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탕지옥 (8)]
“이 사람들 보니까 지하상가 들어오기 전에 걱정한 게 무색하긴 하네. 여기서 둘 좀 지켜보고 있어. 난 화장실 금방 다녀올게.”
역겹다.
“우웩.”
“어어? 뭐야? 왜 갑자기 토하고 그래? 눈도 완전히 맛 갔는데? 괜찮아?”
나 자신이 역겨워서 견딜 수 없다.
“이나은 헌터, 잠시만 이리 와봐. 정현 헌터 상태가 좀 이상해.”
“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죽음을 가리키는 힌트들은 곳곳에 있었다.
멍청한 내가 보지 못했을 뿐.
힌트들을 지나친 대가로 모든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지하의 지배자’의 고유 능력에 당해 수연이의 죽음을 천천히 웃으며 지켜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저기요. 정신 차리세요. 화장실 가서 토할래요? 아무래도 그게 낫겠죠?”
“응. 내가 데리고 가서 내용물 비우게 할게.”
‘지하의 지배자’와 그 주변의 헌터들이 나를 보며 비웃는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만 같다.
그 비웃음 속에서 홀로 결심했다.
다시 귀환하면, 이놈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반드시 지워주겠다고.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줘야지.”
“네? 토하다 말고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송태섭 헌터, 빨리 이 사람 데려가요. 정신줄도 놓은 거 같아요.”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이루어주고 말 테다.
“아니야, 이제 괜찮아. 그보다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알겠으니까, 일단 화장실이나 가자. 가서 마저 토해.”
“전 정말 괜찮아요. 잠시 경황이 없었는데, 저한테 여기 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어요. 그거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송태섭의 팔을 뿌리치고 단언했다.
“잠깐만요.”
다시 나를 붙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송태섭을 별안간 이나은이 멈추어 세웠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요한 헌터 때랑 똑같은 수를 쓴 거죠? 그 계획대로라면 여기 세력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이나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송태섭 헌터는 정현 헌터 두고 빨리 화장실 다녀오세요. 저는 그동안 김화영 헌터 데려올게요. 네 명 다 모이면 그때 이야기해줘요.”
의외로 이나은은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송태섭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화장실로 갔다.
그렇게 송태섭과 이나은이 각자 할 일을 위해 움직이는 동안, 계획의 마침표를 찍어줄 특성을 구매하기 위해 상점을 확인했다.
“분명 저번에 봤었는데…. 찾았다!”
지난번 ‘요리사’ 직업이 살 수 있는 특성을 상점에서 구경하다가 포인트 대비 효율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특성 하나를 발견했다.
그때는 이딴 특성을 대체 누가 이 정도 포인트를 주고 구매할까 싶었다.
그렇지만, 저들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충분히 투자할 수 있다.
[상점에서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을 구매합니다.]
[79만 4,200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귀속됩니다.]
[‘풍요와 파괴의 군주’님이 당신의 선택을 흥미로워합니다.]
[‘부정의 복수자’님이 당신을 비웃습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당신의 어리석은 소비, 충동구매를 지지합니다.]
***
“정말 우리 둘이서 괜찮은 거야?”
“네, 저만 믿으세요.”
김화영의 속삭임에 확신이 찬 표정으로 답했다.
이번에도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지난번과 다른 점은 이나은이 아닌 내가 김화영과 남았다는 것.
이나은과 송태섭은 이런 지하에서 도저히 지낼 수 없다며 한껏 욕설을 내뱉더니 말다툼 끝에 우리를 남겨두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런 말 손님분께 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저희랑 지내기 싫다고 돌아간 그 두 분 정말 후회할 거예요.”
“저희한테 욕하시는 거 다 들었죠? 이제 저희 일행도 아니에요. 그냥 편히 말하세요.”
“이런 지하낙원도 몰라보고, 스스로 떠나가다니. 정말 어이가 없네요. 지상에서 분명 괴수에게 습격당해 곧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요! 옷 보는 눈만 없는 줄 알았는데 그냥 안목이 없던 거였어요!”
상인의 말에 김화영이 맞장구쳤다.
