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첫 번째 판결]
“끄아악-!”
어디선가 가늘고 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뜬 황금빛 숫자가 1 줄어들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네.”
세력을 통솔하는 자가 사라지자 주둔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신들을 구원했다며 나와 일행들을 신처럼 받드는 자들.
우리도 그들과 같은 헌터일 뿐이라며 적대하는 자들.
우두머리가 없어진 틈을 타 어떻게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
새롭게 헌터가 되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자들.
약탈, 방화 등의 범죄를 일으키며 그저 혼란을 즐기는 폭도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면 후원을 받아 헌터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소문에 혹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김요한 일당과 뭐가 다르나 싶긴 하다.
“신경 쓰지 말자. 이번 ‘시련’만 끝나면 어차피 바로 뜰 거니까.”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하고, 하던 일에 다시 집중했다.
“여기에는 무조건 있어야 하는데.”
닷새간, 이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찾아다녔다.
회의장과 헌터들의 공간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니 남은 장소는 이곳, 김요한의 방뿐이다.
“밖에 난리도 아니네요. 무슨 범죄란 범죄는 다 일어나고 있어. 이래서 저들을 위해서 희생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김요한 헌터 일당을 제거한 건 저 사람들을 위해 한 일이 아니야. 그저 내 복수를 한 것뿐이야.”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세요? 좀도둑질? 지금 남 욕할 때가 아니었네. 이 시국에 뭐라도 좀 더 챙기려고요? 정말 더럽네요.”
“넌 지치지도 않냐?”
“드디어 말 놓으시기로 한 거예요? 잘했어요.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텐데, 서로 편해야죠.”
“말을 말자.”
‘시련’ 시작 이튿날 이후로 졸졸 따라다니는 이나은을 애써 무시한 채 이번에는 옷장을 뒤적거렸다.
“남의 옷장을 그렇게 뒤지는 거 아니에요.”
“방해할 거면, 좀 가라.”
“정말 가도 돼요? 이거 찾으시던 거 아니에요?”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자, 이나은이 종이 한 장을 펄럭이는 게 보였다.
“너 그거….”
“관심 없으신 거 같으니 이만 가 볼게요.”
자세히 보니, 이화가 원정 나갈 때마다 챙기던 지도와 같았다.
“잠깐만!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당연히 멀리 떠나는데,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나은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이 아닌 거 알잖아. 내가 닷새간 찾는 거 계속 구경했으면서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열심히 찾는 동안은 딴생각 못 하잖아요. 그래야 도망칠 궁리 못 하지. 오늘이 ‘시련’ 마지막 날이니 알려드리는 거예요. 여기서 확실히 정해요. 저 따라나설 거예요, 아니면 함께할 거예요?”
“선택지가 하나잖아!”
“애초에 지금껏 지도 찾은 것부터, 이미 답은 결정하신 거 아닌가요? 아니면, 혹시 ‘그 여자’ 때문인가요?”
“뭐, 뭣?”
“‘부평 지하상가’로 구하러 갈 생각인 거죠? 며칠 전에 혼자 중얼거리시는 거 다 들었어요. 임수연이라고 했나? 자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부평 지하상가’로 잡혀갔다네, 뭐라네. 그렇게 크게 중얼거리면 저보고 들으라는 거 아니에요?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숨겨둔 애인?”
눈을 반짝이며 묻는 이나은의 시선을 피하며 그럴 리가 없지 않냐고 답했다.
“그저 지도 보고 물류 창고 갈 길 파악하려고 했을 뿐이야. 겸사겸사 ‘부평 지하상가’ 지형도 한 번 살피고.”
수연이를 눈앞에서 놓친 이후 내가 건드려선 안 될 초월자를 잘못 건드렸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후원한 헌터의 세력을 해치웠다고, 500만 포인트를 써가면서 수연이를 순간이동 시킬 줄이야.
심지어 텔레포트는 자신의 수혜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즉, 수연이를 후원해 헌터로 만들어 전속 계약까지 체결했다는 의미.
분명, ‘매혹’ 상태 이상에 빠져 있는 동안 강제로 전속 계약을 맺게 했을 것이다.
게임 말들을 잃었다고, 과금에 불법까지 마다하지 않고 복수하려고 하다니.
초월자까지 되었으면서, 정말 유치하다.
나 같았으면 그 노력과 돈을 남은 수혜자들에게 쏟아부어 그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평 지하상가’에는 김요한 헌터 일당을 후원하던 초월자의 다른 수혜자들이 있어. 분명 그 초월자라면 자신의 수혜자들로 어떻게든 내게 복수하려 할 것 같아서 어디를 조심해야 할지 보려고 했었어.”
“하긴 ‘부평 지하상가’면 저희의 목적지인 ‘물류 창고’와도 가깝긴 하네요. 그곳에 남아 있는 세력이 있는 건 처음 알았는데, 어떻게든 만나긴 하겠네요. 원정 때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게 용하다고 해야 할까나? 그보다 혹시 후회하세요?”
“김요한 헌터 일당을 해치운 거? 그럴 리가. 애초에 후회할 거였으면 저지르지도 않았어.”
나를 적대하는 초월자가 생겼다고 해서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들은 나를 두 번이나 죽인 죗값을 치른 것뿐이니까.
“그게 아니라. 본인 때문에 그 여자분이 잡혀간 거 후회하시는지 물어본 거예요.”
“당연히 아니지.”
“그쵸? 자, 봐봐요. 따지고 보면, 헌터도 되고. 전속 계약도 맺고. 일석이조네! 전속 계약이 얼마나 맺기 힘든 건데.”
맞는 말이긴 하다.
전속 계약을 맺으면, 한 초월자에게만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포인트를 후원받는다고 들었다.
