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산지옥 (3)]
“참 친절하기도 해, 그치?”
벌써 세 번이나 들은 이 말에 귀환했음을 인식했다.
하지만, 이후 이종수의 말은 극심한 귀울림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심장은 벌렁벌렁 몸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고, 방법을 잊은 듯 호흡은 고르지 못하고 불규칙했다.
수많은 검에 온몸이 갈리는 모습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생생하게 그려졌다.
결국, 몸을 지배한 공포감에 다리가 풀려 의자에서 고꾸라졌다.
“어어-! 자네, 괜찮나? 왜 그려?”
“괘, 괜찮아요.”
얼핏 들린 이종수의 말에 이를 딱딱거리며 대답했지만,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
자신의 몸에서 쏟아지던 내장을 보고 괜찮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엔 몸을 너무 떠는데? 헌터가 되자마자 ‘후원 미션’한다고 너무 무리했던 거 아녀? 들어가서 쉬지그려. 내가 김요한 헌터님께 잘 말씀드려줄게.”
이종수의 달콤한 말에 쉬러 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그래서야 이전의 개죽음을 다시 겪는 길이다.
지난번 죽음으로 이제야 사건의 진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공포감에 무너질 순 없다.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아내고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숨을 고르자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고, 그제야 익숙한 회의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었나요?”
황금빛 숫자에 집중되었어야 할 이목은 모두 내게 쏠려 있었고, 김요한은 그에 의아해하며 회의장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냥, 미끄러졌어요.”
공포감을 완전히 억누르고 태연하게 의자 위로 몸을 끌어올리자, 이종수는 내 등을 탁탁 쳤다.
“신입이라 그려. 다들 괴수 처음 상대했을 때, 한동안 이랬잖어! 안 그래, 형씨?”
“맞지, 맞아. 종수 형님도 처음 괴수 상대할 때, 오줌 지렸었지!”
“이씨! 누가 그 말 혀! 비밀이란 말이여! 시크릿, 몰러? 시크릿!”
이종수의 너스레로 시선은 금세 내게서 거두어졌고, 김요한은 만족한 듯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별일 아니었던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시련’을 클리어할 방법을 함께 논의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후부터는 내가 질릴 듯이 들은 내용.
김요한은 투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 방안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투표에 관해 친절하게 안내했는데, 정작 결과는 그따위란 말이지?”
사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다.
어차피 내일 투표에 절반은 불참할 것이고, 그나마 참여한 인원 중에서도 절반은 기권할 텐데.
심지어 투표한 4명마저 모두 적대 세력의 주둔지를 치자는 의견에 투표하는 우연의 일치까지!
초등학교 부반장 선거만큼이나 참으로 치열하고 재미있는 투표 결과이다.
물론 그 이면에서 더러운 수작이 오갔기에 나온 결과이지만.
‘그냥 죽으라는 거지. 딱 봐도 여기 네 명, 2번 뽑았던 네 명 아니겠어?’
송태섭이 무심코 내뱉은 발언이 아니었다면, 그 더러운 수작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송태섭의 말이 맞았다.
적진을 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발대에 나 같은 생초짜까지 넣어가며 고작 4명으로 꾸린 것은 그냥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적대 세력을 친다던 수장의 머리에서 나올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2번을 투표한 이들을 사지로 내몰기로 정해져 있었고, 우리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든 헌터가 이를 알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불참 인원이 절반을 넘어가는 이유까지 깔끔하게 설명된다.
“어이, 넌 어떻게 생각해?”
불참 인원들은 모두 살해당한 것이었다.
“네? 저, 저요?”
“그럼,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물은 거여? 회의 때도 계속 넋 놓고 있더니 무슨 일 있나벼?”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물었을 때, 첫 번째 방안이 좋다고 했기에 김요한 일당이 그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내가 첫 번째 방안이 좋겠다고 말한 날에만, 수연이에게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정리하자면 첫 번째 방안이 좋다는 사람들은 모두 살해, 두 번째 방안이 좋다는 사람들은 선발대 명분을 쓴 사지행.
즉, 죽음을 피하기 위한 분기는 이곳이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어요.”
“에이, 되지 왜 안 돼.”
“부끄럽지만, 저는 아무래도 세 번째 방안이요.”
[‘부정의 복수자’님이 혀로 온몸을 핥으며 당신을 응시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신의 대답을 의아해합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당신에게 욕설을 내뱉습니다.]
