할 방법이 떠올랐나?」

“한낱 인간이 초월자를 상대하긴 벅차다며.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하나뿐?」

“내가 제물이 될 테니까 그쪽이 나한테 강림해. 초월자 상대는 초월자가 해야지. 안 그래?”

「자네 지금 뭐라 그랬나?」

큰맘 먹고 한 말에 초월자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강림? 초월자 따윈 혐오스럽다며 도움받지 않겠다더니, 인제 와서 이 몸 보고 자네에게 강림하라고?」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지 알아? 남은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제안은 고맙다만, 안타깝게도 이 몸은 자네에게 강림할 수 없다네.」

“뭐?”

「이 몸은 여기 ‘죽음의 경계’에 봉인 당한 상태. 봉인이 해제되기 전까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네.」

“지금껏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말하는데!”

「그야 자네가 초월자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설치지 않았나.」

“제길. 그럼 그 망할 봉인은 어떻게 풀 수 있지?”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네.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려면 네 개의 신기가 필요한데, 자네가 정해진 시점으로 귀환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모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초월자 말이 맞긴 하다.

‘죽음의 경계’에서 벗어나 귀환하는 순간, 내 눈앞에는 다시 그 붉은 눈의 사내가 있을 테니.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네.」

“방법?”

「자네가 ‘멸망 이전의 과거’로 가서 ‘허영의 사내’가 강림하기 전에 네 개의 신기를 모아 이곳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지.」

“멸망 이전의 과거? 설마 지금 시련이 시작되기 전으로 가라는 말이야? 그게 가능키나 해?”

「이 몸의 초월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단, 제약이 있네. 이 몸이 직접 시간의 축을 움직이게 되면 인과율이 반발할 걸세. 그 말인즉슨 멸망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한 자네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게 된다는 거지.」

“과거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상관없어. 없어진 기억은 그쪽이 나한테 알려주면 되는 거 아냐?”

「이 몸이 기억을 알려줘봤자, 인과율이 다시 개입해 자네에게 있어선 안 되는 기억을 모두 지울 거네.」

“기억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무엇보다 지금과 같이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 몸은 봉인을 만든 초월자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어. 이 몸이 자네를 도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눈치챈 순간, 그들은 자네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거네.」

“그럼 과거로 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그야 이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지. 지루함을 달래기에 자네의 발버둥만큼 좋은 여흥 거리는 또 없거든. 자네를 과거로 보낸다면 세상을 구한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좀 더 지켜볼 수 있지 않겠나?」

이 초월자가 정말 미쳤나 싶지만 내게 선택지는 없는 듯하다.

“어쩔 수 없네. 기회라도 주어지는 게 어디야. 그럼 그렇게 해보자고.”

「좋은 생각일세. 그리고 혹시 아나? 자네가 이번엔 그녀를 살릴 수 있을지?」

“썩을 놈! 굳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그럼 다음에 보자고. 참!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으니, 이 몸 대신 자네를 도우라고 우리의 오랜 친구에게 부탁해두긴 하겠네.」

“오랜 친구라면 내게 쓸데없는 직업을 준? 그 초월자는 시련 내내 방해만 됐는데, 무슨 도움을 준다고!”

「시끄럽긴.」

[‘이름 없는 자’님이 시간의 축을 되감습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지정한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되감은 시간 동안 생성된 기억이 모두 지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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