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12화 (13/168)

[6. 화탕지옥 (2)]

시간은 흘러 ‘화탕지옥’이 구현된 지, 이틀 차.

산성비로 활동 시간이 절반으로 제한된 터라 예정대로 하루 만에 ‘부평 지하상가’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어 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된 ‘부평 구청’ 건물에서 비를 피하며 하룻밤을 쉬었다.

“비도 그쳤으니, 바로 출발해 볼까요?”

“오늘은 ‘부평 지하상가’에 도착할 수 있는 거야?”

“음- 여전히 거리가 좀 있어서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오늘은 원정 때 발견한 편의점에서 안전하게 하룻밤 쉬는 게 어때요?”

“이나은 헌터 말대로 하지.”

비가 그치자마자 우리는 다시 한번 계획을 수정해 이나은의 안내에 따라 부지런히 편의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별안간 부랑자 셋이 우리 일행을 막아섰다.

그들은 ‘랜덤 아이템 박스’를 1개 내놓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고, 그를 거부하자 곧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고, 난 근처의 무너진 건물 잔해 뒤에 얼른 몸을 숨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새겨지는 푸른 글씨가 전투가 끝났음을 알렸다.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플레이어 ‘이수찬’의 ‘랜덤 아이템 박스’ 2개가 귀속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에게 플레이어 ‘정희원’의 ‘랜덤 아이템 박스’ 1개가 귀속됩니다.]

“나와! 다 끝났어!”

김화영의 말에 숨어있던 잔해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과 몇 분 전 덤벼들었던 부랑자들은 모두 길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 중, 가장 가까이에 쓰러진 부랑자의 위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김화영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손가락 끝에 올려두고 빙빙 돌리며 시시하다는 듯 하품했다.

“일방적인 싸움이었네요. 진짜 B급 헌터 맞으세요? 사실, A급 헌터죠? 힘을 숨기고 있다거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B급 헌터라기에 나 너무 강한 것 같아. 이제부터라도, 한 A급? 그래, S급 헌터 정도 된다고 치자.”

“오바하시진 말고요.”

“그럼 애초에 띄워주질 말아야지! 비행기 태웠으면 착륙 때까지 착실하게 책임지란 말이야! 알겠어, 기장님?”

김화영과 말을 주고받을 때, 별안간 이나은이 콧방귀를 꼈다.

“남들 싸울 때, 홀로 뒤에 숨어있기만 하다니. 기가 차네요! 도움 되는 게 단 하나라도 없었으면 이 사람처럼 만들었을 거예요.”

이나은이 가리키는 부랑자는 얼굴이 차였는지 방독면이 깨져있었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 많이 차인 듯, 출혈량이 엄청나다.

“에이- 현이 덕분에 이런 불편한 방독면 안 써도 되고 얼마나 좋아.”

“김화영 헌터의 말이 맞긴 해도…. 그래도 ‘랜덤 아이템 박스’까지 떠먹여 주진 않을 테니 자기 몫은 알아서 챙기세요!”

“오궁, 우리 나은이! 지금 현이가 나만 칭찬했다고 질투하는 거지? 어머- 귀여워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고, 정현 헌터나 끝까지 잘 감시하세요! 또 홀로 두었다간, 어제처럼 사고 칠지도 모르니깐.”

이나은은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저 멀리 송태섭에게 다가갔다.

“어제 일을 아직도 잊지 않았을 줄이야. 생각보다 뒤끝 있네.”

“질투라니까, 질투. 풋풋해라.”

“몰아가시지 말고요. 그나저나 이틀 동안 ‘랜덤 아이템 박스’를 아직 한 개도 못 챙겼다는 건 타격이 좀 크네요.”

“정 못 모으게 생겼으면, 네 ‘랜덤 아이템 박스’는 내가 친히 챙겨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살인 협박을 위로하듯 하지 마세요!”

“반응이 너무 재밌으니깐, 계속 장난치게 되잖아! 어쨌든, 나은이 말 들었지? 어제처럼 괜히 나서지 말고 뒤에 잘 숨어나 있어. 안 그러면 또 나은이한테 혼난다?”

“네네,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반성하고 있다고요.”

여기서 두 사람이 말하는 내 실수란 길잡이 역할을 한답시고 패기 있게 앞장서놓고 길을 잘못 들어 일행을 괴수에게 이끈 일을 말한다.

아마 그로 인해 여섯 번쯤 괴수와 전투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를 반성하지는 않는다.

길을 잃은 척 괴수에게 이끈 것은 모두 내 의도대로였으니.

첫 번째 시련 당시 우리 일행은 주둔지 바깥에서 만난 괴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끔살당했다.

만일 이번 시련에서도 그런 괴수가 나타난다면 주둔지를 나서고 얼마 안 가 일행이 전멸하게 될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번 시련의 괴수는 쓰러뜨릴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죽으면 귀환하는 몸, 한 번 죽더라도 이를 알아보는 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난 그를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두 번째 약속으로 요구한 길잡이 역할을 통해 은근슬쩍 괴수가 있는 방향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다행히 첫 번째 시련 때 등장했던 괴수와 달리 이번 시련에서 만난 괴수는 일행이 상대할 수 있는 B급 괴수였다.

이전처럼 등급이 ?로 표시되지 않는 점에서 안심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실수인 척 몇 번 더 괴수와 만나게 했다.

그 결과 이나은이 불같이 화를 내긴 했으나, 괴수는 이번 시련에서 페널티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대로면 무사히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겠네. 뭔가 아쉬운데….”

“뭐가 아쉬워요?”

