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20화 (21/168)

[7. 불편한 동행 (2)]

이나은의 말에 잠이 오지 않아, 카페 구석에 주저앉은 채 시간을 죽였다.

상점을 둘러보기도 하고, 멍도 좀 때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기 있었구나.”

별안간 누군가 내 옆에 슬며시 앉았다.

“안 자고 있었어?”

“고맙다는 말 아직 못했잖아. 그래서 너 찾고 있었지.”

“에이, 고맙긴 무슨. 괜찮아.”

“실은 송태섭 헌터님께 너한테 잠시 가도 되겠냐는 허락을 맡은 지는 꽤 됐어. 그런데 너랑 만나는 걸 이나은 헌터님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해서 눈치 좀 보고 있었어. 그러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일전에 상황을 정리한 것도 그렇고. 지금 일도 그렇고. 그새 수연이와 연관된 대강의 일을 파악한 듯하다. 역시 송태섭답다.

“어쨌든 간에. 너무 늦게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구해줘서 고마워.”

수연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내게는 저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는 좀 괜찮아?”

“너는?”

“나?”

쓰라린 감정이 들어 다른 이야기를 꺼냈는데, 뜻밖에 질문이 되돌아왔다.

“조금 심란해 보이길래.”

수연이는 내가 말을 이을 때까지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지하상가에 있던 상인들은 ‘지하의 지배자’에게 조종받다 죽임을 당할 운명인 사람들이었어. 그렇게라도 그 빌어먹을 운명을 끝내주는 게 최선, 인 게, 맞겠지?”

“역시 착하다니까.”

“그럴 리가 없네요. 내 손엔 이미 수많은 사람의 피가 묻었는걸.”

“본인이 책임은 ‘지하의 지배자’가 져야 한다고 했으면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잠도 못 자고 있으면 안 되지.”

수연이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현이, 넌 착한 사람이 맞아. 아까의 물음에 답하자면, 나도 이제 좀 괜찮아졌어.”

괜찮아졌다기엔, 수연이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있다.

“대신에 결심했어.”

“결심?”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겠다고.”

역시 수연이는 이나은과 절대 섞일 수 없는 사람이다. 멸망한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이타적인 사람.

“물론 지금은 너한테 민폐를 끼치고 있지만, 이왕 헌터가 되었으니까 강해질 거야. 내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멋있네.”

그에 솔직한 감상이 튀어나와 버렸다.

“멋있다니? 내가? 아니야.”

“진심이야. 그러고 보니 흩어진 이후의 일을 아직 서로 모르는구나.”

이후 멋쩍음을 숨기기 위해, 작업반장이 죽고 난 후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남들에게 밝히기 껄끄러운 정보들은 숨겨가면서 수연이와 만나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헌터가 되자마자, 그런 일들을 한 거야? 대단한데?”

“뭐, 나야 이화한테 헌터와 관련된 정보들을 평상시에 많이 들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강한 헌터들이 나를 돕기도 했고. 무엇보다 운이 좋았어. 하여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이번에는 수연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업반장님이 괴수에게 당하신 직후에 나는 동현이 오빠랑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어. 눈앞에서 누군가 죽으니까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리기만 했어.”

“그 상황에선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홀로 도망치고 있더라고. 동현이 오빠가 없어진 걸 그제야 안 거야. 너도, 서희 언니도. 어느 순간 내 곁에 없더라고. 그래도 어떻게 된 건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그냥 도망치기만 했어. 괴수들이 너무, 무서웠거든. 그렇게 한참 달리다가 어떤 헌터 분이랑 마주쳤어.”

그 헌터는 수연이를 구출해주는 동시에 ‘매혹’ 상태에 빠뜨렸다고 한다. 그 이후의 일들은 내가 아는 대로다.

“조종만 당하다 끝난 시시한 이야기지?”

“힘들었겠네.”

“혼자 도망친 죗값을 받은 거지.”

“그래도 결국 살아서 다시 만났잖아? 그러면 된 거지. 분명 동현이 형과 서희 누나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악착같은 사람들이니까.”

근황 이야기를 마치고는 이나은이 세운 방침을 설명했다.

“그래서 너랑은 생존자 무리를 발견할 때까지만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연거푸 미안해하는 내게 수연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고맙지. 구해준 데다가 생존자 무리에 합류시켜주기까지 한다니. 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동생 찾으려면 계속 돌아다닐 텐데 굳이 내가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 무엇보다, 시련에서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잖아?”

“당연하지. 이화랑 셋이 다시 놀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다시는 오지 않을 날에 대한 희망은 접어두고, 이나은이 부탁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 그리고 당분간 같이 지내게 돼서 묻는 건데, 네 직업이라던가 특성 같은 거 알려줄 수 있어?”

“특성이라면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거 말한 거지? 부끄럽지만, 포인트 받은 게 얼마 되지도 않고. 애초에 붙잡혀있느라 상점을 살펴볼 여유도 없었어.”

“그렇겠구나.”

“게다가 초월자님께서 후원해 주신 직업도 처음 보는 거고. 조금 전에 생긴 고유 능력도 어떤 능력인지 잘 몰라서….”

