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산지옥 (1)]
첫 번째 시련.
‘진광대왕의 심판’.
‘지오디와 함께’로 익힌 짧은 내 지식에 의하면, 분명 불교식 지옥에서의 첫 번째 관문에 해당한다.
원래대로라면 생애 공덕을 베푼 이만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지만, ‘캠비온 녹스’가 준비한 시련에서는 정반대로 죄를 지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그것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를.
클리어 조건은 간단하다.
플레이어 수를 절반으로 줄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보기에만 쉽지, 이를 바꾸어 말하면 ‘진광대왕의 심판’을 통과하기 위해선 모두가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다.
붉은색 글씨가 새겨진 이후 한동안 거리는 조용했지만, 나처럼 시련의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자 곧 혼란스러워졌다.
“‘진광대왕의 심판’? 플레이어 수를 절반으로 줄이라고? 제기랄, 이건 또 뭐여?”
“시, 실패하면 사망이래요. 저, 전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죽기도 싫다고요.”
여전히 클리어 조건을 이해하지 못해 반복해서 읽는 사람도 있었고, 한데 모인 헌터를 두려운 눈빛으로 보며 뒷걸음질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삼삼오오 뭉쳐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연이나 동현이 형, 서희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나만 살아남은 건가….”
혹시 몰라 더 혼란스러워지기 전, 주변의 헌터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저 말고 ‘괴수 시체 처리반’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는 거예요?”
“뭐, 뭐? 지금 그게 중요해? 저 붉은색 글씨가 안 보여?”
“저도 눈은 있거든요. 그보다 빨리 말해주세요!”
“그러고 보니, 어젠가 그젠가 밖에서 여자 한 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정말요? 혹시 그 여자는 어디 있어요?”
“치료받고 자기 방에서 휴식 받겠지. 그딴 건 관심 없어서 잘 몰라. 그러니 이제 꺼져봐! 난 시련에 관해서 동료랑 이야기해야겠으니.”
수연인지, 서희 누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몸에 퍼질 때, 모든 소란을 덮을 정도로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진정하시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둔지의 우두머리, 김요한 헌터.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긴급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안전이 확보될 동안 다들 자기 집에 들어가 계세요. 모든 헌터들은 한 시간 내로 회의장에 모입니다. 현 사태 타개를 위한 긴급회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명하는 분들은 즉시 저에게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요한의 명령에 나는 다른 헌터들에 휩쓸려 회의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헌터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회의장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참 친절하기도 해, 그치?”
그랬던 회의장의 침묵을 깨며 이종수가 조롱하듯 하늘을 가리켰다.
“그찮아. 저렇게 꼭 보여줄 필요가 있냐고? 대놓고 서로 죽이라는 거 아녀.”
그의 불평에 회의장에 모인 헌터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하늘로 쏠렸다.
[89,938,182/100,000,000]
‘시련’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허공에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황금빛 숫자가 새겨졌다.
저 숫자를 띄우며, ‘캠비온 녹스’는 자신의 친절함에 감사하라고 말했던가. 그렇지만, 그녀가 우리를 위한 행동을 할 리는 없었다.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가 알고 있다.
벌써 수많은 사람이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으니, 얼른 너희도 결단을 내리라는 재촉.
“또 생존자가 딱 일억 명으로 떨어진 것도 그려. 애초에 위에서 다 조종하고 있었다는 겨 아녀? 무섭다니까, 정말.”
이종수의 말대로 더 최악인 부분은 전체 생존자 수가 깔끔하게 일억 명으로 떨어진 점.
“플레이어 수를 계산하기 편하게 ‘시련’ 시작 전에 일부로 다 맞추었다는 거 아녀! 그 뭐시기냐, 내가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거잖어!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멸망 이후부터 모든 게 저들의 손바닥 위였다. 괴수의 출몰, 부족한 음식, 헌터 세력 간의 충돌. ‘시련’에 참가시킬 플레이어 수를 맞추기 위해 MC라는 놈이 지금껏 교묘하게 준비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초월자 놈들이 후원하는 플레이어끼리 서로 죽이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 위해 준비된 무대.
콜로세움의 검투사, 그게 지금의 우리다.
“그러니 쓸모 있도록 만들어야죠. 저희는 적어도 힘이라는 게 있잖아요. 너무 불평만 하지 말고 지금부터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죠.”
모든 헌터가 모이고 마지막으로 회의장 문을 닫고 들어온 김요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원정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팀을 제외하곤 신입 헌터를 포함해 모두 모였네요.”
S급 헌터의 말 한마디에 장내는 조용해졌다.
“다들 알다시피 ‘진광대왕의 심판’을 클리어하라는 것은, 쉽게 말해 각자 한 명씩 죽이라는 의미에요. 모두가 한 명씩만 죽인다면 플레이어 수는 절반이 될 테니까요.”
김요한은 눈을 내리깔고 안타깝다는 듯 모두가 아는 사실을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택할 수 있는 건 총 세 가지. 먼저, 그냥 기다리는 것. 꼭 저희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다른 세력에서 한 사람이 두 명 이상을 살인한다면 운 좋게 미션에 성공할 수도 있겠죠. 또 혹시나 미션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1/4 확률로 살아남을 수도 있고요.”
과연 가장 도덕적인 방안이다.
아무도 피를 보지 않고, 확률에 맡기는 것.
그러나 누가 자신의 목숨을 확률에 맡기고 싶어 한단 말인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 살아남길 바란다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희망에 불과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전 그딴 확률 따윈 안 믿어요. 지금까지 제 실력을 믿었지, 운에 맡겨서 살아남은 건 아니거든요.”
김요한의 말에 저 반대편에서 다리 꼬고 앉은 한 여학생이 욕설과 함께 답했다.