“저놈들이 두둥! 나타났을 때, 기대했단 말이야. 재미있는 일이라도 일어날지 알고! 그런데 패기 있게 길을 막아선 것치고 너무 약하잖아….”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요. 싸우다가 비 내릴 시간이라도 다 되어가면, 편의점보단 ‘부평 구청’이 아직은 더 가까우니 다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요.”

“뭐! 거기 너무 불편했단 말이야. 정말 큰일 날 뻔했네.”

“걱정되는 포인트가 그쪽이라니…. 불편한 건 아무래도 다 무너진 상태니까 그러죠. 편의점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걸요.”

“진짜? 기대하고 있었는데….”

풀이 죽은 김화영의 말은 이윽고 송태섭의 외침에 묻혔다.

“누가 보냈냐고!”

송태섭은 마지막으로 남은 부랑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부랑자는 벌벌 떨며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기어가다, 다리에 검이 찔리자 움직임을 멈추고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 말했잖아. 우린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의 ‘랜덤 아이템 박스’를 빼앗으려 했다고.”

“그러기엔 너무 약하잖아. 그 실력으로 누구를 협박해?”

송태섭이 검을 비틀자 부랑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냥 죽여줘.”

“그럴 수는 없죠.”

그런 그들에게 다가간 이나은은 송태섭에게 검을 뽑게 시켰다.

이후, 몇 번이고 상처 부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미, 미안해. 제발 그만! 그만하라고!”

“누가 보냈죠?”

“아, 아까부터 계속 말하잖아.”

“거짓말.”

다시 송태섭에게 반대편 다리를 검으로 찌르게 시키고, 검을 뽑은 뒤 그 부위를 발로 내리찍었다.

두 다리가 으스러진 부랑자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다.

“누가 보냈죠?”

기절하지 못하도록 뺨을 때리며, 이나은이 물었다.

“아, 알겠어. 마, 말하면 되잖아.”

“이미 늦었어요. 그 말하기 전에 대답했어야죠.”

이번엔 팔에 검이 꽂히고, 부랑자는 신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지하의 지배자’! 그분께 여기 길목에서 대기하다가 너희가 나타나면 기습하라고 명령을 받았어.”

“지하의 지배자?”

“우, 우리 세력을 지배하는 헌터를 우린 그렇게 불러.”

“우리 세력이라면, 지하상가 쪽?”

“마, 맞아.”

“혹시 세력은 몇 명쯤 돼요? 그것까지 알려주시면 전 그쪽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우리를 제외한 헌터는 총 16명이야.”

“고마워요.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당연히, 저는 그쪽을 해치지 않아요.”

간절히 빌던 부랑자의 눈에 이는 희망의 불길은 간단히 꺼졌다.

“저는 이미 ‘랜덤 아이템 박스’ 하나 받았어요. 그러니 양보할게요.”

“알겠어. 하루 한 명이면 상관없지.”

[플레이어 ‘송태섭’에게 플레이어 ‘이수광’의 ‘랜덤 아이템 박스’ 3개가 귀속됩니다.]

“여긴 왜 이리 낙서가 많아?”

“제가 처음 왔을 때도 이랬어요.”

편의점에 들어서자, 김화영이 감탄했다. 그녀의 말대로 벽 곳곳에는 낙서가 되어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획대로 오늘은 쉬었다가 내일 지하상가로 가야죠. ‘지하의 지배자’ 세력에 당하기만 할 순 없잖아요.”

송태섭의 물음에 답하자 이나은이 피식 웃었다.

“정말 그 이유에서죠?”

“며칠 전부터 자꾸 그 소리 할래? 너나 거기 가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하라고.”

“아, 뭐야? 뭔데, 뭐야? 왜 둘만 아는 이야기? 나도 알려줘.”

“지하상가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출발할 테니, 난 일단 김화영 헌터랑 주변이나 순찰할게.”

“네, 고마워요. 한 시간 뒤쯤에 비 내릴 테니까, 시간 맞춰서 돌아오세요.”

“응? 순찰? 놔! 안 놔? 난 안 갈 거라고!”

끼어들려는 김화영의 목덜미를 잡고 송태섭은 편의점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송태섭 헌터, 분위기 파악 하나는 빠르네요.”

“이젠 말해줘. ‘부평 지하상가’에 볼 일이 있다며. 어떤 거야?”

“일전에 다른 헌터랑 함께 물류 창고 단지로 가려고 했다는 거 기억하세요?”

“응.”

“‘시련’이 없었다면, 다음 원정에서 함께 주둔지를 나서 ‘부평 지하상가’에 숨어 다른 이들을 따돌리기로 했었어요.”

“그때는 지하상가가 다른 세력의 주둔지일 줄 몰랐을 때니깐.”

“네. 문제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살피고 오겠다며 그 헌터가 원정을 나서고, 얼마 안 되어 ‘시련’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획은 수포가 되었죠.”

어울리지 않게도 이나은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주둔지 바깥에서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도 혹시라도 살아있다면 그녀는 ‘부평 지하상가’에 분명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 거 같아서 가 보려고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분명 살아있을 거야. 내 동생도 그 원정에 참여했을 텐데.”

“알고 있어요. 정이화 헌터가 그쪽 동생분 아닌가요?”

“응. 엥? 이화? 네가 이화를 어떻게 알아?”

“그야 제가 만나기로 했던 헌터가 정이화 헌터니까요.”

“잠깐만.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 이화한테선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는데? 우리 이화는 무슨 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한테 다 이야기한단 말이야. 그런 이화가 나 몰래 홀로 도망칠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아니, 뭐가 심각한 일이라고 울려고 해요?”

“당연히 심각한 일이지!”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화의 소식을 들어, 당황한 나머지 시선을 돌려 생각을 환기하려던 순간.

“저게 뭐야?”

내 눈에 한 낙서가 들어왔다.

- 멸돼, 조용. 장신구 뜯으러 창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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