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탕지옥 (3)]
“이 낙서 언제 쓰인 건지 알아?”
“그건 왜요?”
“빨리! 중요해!”
“상식적으로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세상이 멸망하고 언젠가 쓰였겠죠.”
설마 하는 마음에 다가가 글씨체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더럽게 못 쓴 붉은 글씨.
몇 번을 보아도 확실하다.
“왜 귀신 들린 사람처럼 낙서에 꽂혀서 그래요? 뭐라고 썼는지도 못 알아보겠구먼.”
“이화야!”
“깜짝이야! 진짜 무섭게 왜 그래요?”
이 낙서는 틀림없이 이화가 내게 남긴 메시지다.
“정이화 헌터는 뜬금없이 왜 찾아요? 정신이라도 나가셨어요? 아니면 드디어 미치신 거예요? 그러면 ‘랜덤 아이템 박스’라도 저한테 넘기실래요?”
“아니, 이화가 이곳에 왔다 갔어! 여기 쓰인 거 안 보여? 장신구를 뜯으러 창고에 갔다잖아. 장신구를 뜯는다니 대체 무슨 의미지? 그건 중요치 않고, 창고! 창고면 ‘물류 창고 단지’, 분명 거기겠지?”
편의점에 들렀다가 ‘물류 창고 단지’로 이동했음을 나에게 알리기 위해 이런 낙서를 한 것이다.
“지금 거기에 있거나, 아니면 그곳에 또 다른 흔적을 남겨두었을 거야.”
무엇이 되었든 이화의 행방을 알아보려면 ‘물류 창고 단지’로 가야 한다.
“좀 알아듣게 말하세요!”
“멸돼랑 조용. 이거 우리 ‘너튜브’ 닉네임이야. 내가 멸돼, 이화가 조용.”
“‘너튜브’도 했었어요? 하긴, 하는 행동을 보아선 그랬을 것 같긴 하네요. 어쨌든 정이화 헌터가 그쪽에게 ‘물류 창고 단지’로 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거예요?”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화 뒤를 따라가야 해.”
“무슨 소리예요? 지하상가에 가는 거 아니었어요? 언제는 우리의 목적지가 지하상가라고 노래 부르시더니. 게다가 이제 곧 산성비가 내려요. 정이화 헌터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커진 건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여기에서 비를 피해야만 해요.”
“아직 비가 내리기까지 사십 분 정도 여유가 있잖아. 지금이라도 출발해서….”
물류 창고 단지로 가야 한다는 말은 갑자기 새겨지는 푸른 글씨에 끝맺지 못했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플레이어 정현을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벌써 두 번째 ‘후원 미션’!」
「확실히 초월자님들의 관심을 톡톡히 받고 있네요!」
「원칙적으로 ‘후원 미션’은 플레이어 당사자와 초월자님들에게만 공개된다는 점! 초월자님들 간 베팅이 있었던 이전의 경우가 특수한 상황이었음을 먼저 말씀드리며, 미션 내용 공개하겠습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현
- 클리어 조건 : 24시간 이내에, 플레이어 ‘임수연’을 ‘부평 지하상가’ 밖 지상으로 데려갈 것.
- 성공 보상 : 44,444 포인트 지급
- 실패 페널티 : ?
- 단, 후원 미션의 내용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발설하면 실패로 간주
- 본 후원 미션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플레이어 ‘임수연’은 사망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하긴, 정이화 헌터가 함께 하면 지하상가의 세력을 쓸어버리긴 더 쉽겠죠. 그럼 그 말대로 해요.”
푸른 글씨는 내 눈에만 보이는 듯, 이나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출발해도 도착까진 아슬아슬하다고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욘 없잖아요. 동생이 남긴 듯한 메시지를 보아서 흥분한 건 알겠지만, 좀 진정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내일 산성비가 그치면 물류 창고부터 가 보자고요. 그 이후에 지하상가에 가요. 됐죠?”
“왜 갑자기 후원 미션이….”
“네?”
‘후원 미션’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수연이가 사망하게 된다니.
이건 ‘후원 미션’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세력과 맞서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이화를 만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부정의 복수자’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이대로 수연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이화가 쓴 글을 봐서 좀 흥분했네. 원래 계획대로 ‘지하상가’부터 가자.”
“또 이번엔 지하상가요? 계속 왜 그래요? 이랬다저랬다, 그러면 전 어디에 맞추라고요?”
“이미 지하상가 관련해서 작전을 다 세웠는데, 내 멋대로 바꾸는 건 아닌 거 같아. 이화가 너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부평 지하상가’에 있을지도 모르고.”
“맞죠. 사실 누가 썼을지 모르는 낙서만 보고 움직인다는 것도 참….”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나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분명 의심하는 눈초리다.
혼자 그 짧은 시간 내에 몇 번이나 태세전환을 하는데, 의심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니 계획대로 하자고. 내일은 지하상가로 가는 거 확정. 하루 동안 다 쓸어버리자.”
“당연하죠. 그 참에 짐까지 치워버리고.”
“짐?”
때마침 복귀한 송태섭과 김화영 때문에 의문에 관한 답은 또다시 들을 수 없었다.
“근처에 괴수는 없더라! 그보다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 왜 자꾸 나 빼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는 거야? 비밀 이야기? 설마, 벌써 그렇고 그런 이야기 주고받는 사이야? 꺄아- 빨리 들려줘, 들려달라고!”
“이야긴 이만하고, 내일 할 일 많은데 다들 자죠.”
“그러지. 오늘 불침번은 누가 맡지?”