일행들이 훌륭히 연기해준 덕분에, 상인들은 이나은과 송태섭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더군다나, 남겨진 우리 둘이라도 ‘지하의 지배자’에게 소개해준다며 ‘로비’까지 길 안내도 해주고 있다.
“이 앞이 지배자님이 계신 ‘로비’에요.”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방화 셔터가 내려가 있는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지배자님은 예의 없는 사람을 싫어하니 다들 주의하세요. 그럼, 따라오세요.”
방화 셔터에 달린 문을 열며 상인은 다시금 강조했다.
“안쪽에 바로 계단이 있으니 조심하고요.”
상인들은 미소 지으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
상인들이 모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김화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쯤이면 이나은 헌터 쪽도 ‘중앙홀’에 도착해서 ‘Y 구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Y 구역’이니 ‘중앙홀’이니 난 모르니까 상관없고, 네 계획대로 풀리고 있는 거지?”
“당연하죠. 상인들, 제대로 속은 거 봤잖아요.”
상인들이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이나은과 송태섭은 우리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이후, 내가 지도에 표시해둔 길을 따라 우리의 뒤편에서 천천히 이동해 곧 ‘Y 구역’에 순조롭게 도착할 것이다.
상인들을 속여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두 사람을 ‘Y 구역’으로 보낸다는 내 계획의 첫 단추는 잘 꿰맨 것 같다.
그럼 이제 두 번째 단추를 꿰맬 차례.
“이번에 새로 사셨다는 스킬,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순간이동 하는 거예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김화영. 그가 가능했던 건 틀림없이 새로 샀다고 자랑했던 스킬 때문일 것이다.
“오! 다들 안 물어보길래 실망하고 있었잖아!”
“보통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에 놀라기부터 하지 않나요?”
“그게 뭐가 중요해! 아무도 안 물어본 게 중요하지!”
“굳이 쓸데없는 설명 할 시간 줄여서 고맙긴 하네요. 그래서 어떤 방식인가요?”
“이 스킬을 쓰면 하루에 한 번, 내가 표식을 새겨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
“네?”
“심지어 나랑 신체가 접촉해있기만 하면 다 함께 이동할 수 있어! 빨리 더 놀라봐! 엄청나지? 나만 살 수 있는 스킬이라고! 어서 부러워해!”
조건부 순간이동에다 본인만 살 수 있는 스킬이라니.
“그 스킬 대체 뭐에요? 엄청나게 사기잖아요? 포인트 얼마나 주고 산 거예요?”
“나은이가 남은 포인트 전부 쓰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
“그러면 지금 남은 포인트 0인 거에요?”
“응. 넌 아니야?”
이 사람은 정말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김화영이 엄청나게 많은 포인트를 주고 샀을 스킬 덕분에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니 이번엔 무모함에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표식은 혹시 어디 새겨뒀어요?”
“너랑 나은이 등 뒤에.”
“언제 했던 거예요! 그보다 이곳에다가도 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조금만 기다려봐.”
잠시 기다리자, 바닥에 조그맣게 수레바퀴가 그려졌다.
“끝!”
“그럼 내려가면서, 밑에서 어떻게 하시면 되는지 알려드릴게요.”
“알겠어.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해볼게.”
***
“이제 시작이니까, 제 말대로 해주세요.”
“응. 아직까진 잘 기억하고 있어.”
상인들을 따라 넓은 홀에 도착하자 ‘지하의 지배자’, 아니 ‘빙의’된 여성의 주위에 많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 ‘지하의 지배자’가 손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우리를 본 여성은 우아하게 인사했다.
“세 분도 이곳까지 손님들을 안내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땅히 상을 드려야겠군요.”
지하상가의 상인들이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상한 행동을 했던 건 전부 ‘지하의 지배자’의 고유 능력 ‘음욕’ 때문이었다.
고유 능력으로 이곳 사람들 모두에게 ‘쾌락을 탐하는 자’ 특성을 귀속시켜,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말로 만든 것이다.
“여기까지 오시는 길은 어떠셨나요? 혹시나 불편한 건 없었나요?”