“그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면 잠깐만 귀 좀 빌려줘 봐.”
“이미 속삭이고 계시는데요?”
“아이참! 말꼬리 잡지 말고 들어봐.”
그에게 귀를 기울이자, 예상했던 말을 그대로 속삭였다.
“김요한 헌터님을 필두로 우린 이미 세 번째 방안을 실행하기로 했어. 그런데 분명 반대하는 헌터들이 있을 테니까, 투표라는 구실을 갖추어서 우리와 의견이 다른 헌터들을 모두 제거할 거네. 우선 오늘 밤에 첫 번째 방안을 택한 헌터들을 모두 살해할 거여. 그들을 제거할 확실한 방법이 있거든.”
수연이에게 살해당했던 기억에 이를 악물며,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두 번째 방안을 고른 사람들은 투표 이후, 선발대로 주둔지 밖으로 내몰 거여. 몇 명 안 될 테니, 괴수 밥이 되겠지. 혹 적대 세력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만약에 승전보를 울리면 우리야 좋은 거고. 어쨌든, 더 자세히는 말 못 하겠고 죽기 싫으면 오늘 밤엔 방안에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 내일 투표에서는 체크 대신 네 이름을 써서 기권표로 만들고.”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신입이니까 알려주는 거여. 앞으로 나한테 잘하기나 혀.”
“네네, 정말 잘해드려야죠. 생명의 은인인걸요.”
“생명의 은인일 것까지? 에이, 아니여.”
이 모든 건 김요한이 짜 놓은 판이었다.
어차피 주둔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이번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출제자의 의도를 따르는 것이 맞다.
김요한의 생각대로 주둔지 내의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이번 ‘시련’을 클리어하기 위한 정답.
이대로 김요한 헌터 세력에 편승하면 이번 ‘시련’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두 번이나 나를 죽인 놈들이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이화를 찾으러 이 주둔지를 떠나기 전, 깽판 한 번 제대로 쳐 주어야겠다.
“이종수 헌터님 아니었다면, 잘못된 선택을 할 뻔했잖아요. 신입인데 이렇게 챙겨주시기까지 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 그런가? 허허.”
“정말 고마워서 그런데, 내일 선발대까지 처리하면 좋은 분들과 함께하게 된 기념으로 술 한 잔씩 올려도 될까요?”
“뭐, 뭐, 뭣! 수, 술? 거 좋지! 근데 그 비싼 걸 감당할 수 있겠나?”
“‘생명의 은인’에게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 친구, 보기보다 뭘 좀 아는 친구구먼. 김요한 헌터님께 내 따로 말씀드려보지. 그럼 난 가볼게. 오늘 하루 잘 보내게나. 아! 방금 한 말 잊지는 말고.”
이종수는 할 말을 마치고, 또 다른 헌터에게 다가갔다. 그가 내게서 관심을 돌림을 확인하고 나 역시 다음 할 일을 했다.
“저기 이하영 헌터, 김화영 헌터, 그리고 또 송태섭 헌터까지. 혹시 저랑 저녁 안 드시겠어요?”
***
깽판 치는 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워 결국 퀭한 눈으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의 풍경은 두 번째 죽음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기권표를 던졌다는 것 말곤 투표 결과는 전과 같았다.
“세 명을 일단 선발대로 보내고, 남은 인원들은 불참한 헌터들을 데리고 함께 후발대로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전 찬성입니다.”
2번째 방안에 투표한 인원수만큼 선발대로 꾸린다는 이야기도,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이하영과 이종수의 말다툼이 이어지는 것도,
“송태섭 헌터, 김화영 헌터, 이 두 분과 이하영 헌터까지 총 세 분이 선발대를 맡아주시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주시죠.”
선발대로 이하영 헌터, 김화영 헌터, 송태섭 헌터가 주둔지 밖으로 내몰리는 것까지 이전과 같았다.
변하는 상황은 지금부터.
선발대가 주둔지 바깥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후, 남은 헌터들은 다시 회의장에 모였다.
“잘 끝나긴 했는데, 이하영! 그년은 하여튼 기가 세 가지고. 열 받아 죽는 줄 알았네. 수도 많은데 그냥 우리가 콱 죽여버리자니께.”
