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7화 (8/168)

[4. 도산지옥 (2)]

“참 친절하기도 해, 그치?”

배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뜨거움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배를 더듬으니, 단검에 그어진 상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찮아. 저렇게 꼭 보여줄 필요가 있냐고? 대놓고 서로 죽이라는 거 아녀.”

두 번째 죽음 이후, 내가 귀환한 시점은 회의 시작 당시.

“또 생존자가 딱 일억 명으로 떨어진 것도 그려. 애초에 위에서 다 조종하고 있었다는 겨 아녀? 무섭다니까, 정말.”

하루 동안, 벌써 두 번째 귀환이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괴리감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플레이어 수를 계산하기 편하게 ‘시련’ 시작 전에 일부로 다 맞추었다는 거 아녀! 그 뭐시기냐, 내가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거잖어!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나를 찌른 건 틀림없는 수연이.

믿고 싶지 않지만,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우리 집에 찾아와 집안일을 도와주던 모습. 이화를 챙겨주던 모습. 일하던 와중에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던 모습. 마지막으로 나를 찌르고 울던 모습.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이 섞이며 구토감이 몰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가 나를 죽인 것이 본인의 의지는 아니라는 것.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에 따르면 그녀는 상태이상 ‘매혹’에 걸려 있었다. 즉, 누군가가 나를 죽이도록 그녀를 조종한 것이다.

“그러니 쓸모 있도록 만들어야죠. 저희는 적어도 힘이라는 게 있잖아요. 너무 불평만 하지 말고 지금부터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죠.”

이번 귀환에서는 수연이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서 수연이를 매혹한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수연이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녀를 조종하던 사람은 다른 방법을 써서 또다시 위협을 가할 테니.

하지만 대체 누가 나를? 내게 악감정을 품었을 만한 사람이 짐작 가지 않는다.

“어이, 넌 어떻게 생각해?”

“네? 저, 저요?”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물은 거여? 회의 때도 계속 넋 놓고 있더니 무슨 일 있나벼?”

이미 알고 있는 회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않은 채 헌터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며 연관되었을 만한 자를 찾고 있을 때, 별안간 이종수가 귓속말로 물었다.

뼈를 찌르는 말에 얼른 아무 대답이나 했다.

“음…. 저는 아무래도 두 번째 방안이 낫겠네요.”

“그치? 나도 그려. 그게 제일 안전하잖아. 그럼 내일 보자고?”

“저번에는 분명 첫 번째 방안이 낫겠다고…. 이미 가버렸네.”

그는 내 의견에 대충 동조하고 그냥 가버렸다. 속이 얼마나 가벼운 건지, 저 사람의 행동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몸을 비비 꼬며 약간 아쉬워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신의 대답에 만족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당신을 질타합니다.]

***

“거참, 이상하네. 왜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없지?”

퀭한 눈을 비비며, 새로 떠오른 해를 맞이했다.

“특별히 한 게 없는데? 물론 수연이한테 죽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면 밤을 새운 이유가 없잖아!”

귀환 전과 상황이 달라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음에도, 수연이는 밤새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넘어가면 뭔가 찝찝한데.”

수연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삼만 포인트나 들여가며 장비까지 사들였는데,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

[‘놀부부인의 주걱’]

- 사용 가능 직업 : 요리사

- 장비 등급 : 희귀

- 내구도 1 공격력 0 방어력 0

- 상대방이 공격해 올 시, 뺨을 때려 기절시킵니다. 대신 주걱의 밥풀로 인해 상대의 배고픔이 해결됩니다.

- 절대 방어 판정이 적용됩니다.

- 흥부가 이 무기를 싫어합니다.

[‘수갑’]

- 사용 가능 직업 : 제한 없음

- 장비 등급 : 일반

- 내구도 40 공격력 0 방어력 0

- 네, 다들 아는 그 수갑입니다.

