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산지옥 (4)]
헌터들이 신이 나 술에 입을 댄 순간, 밤새 제조한 ‘히드라의 맹독주’는 어김없이 효력을 발휘했다.
목에서부터 온몸이 옥빛으로 물들며, 헌터들은 거품을 문 채 땅에 쓰러져 즉사했다.
저 고통을 몸소 느껴본 적이 있기에, 지켜보면서도 몸서리쳐졌다.
“시, 신입 놈! 너, 이 자슥!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나마 ‘독 저항’ 특성이 있는 몇 안 되는 A급 헌터들은 즉사는 면했지만, ‘중독 상태’에 움직임이 완전히 둔해졌다.
이종수가 내 멱살을 붙잡은 손에도 힘은 전혀 없어, F급 헌터인 나조차도 손쉽게 그를 발로 쳐낼 수 있을 정도다.
“잘해 주긴요. 저는 이미 당신 때문에 두 번이나 죽었는걸요.”
“뭐, 뭣? 정신이 나갔네, 나갔어. 지금 멀쩡히 나에게 말 거는 놈은 대체 누구여, 그럼?”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다들 ‘독 내성’은 기본으로 가진 거 아니었나요? 이렇게 맛있는 술을 남기기나 하다니, 아깝잖아요.”
이종수의 손에서 떨어진 술병을 주워, 술을 벌컥벌컥 마시니 그는 분노에 차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이 썩을 놈이!”
“물론, ‘독 내성’을 다들 갖고 계셨다면 제가 이 방법을 써서 여러분들을 재울 리가 없었겠지만.”
당연히 대부분 헌터는 ‘독 내성’은커녕, ‘독 저항’ 특성조차 지니지 않았다.
이 근방에 ‘독’이 있는 괴수는 흔치 않다. 상급 괴수라 해봤자, ‘히드라’ 정도.
따라서 다른 데 쓰기 바쁜 포인트로 ‘독 내성’이나 ‘독 저항’ 특성을 갖추는 헌터는 몇 없다.
지금에야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겠지만,
내 알 반 아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술먹방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술 한 병을 그 자리에서 원샷 때리며 외쳤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허겁지겁 시선을 고정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우수에 찬 미소를 짓습니다.]
[‘부정의 복수자’님의 얼굴이 새하얘집니다.]
“오늘 파티의 진짜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보죠!”
완전히 방송 톤이 된 내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고, 그를 신호로 선발대 인원들이 중무장한 채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남성분은 송태섭 헌터! 대도를 쓰는 멋있는 전사죠!”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 검을 질질 끌며 앞장선 송태섭이 ‘중독 상태’의 A급 헌터들에게 뛰어들었다.
“개 같은! 네 놈은 밖에서 뒤졌어야 하는데?”
“닥쳐.”
욕설을 내뱉던 A급 헌터들은 송태섭의 묵직한 검을 피하지 못하고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화끈하죠? 다음으로는 김화영 헌터입니다!”
“진짜 웃기는 애야. 이 상황에서 방송? 누가 본다고? 초월자님들? 자, 조용히 하고 카드나 한 장 뽑아 봐.”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문 앞에 있던 김화영은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카드 뭉치를 섞더니 한 장 뽑게 했다.
“이 상황에 카드 뽑으라는 것도 웃기네요.”
“잔말 말고!”
“덕분에 소개가 끊기긴 했지만, 일단 뽑을게요.”
당황해하며 카드 한 장을 뽑자, 김화영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The Chariot, 정방향. 오늘은 승리의 날이네! 이야, 너 운도 좋다.”
[‘한솥밥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김화영’이 ‘The Chariot’으로 인해 오늘 하루 모든 스탯이 30 상승합니다.]
카드가 공중에 흩날리고, 어느새 그녀는 허둥지둥하는 A급 헌터들의 뒤에 나타났다.
“소개가 끊겼네요. 비록 몸집도 작고, 굉장히 여려 보이지만! 뒤에선 칼을 갈고 있는 암살자입니다!”
김화영 헌터는 두 자루의 단도로 칼춤을 추며, 그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마지막으로는 이하영 헌터! 오늘 방송의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상한 소리는 그만 하세요.”
새침하게 내뱉고 이하영은 내 옆에 경악한 채 굳어 있는 이종수에게 다가갔다.
“너, 너, 너! 내가 미안허이. 제발 살려만 주게.”
겁에 질린 이종수를 한주먹에 쓰러뜨리고. 쓰러지는 그의 얼굴을 발판 삼아 이하영은 허공에 뛰어올랐다.
“정현 헌터라고 했나? 너희들 오늘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지금이라도 그만둔다면!”
“시끄러워요.”
이후, 엄청난 속도로 낙하하며 김요한의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김요한 일당은 모두 쓰러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의 행동에 온몸을 벅벅 긁으며 발광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열광하며 20만 포인트를 플레이어 ‘정현’에게 후원합니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비명을 지릅니다.]
[‘무형의 관리자’님이 미소 짓습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성급하게 욕설을 내뱉은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피날레까지 보았으니, 저는 이제 진정한 술먹방을 즐기겠습니다. 부디 내빈 여러분께서도 즐거운 시간 되셨길. 재미있었다면, 후원 부탁드립니다! 오늘 합방한 제 동료들한테도 후원 부탁드려요!”
푸른 글씨로 초월자들의 후원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유일하게 독을 타지 않은 술을 꺼내 병째 들이켰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당신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에게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
“이쯤이면, 얼추 정리된 거 같은데?”
“다들 고생했어요.”
“혼자 즐기지 말고, 우리도 한 잔씩 따라줘!”
회의장의 상황이 정리된 후, 우리는 술 한 잔씩을 앞에 둔 채 마주 앉았다.