“뭐? 처음 보는 직업? 게다가 고유 능력이라니?”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줘.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수연이는 얼굴을 붉히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직업은 ‘성녀’. 뭔가 거창해 보이지? 으…, 남들에게 말하기 약간 창피해.”

느닷없이 튀어나온 직업. ‘요리사’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혹시 어떤 초월자님께서 후원해 주신 거야?”

“‘부정의 복수자’님께서 전속 계약을 요청했을 때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별안간 후원해 주셨어.”

더군다나 그 직업을 준 사람은 내게 ‘요리사’라는 직업을 준 초월자.

대체 이 초월자는 우리를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그러면 고유 능력은?”

“아까 공지 하나 떴었잖아.”

“공지라면, 부정행위 관련한 거?”

“응. 그 공지가 뜬 이후에 새로운 초월자님이 전속 계약을 요청하시면서, ‘자애’라는 고유 능력을 후원해 주셨어. 이것도 어떤 고유 능력인지 이름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어. 권한이 부족해서 정보를 볼 수 없다고만 하고.”

수연이에게 이토록 초월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다.

“전속 계약은 맺었고?”

“응. 강해지려면,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하니까.”

“잘했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일어나면 상점 한 번 둘러봐봐.”

“그래야지. 상점 둘러보면 대충 어떤 직업인지 느낌은 알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이만 자러 갈까?”

“응. 다시 한번 고마워.”

기어코 수연이는 고개를 또 숙였다. 그런 수연이를 말리는 내 머릿속은 대화 전보다 더 복잡해졌다.

***

아침이 되고, 산성비가 그치자마자 우리는 물류 창고 단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선두는 이나은과 내가, 후미는 김화영이 맡았다. 수연이는 밤새 불침번을 서느라 피곤했을 송태섭과 함께 일행의 가운데에서 이동했다.

“물류 창고 단지? 그곳으로 가는 거죠? 도착하면 편히 쉬실 수 있을 거예요. 괜히 저 감시하신다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죄송해요.”

“불침번 역할을 누군가 맡아야 했고, 그게 나였을 뿐이야.”

“그래도….”

“정말 괜찮아. 고작 하루 밤샌 건데, 엄살 부릴 건 아니지. 괴수가 나타나면 내 뒤에 숨을 생각이나 해. 잘은 모르지만, 네가 죽으면 분명 현이에게 원망을 살 테니.”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콧방귀를 끼더니, 이나은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저 착해빠진 여자에 대해 좀 알아보셨어요?”

“어젯밤에 그와 관련한 대화를 하긴 했어. 그런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처음 듣는 직업을 갖고 있더라.”

“희귀 직업을요?”

“맞아. 그래서 뭐라 판단을 못 하겠어. 본인도 자신의 직업에 관해 아직 잘 모르는 눈치라.”

“당황스럽긴 하네요. 그래서 어떤 직업인데요?”

이나은의 말에 답하려던 찰나, 뒤편에서 김화영이 외쳤다.

“뒤에서 멍멍이들이 일로 뛰어오고 있어!”

“멍멍이?”

무슨 일인지 뒤쪽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C급 괴수 ‘불개’가 등장합니다.]

“멍멍이가 아니잖아요!”

“대화는 이따가 계속하는 거로 하고 일단 도망치죠.”

괴수가 등장했다는 알림에 이나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C급 괴수밖에 안 되는데, 그냥 싸우는 게 낫지 않아? 세 마리밖에 안 되는데?”

“아니요. 세 마리뿐일 리가 없어요.”

이나은의 말이 정답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또다시 알림이 새겨졌다.

[C급 괴수 ‘불개’가 등장합니다.]

“칫. 이미 늦었나? 여기서 조금 꺾어서 갈게요!”

정면에서도 불개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이나은은 즉시 골목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길은 알고 가는 거지?”

“그럴 리가요. 그냥 감으로 뛰는 중이에요.”

“뭐?”

[C급 괴수 ‘불개’가 등장합니다.]

따지기도 전에, 또다시 골목길에서 불개 네 마리가 나타났다.

그중 제일 가까이에 있던 한 마리는 이나은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벌써 열 마리가 넘어가!”

괴수와의 간격은 자꾸만 좁혀들고, 우리를 쫓는 무리는 불어나기만 한다.

“망할.”

방향을 바꾸며 골목길 이곳저곳을 누비던 우리는 결국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여기로 우리를 몬 건가?”

“그런 것 같네요.”

막다른 골목 앞, 이나은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먹을 쥐었다.

“싸우죠. 정현 헌터랑 임수연 헌터를 둘러싸고 진형을 유지한 채 싸워요. 송태섭 헌터, 괜찮겠어요?”

“아직은.”

“앞으로 한참 동안 괜찮아야 할 거예요. 불개란 괴수들은 무리 지어서 사냥하기로 유명하거든요. 아마 끊임없이 몰아닥칠 거예요.”

괴수는 우리를 촘촘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저도 도울게요!”

긴장감이 고조되는 와중, 수연이가 외쳤다.

[고유 능력 ‘자애’가 발동됩니다.]

[스킬 ‘성역’이 발동됩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미소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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