“세 번째 방안을 실행한 후에도 ‘시련’ 통과에 요구된 조건이 만족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적대 세력을 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누군가는 선발대로 나서긴 해야죠. 이왕이면 저희랑 의견이 다른 이들이 죽을 게 뻔한 그 위험한 임무를 맡으면 좋고요.”
“앗! 내 생각이 짧았네. 하여간 우리 대표님 똑똑하다니깐. 그럼 ‘시련’이 끝날 때까지 대표님만 믿고 늘어져 볼까!”
“아직입니다. 밖에 남아 있는 일반인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야죠. 아무런 힘이 없다지만, 걸리적거리는 건 철저히 치워놓아야죠.”
무서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김요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에이~ 좀 천천히 허자고. 대표님, 어제 우리 막내가 말한 건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말씀이시죠?”
“또, 또! 기억 안 나시는 척한다! 어제 내가 말했잖어. 우리 막내가 신입 된 기념으로 여기 전 인원에게 술 올린다고 했던 거. 우리 한 잔씩 마시고 기분 좋게 마지막 작업하는 건 어뗘?”
이종수의 말에 다른 헌터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현재 술과 담배 등의 기호 식품을 구할 방법은 포인트로 상점에서 구매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이놈의 상점이 식량은 팔지도 않으면서, 이런 건 또 무척이나 비싸게 팔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술 한 궤짝에 100만 포인트. 이 정도면 신화급 장비도 하나 장만할 수 있는 가격이다.
포인트로 자신의 스탯을 올리거나 장비 등을 구매하기도 바쁜데, 이 정도 포인트를 술 사는데 쓸 멍청한 헌터는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신입인 내가 멍청이가 되겠다고 자청했으니 다들 솔깃할 수밖에 없다.
“김요한 헌터님, 딱 한 잔씩만 기분 좋게 걸치죠.”
“이것도 나름 승리인데. 승리의 의미로 축배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요.”
“헌터님, 부탁드립니다. 일 년 만의 술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조용하던 헌터들까지 간절하게 애원하자 김요한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내게 눈짓했다.
술을 준비하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특급 냉장고’에서 인원수에 맞게 술병을 꺼냈다.
“축배 한잔 걸치긴 하겠지만. 그 전에!”
헌터들이 앞다투어 내게 술병을 받으려는 걸, 김요한이 제지하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현 헌터께서 한 모금씩 마시고 나누어주세요.”
“술 아까우실 텐데, 괜찮겠어요?”
“의심해서 죄송하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게 타 있을 위험은 원천봉쇄 해야 하니까요.”
“맞죠. 저 같아도 의심스러워요. 그럼 한 모금씩 마시고 나누어드릴게요.”
김요한의 제안에 순순히 각 술병의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대표님, 정 없게 왜 이러나?”
오히려 다른 헌터들이 아쉬워하며 김요한을 뜯어말렸지만, 그는 신중하게 내가 모든 술병에 입을 대보길 기다렸다.
모든 술병에 입을 한 번씩 대고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헌터들은 내게서 술병을 받아 갔다.
“역시 우리 신입밖에 없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고마워.”
헌터들은 술병을 받아들고 내게 맘에도 없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왕 술까지 준비하신 김에, 정현 헌터께서 건배주를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의심했던 게 민망했는지 김요한이 건배사를 권했다.
처음엔 그를 정중히 사양했으나, 주변에서 어느새 환호성까지 지르며 내 건배사를 바라고 있어 마지못해 한마디 한다.
“다들 술병 하늘 높이 드시고! 건배사 하겠습니다!”
“신입, 패기를 보여줘!”
“먼저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신 초월자님들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후원해주신 보답으로 초월자님들이 즐거워할 만한 시간 준비했습니다. 저희가 취해가는 모습으로 함께 취하시길. 그럼 건배!”
[‘방구석 만화광’님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합니다.]
“건배!!”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헌터들은 자신이 쥔 술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푸른색 글씨가 회의장 곳곳에 새겨졌다.
[플레이어 김요한이 ‘히드라의 맹독’에 중독됩니다.]
[플레이어 이한나가 ‘히드라의 맹독’에 중독됩니다.]
[플레이어 최서인이 ‘히드라의 맹독’에 중독됩니다.]
[플레이어 최허수가 ‘히드라의 맹독’에 중독됩니다.]
[플레이어 이종수가 ‘히드라의 맹독’에 중독됩니다.]
그를 보며 회의장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술맛 좋다!”
[‘독 내성’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히드라의 맹독’을 견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