“썩을 것들. 평소에 모두를 위하는 척하더니, 다 기만이었어.”
“제가 이놈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선발대로 내보내 죽이려 하다니. 정말 화가 나네요.”
“진짜! 엊저녁에 현이 말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그대로 상황이 흘러가니깐 깜짝 놀랐잖아.”
아무리 ‘중독 상태’에 걸려 움직임이 둔해졌다 하더라도, ‘독 저항’ 특성이 있는 헌터들을 올스탯 0인 내가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일대일 대결을 한다 해도, 내가 처참하게 질 게 뻔하다.
그래서 어제 난 이 세 사람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처음 내일 일어날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이들은 코웃음만 쳤다.
하지만 다음날 내 말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나를 믿기로 한 듯하다.
덕분에 즉사하지 않은 헌터들까지 모두 제압할 수 있었다.
“불참한 인원들은 이미 살해당한 거겠지?”
“그렇겠지. 이 주둔지에 헌터라곤 이제 우리 넷이 끝이야.”
송태섭 헌터의 말에 술 한 모금을 들이켜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69,725,394/100,000,000]
이제 이틀 차인데, 황금빛 숫자는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었다.
“이대로면 첫 번째 ‘시련’은 통과하겠죠?”
“당연하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 물음에 송태섭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안 물어도 당연하잖아. 네게 목숨을 빚졌으니 당분간 너를 도와야지.”
“나는…. 음…. 너랑 있으면 재미있으니까, 나도 너랑 함께할게.”
김화영까지 답하고, 이후 이하영이 대답할 때까진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이왕 한배를 탔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해요.”
뜸을 들이는 이하영에게 눈치를 주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다른 헌터 한 명과 조만간 주둔지를 떠나 독립하려고 했어요. 헌터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제 능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뭐?”
“김요한 헌터 일당으로부터 살려준 것만으로도 저희가 이 주둔지 사람들에게 지닌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다들 동등한 ‘플레이어’인데 생존은 자기 몫이죠.”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이하영은 다시금 여기서 꺼냈다.
“하긴 이 사람들 떠먹여 주다간, 우리도 죽게 생겼으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희 넷이서 새로운 안식처로 찾아가요. 말씀대로 이곳 사람들까지 부양했다간 저희도 살아남지 못할 게 뻔해요. 제가 지난 원정 때 알아본 곳이 있거든요. 여기에서 조금 멀지만, 편의점을 지나 걷다 보면 나오는 버려진 물류 창고 단지가 있어요. 먹을 건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내색은 안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초월자들의 후원을 받아, 헌터가 되든. 헌터가 되지 않고 잘 숨어서 살아남든. 이후의 일은 그들의 몫이지 내가 대신 생각해줄 건 아니다.
“그런 곳을 왜 지금까지 알리지 않았어?”
“제가 힘들게 찾았는데, 쉽게 남들하고 공유할 순 없죠.”
“성격 일관돼서 좋네.”
“그럼 다들 고민해봐요. 저는 세 분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되면 그곳으로 갈 거예요.”
“그러면 시련이 끝나는 날,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흩어질까? 술도 다 마셨고, 노곤해서 좀 자고 싶네.”
“그러죠. 다들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
“어떻게 아신 거예요?”
회의장에서 나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이하영은 한동안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더니 큰맘 먹은 듯 물었다.
“어떤걸요?”
“투표 결과나. 김요한 헌터 일당이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나. 이제야 헌터가 되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숨기는 게 있는 거죠?”
“에이, 이하영 헌터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거 없어요.”
“다른 사람은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도, 전 아니에요.”
너스레를 떨며 넘기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눈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 이름은 이하영이 아니에요.”
“네?”
“이하영이라 부르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고유 능력은 아닌 것 같고. 도통 뭔지 모르겠네. 어쨌든 무슨 방법인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반드시 데리고 갈 거예요.”
“잠시만요.”
“이 말 하려고 따라왔어요.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아! 제 이름은 이나은이에요. 미리 잘 부탁해요.”
이후에도 한동안 나를 계속해서 훑어보더니, 그녀는 다시 홀로 가버렸다.
“남의 교복은 대체 왜 입고 있는 거야?”
뜸 들였지만, 도망칠 생각이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하영, 아니 이제는 이나은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련이 끝나고 이화를 찾으러 나서는 데 이나은은 반드시 일행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는데, 운 좋게도 먼저 합류를 요청할 줄이야.
이번에 김요한 일당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무찌른 게 좋게 보인 듯싶다.
송태섭이나 김화영도 나와 함께한다고 했으니, 주둔지를 나설 때 필요한 인원들은 이 정도면 다 구해진 것 같다.
김요한 일당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한 다음으로 해치워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이로써 해결.
이제 남은 건, 초월자들이 요청한 전속 계약 건과 수연이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이다.
전속 계약에 관한 생각은 일단 뒤로 미루고, 목적지로 부지런히 걸었다.
“수연아? 집에 있어?”
그렇게 수연이의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문을 몇 번 노크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이상함에 문고리를 잡자 문은 저절로 열렸다.
“불안하네. 수연아! 들어간다?”
서늘한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조심히 거실을 둘러보다가, 굳게 닫힌 방문을 발견하고 그리로 향했다.
“야! 왜 대답을 안 해?”
한 칸 크기의 작은 방을 열자, 수연이가 벌벌 떨며 엎어져 있었다.
“혀, 현아….”
[‘부정의 복수자’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그렇게, 수연이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을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현
- 클리어 조건 : 일주일 내로 ‘부평 지하상가’에 도달할 것.
- 성공 보상 : 없음.
- 실패 페널티 : 없음.
[수락하시겠습니까?]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