- 회색의 50가지 쉐도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나를 공격하는 수연이를 먼저 주걱을 통해 기절시킨다. 이후, 수갑을 채워 상태이상이 해제될 때까지 움직임을 봉쇄시킨다. 어차피 헌터가 아닌 수연이는 수갑을 자력으로 풀지 못할 테고, 상태이상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제된다. 그러면 이후 누가 그녀에게 ‘매혹’을 걸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수연이가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결국 하품을 쩍쩍하며,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럼 개표하겠습니다.”

예정대로 오후에 열린 회의는 김요한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총원 : 48명

현원 : 17명

불참 : 31명

방안

1. 그냥 기다린다 : 0표

2. 다른 세력을 습격한다 : 4표

3. 헌터를 제외한 주둔지 내 모든 인원을 죽인다 : 0표

기권 : 13표

“이게 무슨….”

“기권은 당연히 결정된 사항에 따른다는 뜻이겠죠?”

기권이 13표에,

“불참 인원들은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보면 될 것 같고요.”

불참이 31명.

“그러면 투표 결과대로 2번 ‘다른 세력을 습격한다.’ 쪽으로 저희 주둔지의 방침을 정하겠습니다.”

“좋아! 굳이 시간 낭비할 거 없이 오늘 바로 쳐 버리자고! 그야말로 기습!”

원정 인원 6명을 제외하더라도 투표 불참 인원이 총원의 절반이 넘고, 그마저도 기권한 인원이 투표한 인원의 3배 정도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심지어 1번, 3번 방안에는 그 누구도 투표하지 않았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투표 결과를 기록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미친 듯이 낄낄댑니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결과에 만족합니다.]

“저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방침이 정해졌으면, 당연히 빨리 실현해야겠죠. 그런데,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인원이 조금 많네요.”

조금 많다? 겨우 그 정도로 끝나는 수준인가?

“네 명을 일단 선발대로 보내고, 남은 인원들은 불참한 헌터들을 데리고 함께 후발대로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전 찬성입니다.”

김요한의 말도 안 되는 의견에 바로 최서인이 찬성했다. 어제의 ‘지나가는 꼰대 1’은 ‘앞잡이 1’로 역할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이하영 헌터! 민주주의적인 방법. 투표. 몰라? 뭐가 이상하다는 거여?”

“어제 회의 때는 전 인원이 참석했는데, 하루 만에 절반 이상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고작 4표로 어쩌면 주둔지 전 인원의 운명이 걸렸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을 결정한다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어허~ 4명의 의견을 그럼 무시하자는 거여? 이하영 헌터도 ‘어른’의 결정을 내렸을 거 아니여?”

“그건 그렇지만….”

이하영이 소리 높여 당연한 말로 따져보지만, 주변의 반응은 이상할 정도로 그저 덤덤했다. 이 투표 결과를 당연히 수긍한다는 듯. 오히려 대부분 헌터가 김요한의 말에 동조하며 그녀를 비난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중요한 일이니만큼 이하영 헌터께서 선발대의 지휘권을 맡아주시겠어요?”

“네?”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 정도는 맡아주실 수 있지 않으신가요?”

이하영은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래요, 까짓거 제가 할게요!”

김요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이종수가 건네준 투표함을 받아들었다.

“이종수 헌터님께 부탁드려 남는 용지에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이름을 모두 적었습니다. 무작위로 제가 3분 뽑을 테니, 그분들이 이하영 헌터를 따라 선발대로 길을 뚫는 역할을 맡도록 하죠.”

김요한이 투표함에서 단번에 종이 세 장을 뽑아 들자, 다들 숨죽인 채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다.

선발대라면 다른 주둔지로 이동할 때, 괴수들부터 적 세력의 헌터까지 제일 먼저 위험을 이겨내야 한다. 그 역할을 다들 맡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

“송태섭 헌터, 김화영 헌터, 마지막으로는 정현 헌터. 이 세 분과 이하영 헌터까지 총 네 분이 선발대를 맡아주시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주시죠.”

그런데 저기서 제 이름이 나왔다고요?