“내일 전투가 이어질 텐데, 제가 맡을게요. 다들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김화영의 난입으로, 대화는 엇나간 채 끝나고 말았다.
***
혹시나 나타날 수 있는 괴수에 대비해 불침번을 선 지 두 시간이나 흘렀다.
비는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렸다.
빗방울이 땅에 닿을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빗소리에 이화와 수연이에 관한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켜 심란하기만 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이번 ‘후원 미션’을 해결하고 나면, 이화와는 또다시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화를 부탁한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이후, 이렇게까지 동생과 오래 떨어져 있는 건 또 처음이다.
“느낌이 안 좋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나은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림자가 뒤쪽에서부터 드리워졌다.
“정이화 헌터랑 함께 원정을 나선 헌터들 모두 한가락 해요. 저희의 도움은 사실상 필요 없을걸요. 그쪽의 도움은 특히 더 그렇고요.”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잘 알잖아. 그보다 자는 거 아니었어?”
“낙서를 본 뒤로 어울리지 않게 멍청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잖아요. 내일 큰 싸움이 있을 텐데, 그 전에 그쪽 정신 좀 차리게 해야죠.”
뒤통수를 살짝 한 대 치며, 이나은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리 전투에 있으니만 못하더라도, 내일을 위해 저번처럼 무슨 수를 또 준비했을 거 아니에요?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으면 어떻게 해요.”
“신경이 쓰였다면, 미안. 내일은 발목 잡는 일 없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지금 그쪽이 도울 수 있는 건 동생이 아니고, 저희예요. 저희 생존부터 신경 쓰자고요. 알겠어요?”
이나은은 손가락으로 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그쪽 데려온 보람 없어지지 않게, 멍청한 모습은 그만 좀 보여주고요.”
“남의 교복 입고 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건 맞네요.”
속을 후벼 파는 말에 한 번 비꼬았는데, 이나은은 반발 대신 예상외로 쓸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투 능력이 없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애초에 저한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는걸요. 잘 싸운다고 오래 살아남는 건 아니잖아요. 그랬으면 제 옆에는 그쪽이 아니라 김요한 헌터 세력 중 누군가가 있었겠죠. 제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런 세상에서 그쪽처럼 오래 살아남을 사람이 필요한 거지.”
“너무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거 아니야?”
“이미 헌터가 되자마자 김요한 헌터 세력을 쓸어 버린 데에서 기대는 충족하고도 남았어요. 복수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기도 했고요. 근데 메인 MC 말 중 하나는 맞네요.”
“어떤 말?”
“조용해서 비 내리는 풍경 보기엔 좋네요. 멸망한 세계랑은 안 어울리게. 이제 입 좀 다물어봐요. 같이 감상이나 좀 하게.”
그렇게 우린 비 내리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그 교복….”
“묻지 말아 주세요.”
“그게 아니라.”
“한마디는 꼭 해야 할 것 같네요. 저희는 필요 관계로 만난 거예요. 그 이상으로 엮이지는 말자고요. 남하고 너무 연관되면, 나중에 돌아오는 실망은 더 크니까. 그러니 그 수연이란 분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지금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하면서 지내자고요. 그게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야! 그 말은, 꼭 수연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 것 같은…. 어? 너 우냐?”
“이만 자러 가세요. 남은 불침번은 제가 설 테니깐.”
“난 괜찮아. 오히려….”
“잔말 말고. 제발 가 주세요.”
지금껏 내가 알지 못했던 이나은의 모습에 당황한 채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편의점 구석에 자리 잡아 누워보았지만, 결국 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다들 준비는 끝냈죠?”
10시가 되자 비는 정확하게 그쳤다.
이나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척이나 씩씩하게 편의점에서 나서기 전 우리에게 작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필요한 무기나, 특성. 혹 올려야 할 스탯이 있으면 포인트 아끼지 말고 지금 다 써버리세요. 저 아래로 내려가면 그럴 여유 없을 거예요.”
“당연히 어제 다 끝냈지. 후후, 다들 기대하라고. 내가 엄청 신기한 스킬 하나 구했으니까.”
“듣던 중 불길한 소리네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편의점에서 나와 지하상가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 어제처럼 우리를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여기가 편의점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상가 출구에요. 여기 31번 출구로 들어가서 적들을 찾아다닐 거에요. 수는 저희가 훨씬 적으니 다들 최대한 기척을 숨겨야 해요. 그 정도는 다들 알아서 할 수 있죠?”
“어휴, 벌써 그 말만 50번째야! 나 먼저 들어간다~!”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31번 출구 앞, 김화영은 질렸다는 듯 먼저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아니! 그렇게 주의시켰는데, 혼자 행동하면 어떻게 해요!”
“빨리 따라가자.”
그 뒤를 따라 우리는 모두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환하네.”
지하라 어두울 줄 알았는데, 일정한 거리마다 벽에 횃불이 걸려 있어 무척이나 밝았다.
“그러게요.”
“얘들아, 이쪽이야!”
주위를 살필 때, 김화영이 좀 더 안쪽에서 외쳤고 이나은은 식겁하며 그리로 일행을 이끌었다.
길을 꺾어 본격적인 지하상가로 들어선 순간,
“손님 어서 오세요! 이 옷은 어떠신가요? 500 포인트에 저렴하게 살 수 있는데.”
“어휴, 언니 너무 이쁘시다. 그쪽 언니도 이리 와서 옷 한 번 보세요. 진짜 잘 어울리겠다.”
“여기 이제는 구하기 힘든 과자도 있어요!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사가셔야 합니다!”
긴 지하통로를 따라 방독면을 쓴 상인들이 손짓하며 호객행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