“어이, 누가 어른들 이야기하는 데 끼어드나!”
“저도 여기에 불려 나온 어엿한 헌터거든요! 저 때문에 살아나신 적도 있으시면서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저도 어엿한 성인이에요! 21세! 만 19세 이상이면 어엿한 성인 아닌가요?”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흑발을 격렬하게 떨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녀의 일침에 ‘지나가는 꼰대 1’은 입을 다물었다.
교복에 적힌 이름을 보니 이름은 이하영.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여학생, 기억해두어야겠다.
“자자, 저희끼리 싸우지는 말죠. ‘적어도’ 저희끼리는 협력해야죠. 아직 방안은 두 가지나 더 있어요. 이 방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 번째 방안을 말씀드릴게요. 바로 다른 주둔지를 저희가 먼저 습격하는 방안. 지금껏 장가영 헌터의 주둔지가 저희 측과 적대 관계에 있었으니 이 방안을 택한다면 그곳을 대상으로 삼아야겠네요. 목표 플레이어 수에 도달할 때까지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적대 세력의 주둔지를 습격하는 겁니다.”
“차라리 기다릴 바에는 그게 더 낫겠네요.”
“그려. 지금껏 당하기만 했잖아. 이참에 갚아주자고!”
두 번째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간 불안해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러다 우리가 지면 어쩌려고….”
“뭐! 우리가 지금 약하다는 거야? 봐준 거지, 절대 약한 건 아니야!”
“만에 하나라도….”
불안해하는 이유는 뻔했다. 결국, 두 번째 방안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절반이 될 때까지 다른 세력을 공격한다면 ‘진광대왕의 심판’을 통과할 수는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
“이 방법도 걱정되신다면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제일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헌터를 제외한 주둔지 내의 모든 인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네?”
“비록 저희 주둔지는 헌터의 수가 더 적지만, 일반인들은 저희에게 저항하지 못해요.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진광대왕의 심판’을 클리어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다음 ‘시련’에서 다른 세력에게 이점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거고요.”
김요한의 입에서 나올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파격적인 말에 다들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래서 우리만 부른 거여?”
그의 말에 먼저 입을 연 건 이종수.
“이런 말 하면 거시기하긴 한데, 난 마지막이 차라리 낫겠어. 그러고 절반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 다른 세력을 습격하면 되지.”
“맞아. 사실 우리에게 빌붙어 살아남은 놈들이잖아. 이참에 짐 좀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 다음 ‘시련’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고, 짐을 계속 떠안고 가?”
첨예한 논쟁에 장내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 속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김요한을 살폈다.
혼란을 던지고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그의 의중을 도통 알 수 없었다.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자, 그는 장내를 조용히 시켰다.
“어차피 하루 만에 결정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다들 내일까지 생각을 정해서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죠. 단, 이건 명심해 주세요. 이 투표에 관해서는 저희 ‘헌터’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해산합시다.”
투표로 결정.
뭔가 느낌이 싸하다.
지금껏 보아온 김요한은 무슨 일이든 제 뜻대로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게 투표라니?
“어이, 넌 어떻게 생각해?”
“네? 저, 저요?”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물은 거여?”
이질감에 머리를 굴릴 때, 이종수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음…. 저는 아무래도 첫 번째 방안이 낫겠네요.”
“그치? 나도 그려. 그게 제일 안전하잖아. 그럼 내일 보자고?”
“아까는 마지막이 낫겠다고…. 이미 가버렸네.”
대체 뭐였지, 저 사람?
[‘부정의 복수자’님이 헐떡대며 당신을 비웃습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실망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회의가 끝나고 수연이나 서희 누나의 집에 찾아갈까 생각했지만, 시간도 늦었고 괜히 휴식 중에 방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후원 미션’ 보상을 깜빡 잊을 뻔했네.”
그렇게 내가 지내는 방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보상을 확인했다.
[‘한솥’]
- 사용 가능 직업 : 요리사
- 장비 등급 : 신화
- 내구도 ∞ 공격력 0 방어력 0
- 정보 접근 권한이 부족합니다.
- 한솥밥을 먹어야 진정한 동료!
[‘한솥’ 장비로 인해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이 귀속됩니다.]
직업 전용 장비로 받은 것은 사용 방법을 알 수 없는 조그마한 밥솥.
한솥밥을 먹어야 진정한 동료라니, 또 망할 정보 접근 권한은 대체 어떻게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화급 장비에 내구도 수치가 ∞인 거로 보아 분명 좋은 것만은 분명한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야 비싼 쓰레기에 불과하잖아. 그리고 별안간 특성이라니….”
언제 쓰일지 모르니 ‘특급 냉장고’에 보관하고, 이번에는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포인트 : 164만 5,752 포인트]
“확실히 ‘너튜브’에서 먹방할 때처럼 많이 벌긴 했네.”
포인트도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일단 아껴두기로 했다.
‘후원 미션’을 통해 얻은 것을 확인하고, 내일 투표에서의 방침을 생각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화가 원정에서 돌아왔나?”
문틈으로 살짝 바깥을 바라보니 수연이가 뒷짐 진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아! 살아있었구나!”
억지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혹시나 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현이 형이랑 서희 누나, 다른 사람은 혹시 괜찮은 거야?”
그러나, 수연이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 상황에서 다들 무사할 리가 없지…. 괜한 걸 물어서 미안. 너라도 무사한 게 어디야. 이야기해줄 게 많아. 일단 들어와.”
문을 활짝 열어주며, 수연이를 반기지만 이상하게도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미안.”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이상하다.
배가 뜨겁다.
간신히 앞을 바라보니 수연이가 나를 찌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의문에 관한 답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흥분하며 당신의 다음 선택을 기대합니다.]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상태이상 ‘매혹’에 걸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