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22화 (23/168)

[7. 불편한 동행 (4)]

“그 자식이 나를 찾았다는 건, 혹시 인천 구치소까지 털린 건가? 이렇게 멀리까지 도망쳐왔는데, 그새 털렸다고? 아저씨 아직 거기에 남아계실 텐데….”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송태섭은 미친 듯이 중얼거리다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며 격하게 욕을 내뱉었다.

“망할! 이래서 같이 도망치자니까, 왜 먼저 가라고 하셔서!”

“아저씨요?”

“가서 확인해야만 해.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그 썩을 강이란 그놈은 왜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해서 이 난린데! 조용히 사라져줬잖아! 그러면 된 거 아니냐고!”

두 번이나 무시당한 이나은은 완전히 기분이 상한 듯 소리 높여 외쳤다.

“정신 좀 차리세요! 강이란,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이러는 거예요?”

그에 욕설을 멈춘 송태섭은 정신이 들었는지 툭 하고 답했다.

“이 괴수의 주인.”

“괴수의 주인이라고요?”

수연이의 물음에 송태섭은 괴수의 다리에 채워져 있던 검은색 물체를 가리켰다. 한창 전투 중에는 몰랐지만, 다른 괴수와 달리 거대해진 괴수에는 발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놈은 자신의 부하가 조종하는 괴수에 반드시 발찌를 채워두거든.”

송태섭은 힘을 주어 발찌를 괴수에게서 빼내고는 자신의 팔에 걸었다.

“이걸 가지고 움직이면, 나를 쫓아오겠지.”

“괴수를 조종? 아까부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도통 맥락을 쫓아갈 수가 없잖아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 필요 없어.”

“진짜 왜 그러세요!”

“현. 미안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러고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말을 꺼냈다.

“생명의 은인에게 폐를 끼칠 순 없어. 나랑 함께한다면 이런 괴수들이 계속해서 덤벼들 거야. 이제 내 위치를 파악했으니, 앞으로 그 빈도도 점점 더 잦아질 거고. 그러다 언젠가는 강이란까지 만나게 되겠지. 그러니 여기서 흩어지는 게 맞아.”

“안 돼요.”

내게 머리 숙인 송태섭의 앞을 이나은이 가로막았다.

“비켜라. 네게는 갚아야 할 게 없어.”

“그쪽이 빠지면, 일행의 전력이 너무 줄어요. 생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일은 용납할 순 없어요.”

“내 말 못 들었어? 나랑 함께하면 오히려 너희까지 위험해진다고.”

“지금처럼 쓰러뜨리면 그만이에요. 괴수 따윈.”

“괴수가 문제가 아니야! 강이란 그놈은! ‘지하의 지배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악하고, 저딴 괴수보다 훨씬 강한 놈이라고! 우리가 힘을 합쳐도 그놈 한 명에겐 못 당해내.”

송태섭은 비탄한 목소리로 대검을 장비했다.

“이만 비켜.”

그리고 독하게 마음먹은 듯, 이나은에게 검을 겨누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고 떠나든가. 아니면 남든가. 선택지는 두 가지에요.”

“설명은…. 개인적인 일이라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남는 것뿐이네요. 죄송하다만, 저는 A급 헌터에요. 그쪽에게 질 일은 절대 없어요. 그러니 곱게 끝내죠.”

이나은도 주먹을 쥐어 그에 맞섰다.

“보내드리자.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분을 막아서는 안 되지.”

“전력이 줄면, 남은 시련들을 저희끼리 어떻게 버틸 생각이신데요? 이 전력으로는 안 돼요. 그 점은 본인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이나은 헌터는 제게 맡기고 그만 가보세요. 부디 잘 해결되길 바랄게요.”

이나은의 주먹에 손을 얹으며 눈짓하자, 송태섭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골목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정말 이대로 보내려고요?”

“걱정하지 마. 전력은 새로이 구하면 되고, 내가 있는 한 시련을 통과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전투력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이야.”

이나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남은 시련들을 해결하면서, 송태섭 헌터가 지닌 개인적인 위험까지 부담할 순 없어. 설령 괴수의 스탯을 강화하는 상대가 S급 괴수라도 강화하면 그 순간 우리는 전멸이야.”

지금껏 군말 없이 개인적인 일들에 도움을 준 송태섭을 생각하면,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멀리 생각하면, 이게 옳은 거야.”

“아니지! 괴수를 강하게 만든다니! 재미있는 일이 잔뜩 벌어질 것만 같잖아! 이렇게 보내다니, 아쉽네. 그래도 나은아, 너무 시무룩하지는 마.”

“제가 언제 시무룩했다고 그래요?”

“내 예감에 곧 다시 만날 것 같거든. 내 예감은 빗나간 게 절반을 조금 넘어갈 뿐이니. 믿어도 돼.”