***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아니 폭포수 쏟아지듯 퍼부으며 주둔지 바깥으로 나섰다.

‘도산지옥’이 구현되었다더니, 곳곳에는 거대한 칼날이 붉은빛 하늘을 향해 위협적으로 솟아있다. 스치기만 해도 바로 베일 정도로 칼날은 무척이나 날카롭다.

“어이없지 않아요? 헌터가 된 지 하루밖에 안 된, 생초짜까지 데리고 이런 임무라니. 그쪽은 왜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였어요?”

이십여 분 걸었을 때, 이하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따졌으면, 상황이 달라졌겠어요?”

딱딱하게 답하자, 뜬금없이 제일 뒤쪽의 김화영이 크게 웃으며 손뼉 쳤다.

“이야~ 초짜까지 데리고 선발대 역할을 맡으라고? 정말 멋있네. S급, A급들은 다 주둔지에 남아있으면서, 초짜를 보낸다?”

“그냥 죽으라는 거지. 딱 봐도 여기 네 명, 2번 뽑았던 네 명 아니겠어?”

송태섭도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해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두를 한데 모아 이하영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차피 이대로 선발대 역할을 하면 저희는 다 죽어요. 그건 장담해요.”

“당연하지.”

“사실 저는 다른 헌터 한 명과 조만간 주둔지를 떠나 독립하려고 했어요. 헌터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제 능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뭐?”

“상황이 꼬였으니, 저희 그냥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가는 게 어때요? 제가 지난 원정 때 알아본 곳이 있어요. 여기에서 조금 멀지만, 편의점을 지나 걷다 보면 나오는 버려진 물류 창고 단지가 있어요. 먹을 건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제안. 게다가 편의점이라면, 이화가 이번 원정을 나선 곳이다. 그곳으로 향하다 보면, 이화와 재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곳을 왜 지금까지 알리지 않았어?”

“제가 힘들게 찾았는데, 쉽게 남들하고 공유할 순 없죠.”

“성격 일관돼서 좋네.”

“그럼 다들 고민해봐요. 저는 세 분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이제 그곳으로 갈 거예요.”

그녀의 제안에 다들 고민할 때, 귀를 찢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급 괴수 ‘도산옥졸’이 등장합니다.]

“젠장, 괴수다! 너무 오래 있었어. 근데 ?급은 뭐야?”

“나도 모르지. 일단 싸우고 계속 이야기하자고.”

“제가 선두를 맡을게요. 정현 헌터는 뒤에 숨어있으세요.”

이하영은 겁나지도 않은지, 거대한 검을 땅에 질질 끌고 달려드는 거인을 향해 도약했다.

온몸이 꽈배기처럼 비틀린 거인은 우는 가면 같은 기괴한 얼굴에서 붉은 침을 튀기며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처음 보는 괴수니까, 조심해!”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만만한 태도에 걸맞게 그녀는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검을 피하는 동시에 거인에게 발을 뻗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몰라, 일단 쓰러뜨리고 보자.”

거인을 오히려 압도하며 싸움을 리드하는 이하영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듯, 다른 둘도 각자의 무기를 장비한 채 돌격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하영 헌터는 기세에서 앞섰지만, 거인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다.

반면, 거인에게는 일 초면 충분했다.

겨우 일 초.

거인의 눈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더니, 허공에서 수백 자루의 검이 생겨나 세 사람을 도륙했다.

내가 알기로 이하영은 A급 헌터이고, 김화영과 송태섭은 B급 헌터이다. 그런 세 사람을 거인은 단 일 초 만에 쓰러뜨렸다.

그에 깨닫는다.

‘도산지옥’이 구현된 지금, 바깥에 돌아다니는 괴수는 절대 죽일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그를 증명하듯, 내게 뻗어오는 거인의 검을 절대 방어 판정이 적용된 주걱이 한 번도 막아내지 못했다.

즉, 이번 ‘시련’의 의미는 각자 주둔지에서 나오지 않고 서로를 죽여 플레이어 수를 절반으로 맞추라는 것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사실 주어지지 않았다.

짧은 욕설과 함께 세상은 암전되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름 없는 자’님이 당신을 한 번만 더 지켜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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