“덕분에. 무척이나 편하게 왔어. 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에 헌터는 두 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답니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우리가 퍽이나 믿겠다.”
“정말이에요. 저는 무엇보다 거짓말을 싫어한답니다. 두 분 중 한 분만 있더라도 저희 모두를 쓰러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라 장담하죠.”
각본대로 처음 ‘로비’에 왔을 때와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약속된 대로 원래 이나은의 대사는 김화영이 대신했다.
“거짓말을 싫어해? 어이가 없네.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뭔데?”
“속였다? 누가 누구를 속였나요? 애당초 여러분은 저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이분들의 안내를 받은 것 아니었나요? 여기서 함께 지내시려고 말이죠.”
김화영이 발끈하며 말하자 여성은 차분히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면 혹시 이분들을 속이셨나요? 그런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싸울 생각도 없는 저희를 경계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대본을 수정할 지점은 여기서부터.
“닥쳐! 우리는 너네랑 싸우러 온 거니깐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김화영이 단검 두 자루를 뽑아 들며, 기존과 다르게 싸움을 조금 더 빨리 끌어냈다.
“저희를 속이신 게 맞았네요. 아무리 손님이라고 해도 이렇게 예의 없는 분까지 손님 대접해드릴 순 없답니다. 저 천박한 사람들을 죽인 자에게, 제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여성의 명령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어때? 네가 일러준 대로 말했는데. 이제 싸우면 되는 거야?”
“아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싸울 것까진 없어요. 지금처럼 험악한 표정만 짓고 있으면 돼요. 이제 슬슬 수연이가 나올 차례에요.”
“멈춰요! 이분들을 죽여선 안 돼요!”
“옳지.”
그 순간,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무리를 비집고 손과 발이 묶인 한 여성이 간신히 기어 나왔다.
“저 여자는 어떻게 풀려난 거죠? 분명 미끼로 쓴다고 가두었을 텐데.”
빙의된 여성은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갸웃하더니,
“아하! 이편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요? 알겠어요, 어울려드릴게요. 시간은 얼마 못 끌어드릴 것 같으니, 충분히 즐겼으면 얼른 이쪽으로 오기나 하세요.”
여기 어딘가에 있을 ‘투명’ 능력을 지닌 김동건에게 답했다.
뜬금없던 혼잣말은 ‘Y 구역’에서 수연이를 끌고 온 투명한 김동건과의 대화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가 수연이를 끌고 올 것이란 예상도 적중했다.
덕분에 곧 ‘Y 구역’에 들이닥칠 이나은과 수연이가 마주할 일은 없어졌다.
“모두 멈추세요. 일단 다 함께 저 여자의 말을 들어나 보죠.”
그러니 승부수를 띄울 순간은, 지금.
“다 함께라면, 이곳에 계신 또 다른 헌터도 함께 말이죠?”
“또 다른 헌터라뇨?”
“아아- 설명이 좀 부족했나요? 정확하게,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김, 동, 건 헌터를 말한 거예요.”
내 말에 여성의 표정이 굳었다.
“김동건 헌터, 이야기 듣고 계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시죠. 그쪽과 거래할 게 있어서 왔거든요. 아니면, 저희 둘도 이기지 못할까 겁나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겁니까?”
“망할 놈이.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도발에 허공이 일렁이더니 반지를 빼든 김동건이 나타났다.
“네놈들한테 붙인 그 세 놈이 분 건가? 하여튼 약해빠진 놈들, 쓸모가 없다니깐.”
“그건 중요치 않고. 거래 내용은 이겁니다. 어차피 그쪽 초월자님이 원하는 건 제 목이잖아요. 수연이는 놓아주고, 저랑 노시죠?”
홀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건넨 내 말에 여성이 크게 웃었다.
그 사이에 김화영은 수연이의 방독면 사이로 동그란 알갱이를 집어넣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주도권은 저희 쪽이 쥐고 있을 텐데요? 무슨 자신감으로 그를 요구하시는 거죠?”
수연이가 콩 한 쪽도 먹었고,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자신감?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간 네놈들 전부 죽을 테니까. 기회는 한 번뿐이야. 선택해. 나랑 거래할 건지, 죽을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