나는 전속 계약을 요청한 초월자들의 명성을 아직 모르기에 체결을 보류하고 있지만, 명성이 뛰어난 초월자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 일반 헌터는 상상할 수 없는 양의 포인트를 후원받아 단숨에 랭크를 몇 단계 상승시킬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수연이는 나보다 훨씬 앞서나간 헌터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껏 나와 이화를 챙겨준 수연이다. 그런 수연이가 나 때문에 다른 세력에 붙잡혀갔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사실상 그 여자분한테 잘된 일이에요. 500만 포인트를 고작 그쪽에게 복수한다고 흔쾌히 사용할 수 있는 초월자와 전속 계약한 셈이잖아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후원받을 수 있겠어요.”
“왜 네가 계속 수연이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듯, 내가 지도를 찾던 이유는 그저 우리의 목적지 지형을 살피고, 동시에 ‘부평 지하상가’ 지형을 살피기 위해서야.”
“오! ‘우리’의 목적지. 함께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어차피 언젠가 접촉하게 될 거, ‘부평 지하상가’로 미리 쳐들어가는 건 어때?”
“네?”
“단순히 복수에 움직이는 초월자의 세력쯤이면 넷이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걸?”
수연이를 구출하고자 하는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간, 이나은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계속해서 핑계를 꾸며냈다.
“어차피 ‘창고 단지’를 두고 경쟁을 하게 될 거라면, 미리 싹을 자르는 게 낫죠. 다만.”
“다만?”
“혹시나 그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함께하지 않을 거예요. 구출한다 해도 그 여자는 제 생존에 발목만 잡을 것 같거든요. 확실하게 하세요. 누구를 도우려다가 그쪽까지 같이 뒤지는 것쯤은 알고 있죠? 저는 그쪽을 위해 제 목숨을 걸고 싶진 않네요. 아니면 혹시 제가 지금껏 사람 잘못 보고 있던 건가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그런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
“당연하겠죠. 자기 자신이 우선인 사람이니 김요한 헌터 일당을 모두 죽일 수 있었겠죠.”
“그건 누구라도 내 상황에 부닥치면….”
“홀로 도망가겠죠. 보통의 사람이라면. 욕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가 같이 가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나은은 어느새 싸늘해진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저랑 같은 부류잖아요. 그냥 찝찝한 거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자기 때문에 피해 봤으니까. 좋아요. 어차피 ‘부평 지하상가’에는 볼 일이 있어서 들려야만 했어요. 들리는 김에 제가 손수 그쪽의 짐도 덜어주죠. 그래야 앞으로 함께 할 때 걸리는 게 없을 테니.”
말에는 불길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물으려고 할 때, 붉은색 글씨가 우리의 눈앞에 새겨졌다.
「오랜만이에요! 플레이어님들 최악의 시간 잘 보내셨나요?」
「초월자님들은 최고의 시간 잘 보내고 계시죠?」
[‘피의 살육자’님이 환호합니다.]
[‘별의 적대자’님이 다음 ‘시련’ 시작을 요구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자신의 승리에 가까워짐을 확신합니다.]
「다들 반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시련’의 결과부터 확인해볼까요?」
[37,253,458/100,000,000]
황금빛 글자가 확대되더니, 흩어지며 다른 글씨로 바뀌었다.
[‘시련’ 통과!]
[생존한 플레이어들은 다음 ‘시련’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지인들을 죽이며 ‘시련’을 통과하다니. 여러분이 자기 주변 사람들을 죽이며 고통스럽길 바랐던 제 의도와는 다르게 다들 자기 생존이 우선이었나 봐요.」
「일단 ‘시련’과 별개로 ‘진광대왕 님의 판결’이 있겠습니다!」
[진광대왕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 플레이어들의 만행에 분노하며 진광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네, 역시나 유죄 판결이 나왔네요.」
[‘알 수 없는 자’님이 만족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별의 적대자’님이 다음 시련 시작을 다그칩니다.]
「어찌 되었든, 통과한 인원들 축하드립니다. 제가 메인 MC로써 선물 하나씩을 준비했습니다!」
[생존한 모든 플레이어에게 ‘랜덤 아이템 박스’가 지급됩니다.]
[‘랜덤 아이템 박스’]
- 사용 가능 직업 : 전 직업
- 장비 등급 : ?
- 내구도 ? 공격력 ? 방어력 ?
- 두 번째 시련 통과 시 자동으로 오픈됩니다.
- 소유자에게 귀속됩니다.
- 소유자를 해치울 시, 해치운 자에게 새로이 귀속됩니다.
「어떤 선물인지 너무 궁금하죠?」
「내용물을 공개하기 전에, 경고 하나 덧붙이자면.」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인데, 잃어버리면 안 좋은 일이 있겠죠?」
「바로 다음 시련 공개하겠습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되니, 이야기는 이쯤 하고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요.”
“어, 어? 응?”
“송태섭 헌터랑 김화영 헌터에게는 이미 이야기해두어서 모두 주둔지 입구에서 저희만 기다리고 있어요.”
“대신 우리의 목적지는 ‘부평 지하상가’야. 물류 창고 단지는 그 이후에 간다.”
“알겠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쪽 짐 제가 덜어준다고. 어서 가요.”
얼떨결에 이나은의 손에 붙잡혀 주둔지 밖으로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붉은 글씨는 계속해서 새겨졌다.
“이번엔 또 뭘지.”
[초강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7일 내, ‘랜덤 아이템 박스’ 7개를 모을 것.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 실패 페널티 : 1/7 확률로 생존
- 만일 후원하던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경우, 후원자님께서는 더 게임에 참여할 수 없으니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후원할 대상 선별은 이번 시련까지 가능합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초강대왕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U+2641 행성에 ‘화탕지옥’이 구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