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탕지옥 (6)]
“이 사람들 보니까 지하상가 들어오기 전에 걱정한 게 무색하긴 하네. 여기서 둘 좀 지켜보고 있어. 난 화장실 금방 다녀올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리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넘어질 뻔했잖아! 정신 차려.”
다행히 옆에 서 있던 송태섭이 황급히 받아준 덕분에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엎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마워요.”
“눈이 완전히 맛 갔는데? 갑자기 왜 이래? 괜찮아?”
뇌를 비틀던 엄청난 고통은 점차 사그라들지만, 이나은이 수연이를 죽인 장면만은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망할! 짐을 치운다는 게 그런 의미였어.”
이나은이 몇 번이고 언급했던 ‘짐’이란 수연이를 의미했다.
정확한 이유까진 알 수 없지만, 이나은은 수연이의 존재가 앞으로 우리의 생존에 방해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녀가 ‘부평 지하상가’로 가야 한다는 내 계획에 동참한 이유는 애당초 수연이를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럴 기회가 주어지자, 망설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문제는 ‘후원 미션’의 실패 페널티가 수연이와 내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
이나은이 수연이를 죽인 행위는 결과적으로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후원 미션’이 실패해 나까지 죽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그나저나 뭔가 걸리는데….”
지난 죽음에서 얻은 정보들을 떠올리다 보니,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상인들의 이상한 태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헌터들.
혼잣말하던 정신 나간 ‘지하의 지배자’.
별안간 나타나서 이상한 말들로 이나은을 말리던 수연이까지.
뭔가 어긋난 부분이 분명 잔뜩 있는데, 그 조각들이 전체적인 퍼즐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저기, 내 말 안 들려? 대답 좀 해 봐.”
어찌 되었든 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알았다.
이나은이 수연이를 해치워 ‘후원 미션’을 실패했기에 죽었으니, 이번에는 이 부분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를 해결하고 적 세력으로부터 하루 내에 수연이를 구출해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나은 헌터, 잠시만 이리 와봐. 정현 헌터 상태가 좀 이상해.”
“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무진장 어려워 보이지만,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또 죽을 뿐이다.
이대로면 또다시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흘러간다.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잠시 생각할 거리가 있었어요.”
“정신 차리세요! 조금 전에 적 세력의 주둔지 안이라는 점 계속 생각하면서, 다들 긴장을 늦추진 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랬는데 벌써 이러면 어떻게 해요? 김화영 헌터는 어쩔 수 없다 쳐도, 그쪽까지 그래 버리면 안 되죠.”
“이런 시기에 평온하게 장사나 하고, 저 사람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네? 그건 아까 이야기한 거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잠시 흩어져야 할 것 같아.”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두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랑 김화영 헌터가 여기에서 저 상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으면, 나랑 송태섭 헌터가 화장실을 찾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주변에 매복한 적이라도 있는지 확인하고 올게.”
내 말에 이나은은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듯했다.
“전투 능력도 없으시면서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저랑 송태섭 헌터가 가는 게 낫죠.”
“김화영 헌터랑 둘이 남으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위험한 것보단 그게 낫죠!”
역시나 이나은이 강하게 반발했다.
“둘 다 거기서 끝! 나 화장실 진짜 오래 참았거든? 정현 헌터랑 둘이 다녀오는 거로 하고, 대신에 내가 정현 헌터는 책임지고 철저하게 지킬게.”
설득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굴릴 때, 뜻밖에 송태섭이 지원사격을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죠. 알겠어요, 여기 지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그냥 소리 지르세요. 바로 달려갈 테니.”
“알겠어. 뭘 하든, 일단 화장실로 바로 가자고. 진짜 터질 것 같아.”
그렇게 송태섭 헌터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
“참견이긴 하다만,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방독면 때문에요?”
“뭐야!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야? 그 이야기 할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건 지금 중요치 않아요.”
“알겠어.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어울려주기는 했는데, 너랑 내가 특별히 단둘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지? 이나은 헌터 몰래 해야 하는 거라도 있는 거야?”
독심술을 쓰는 건 오히려 송태섭 쪽인 것 같다. 정말 이 사람, 분위기 하나는 잘 캐치한다.
“화장실에서 나가면, 주변을 순찰하는 척하며 이나은 헌터와 김화영 헌터는 이곳에 두고 저희 둘이서 먼저 적진에 쳐들어갈 거예요.”
“뭐?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서 너까지 보호하란 의미 같은데?”
‘후원 미션’을 통과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은 이나은이 수연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 조건 때문에 이나은에게 ‘후원 미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설득해봤자 이나은이 곧이 곧대로 들어 줄 인물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원 미션’을 성공시키는 방법은 당연히 하나.
내가 이나은보다 먼저 ‘로비’로 가 수연이를 구출하는 것뿐이다.
“이곳에 잡혀 온 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구할 때까지만이에요. 그 친구를 구하면 바로 도망쳐 나올 거에요.”
“어쩐지 물류 창고에서 이곳으로 목적지를 갑작스레 바꾸었다 했다. 근데 말이 쉽지. 그것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그럴 거면, 밖의 두 사람도 함께하는 게 낫지 않아?”
“아니요. 송태섭 헌터만 있으면 충분해요.”
‘지하의 지배자’와 수연이의 말에 따르면 ‘로비’에서 우리에게 덤벼들었던 이들은 모두 후원을 받지 못한 일반인이다.
그 말대로 그들이 모두 일반인이라면, 송태섭 홀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물론, 그들과 싸우지 않고 수연이를 구출할 생각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안전장치는 두는 편이 낫다.
“그러면 그 친구가 어디에 잡혀있는지는 알아?”
“네.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요.”
“길은 알고?”
“지도가 있잖아요.”
죽음 이전에 이나은에게 지도를 받아 막힌 통로를 표시한 덕분에 길은 어느 정도 외워두었으니, 상인들의 안내 없이도 그곳까지 가기는 충분하다.
남은 건 다소 억지스러운 상황에서 나와 함께하도록 송태섭을 설득하는 거다.
“뭐, 다 이유가 있어서 세운 계획이겠지. 알겠어, 대신 이건 기억해. 6명 이상의 헌터 무리가 보이면 바로 달아날 거야.”
“네? 그걸로 끝이에요? 더 물어볼 건 없어요?”
“목숨을 빚졌는데 뭘 더 물어보겠어. 지금 바로 출발하자고.”
***
“또 두 갈래 길이네. 어디로 가야 해?”
“이번이 마지막 갈림길이에요. 음…, 오른쪽으로 들어가죠.”
“알겠어.”
기억을 더듬으며 통로를 벗어나자, ‘중앙홀’이 나왔다.
“그나저나 통로 곳곳에 있던 사람들 정말 무시해도 되는 거야?”
송태섭이 뒤쪽을 슬쩍 보며 말했다.
이전처럼 ‘R 구역’을 지나는 동안, 통로 곳곳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을 만났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들은 그저 호객행위만 할 뿐, 우리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앙홀’에 도착했는데도, 천막에서 나와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직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그냥 무시해도 돼요.”
“아직은? 불길한 말을 너무 편안하게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길도 다 알고 있고, 이전에 여기 와 본 적이라도 있어?”
“지도도 있고, 그냥 다 감이죠.”
“감이라기엔 정확도가 100%잖아.”
“여기서는 이쪽으로 가야 해요.”
신경 쓰지 말라고 손짓하며 벽의 횃불을 하나 집어 들고 어두컴컴한 통로로 들어섰다.
“너무 어두운 거 아니야? 이쪽 맞아?”
“확실해요.”
지난번 중앙홀에 있던 그 많은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로비’에 도착해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의미다.
‘‘Y 구역’과 ‘G 구역’에 로비로 통하는 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최근에 ‘Y 구역’이 무너지면서 ‘G 구역’을 통해서만 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길은 상인이 무너졌다고 말한 ‘Y 구역’.
“무너졌다더니, 거짓말이었네.”
‘Y 구역’은 입구 부분만 심하게 훼손되어있고, 조금 깊숙이 들어오자 통로들이 무너지지 않은 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횃불도 점차 통로에 불을 밝혔다.
예상대로 ‘Y 구역’은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도록 입구 부분만 인위적으로 훼손시킨 것이다.
이곳이 ‘로비’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문제는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뭐야? 네놈들, 여기는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Y 구역’에 들어선 지 한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온 우리는 마침내 두 개의 철문이 있는 막다른 통로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곱 명의 무장한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도 안 보이던 헌터들이 여기에 있을지는…. 이건 예상치 못했네요. 전투 없이 수연이를 구출하는 건 불가능하겠는데요.”
“총 일곱 명이야. 일단은 후퇴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현아! 도망쳐!”
그런 헌터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입 안 다물어?”
헌터 중 한 사람이 땅에 엎어져 있는 방독면을 쓴 여성을 발로 걷어찼다.
“이 자식들이!”
“저 여성분이 네가 말한 친구분이야?”
“네, 맞아요.”
“마냥 도망칠 순 없겠네. 내가 미끼가 되어서 저놈들을 이끌고 이대로 갈림길 반대편으로 나아갈 테니. 넌 어딘가 숨어있다가 이놈들이 모두 나를 따라오면 친구분 구해서 ‘중앙홀’로 달려가.”
“괜찮겠어요?”
“일곱 명이면 오 분 정도면 충분해. 다른 게 문제지. 일단 뛰어!”
그런 자신감이면 지금 당장 싸우면 되지 않나 싶으면서도, 송태섭이 신호를 주자 몸이 반응해 ‘중앙홀’ 쪽을 향해 뛰어갔다.
계획대로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던 송태섭은 내가 통로 한구석에 몸을 숨긴 것을 확인하자 반대편 통로로 적들을 도발하며 뛰어갔다.
일곱 명의 헌터는 도발에 발끈하며 송태섭을 향해 욕설을 뱉으며 달려갔다.
뜀박질 소리가 점차 벌어지고,
“이쯤이면 되겠지. 이대로 수연이를 구해 도망치면 ‘후원 미션’ 성공이다.”
최대한 조심히 수연이가 있던 통로로 달려갔다.
“수연아?”
그러나 일전의 통로에 도착했을 때, 수연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