“맞을 확률이 반도 안 된다는 거잖아요!”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는 이나은의 시선을 피하며, 벽에 힘겹게 기대어 있는 수연이를 부축했다.

“저희도 이만 물류 창고 단지로 가죠.”

송태섭이 떠난 이후, 물류 창고 단지에 도착하기까지 다행히도 괴수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우리 일행은 완전히 토라진 이나은의 퉁명스러운 지시에 따라 침묵 속에 앞으로 나아갔다.

송태섭이 떠난 사실로 다들 알게 모르게 허탈하긴 했는지, 이전처럼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심지어 김화영마저 제일 뒤편에서 아무 말 없이 일행을 호위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다가, 이나은이 침묵을 깼다.

“이제 곧 도착해요. 가자마자 식량을 보관해둔 냉동창고부터 찾아가죠.”

“그 이런 질문 죄송하기는 한데…. 멸망한 지 시간이 꽤 흘렀고, 냉동창고가 아직 멀쩡할까요? 전기가 끊기기라도 했다면, 음식이 다 썩었을 거 같아서요.”

수연이가 한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이다. 당시 물류 창고 단지로 가자고 말하는 이나은이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라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기야, 어차피 이화를 찾으려면 강력한 헌터의 호위 하에 주둔지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기에 물을 필요도 없긴 했다.

“너무 김빠지는 소리였죠? 죄송해요…. 괜한 질문을 해서….”

“설마 제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까 봐요?”

“그냥 혹시나 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그 질문에 이나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지난번에 정현 헌터와 김화영 헌터에게는 원정을 나가서 물류 창고 단지를 발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는 원래부터 저곳에 관해 알고 있었어요.”

“뭐?”

거짓말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내 몸짓을 무시하고, 이나은은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아버지께서 친구분들과 함께 저곳에 주둔지를 만들려고 했었거든요.”

그 주둔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내가 물류 창고 단지를 이나은에게 처음 들어보았다는 건, 이나은 아버지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뜻일 테니.

“세계가 멸망한 직후에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함께 이 근처의 식량을 싹 모아 저곳의 냉동창고에 숨겨두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친구분 중 한 분이 저곳을 설계한 기술자였거든요. 그분은 어떤 방법인지는 잘 몰라도, 후원받은 포인트를 써서 전류 없이 발전기만으로도 냉동창고가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두었어요.”

“그렇다면 괜찮겠네요.”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냉동창고는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잘 돌아가고 있을 거예요.”

“근데 너는 왜 김요한 헌터의 주둔지에 있던 거야? 네 말대로라면, 저곳에서 지내는 게 훨씬 생존에 좋았을 텐데. 혹시 다른 주둔지의 습격이라도 받았어? 아니면 괴수의 습격?”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나았겠네요.”

김화영의 물음에 이나은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 걸음을 멈춘 채 시간이 흘렀고, 결국 입술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이나은은 피를 한데 모아 퉤 뱉고는 이를 갈며 답했다.

“한 멍청한 인간이, 저곳의 식량을 독차지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였거든요. 그래서 떠나 있었어요. 홀로는 저곳을 지키며 생존할 수 없으니까, 믿을 만한 헌터들을 좀 더 모아서 돌아오려고요.”

“다른 인원들을 모두 죽였다면, 너는 어떻게….”

“제가 어떻게 살아있냐고요? 당연하잖아요. 제가 죽였어요. 그 멍청한 인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말해주지. 왜 이제야?”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친구도. 그때 다 죽었는데….”

이나은의 말에 더 이상의 질문은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 순간 물류 창고 단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물류 창고 단지인 거 같아! 자자,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 어?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어디서 탄 냄새가 나지 않아?”

“그러게요. 저기 검은 연기도 올라오는데….”

김화영의 말에 화제는 전환되었으나, 물류 창고 단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불안감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곧 이나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쪽을 향해 달려갔고, 덩달아 우리도 뒤를 쫓아 달려갔다.

간신히 따라잡은 이나은은 입구 앞에 힘없이 서 있었다.

“음…. 이래서야 냉동창고가 작동할 것 같지는 않네.”

고작 입구에서 바라본 것이지만, 물류 창고 단지 내부가 어떨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피범벅이 된 시체가 즐비했고, 창고 곳곳은 불에 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보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여기 빈 곳 아니었어?”

“이나은 헌터가 없던 동안, 다른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것 같네요. 여기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시체를 살피니, 검에 당한 상처가 있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상처는 다른 시체들에도 새겨져 있었다.

“이거 아까 본 거랑 똑같네?”

상처를 살필 때, 김화영이 다른 시체의 손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체의 손목에는 검은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요즘 유행인가? 다들 이런 걸 차고 있네.”

김화영의 말대로 다른 시체들에도 모두 팔찌나 발찌가 채워져 있었다.

검에 베인 상처. 그리고 팔찌, 발찌들.

“멸돼, 조용. 장신구 뜯으러 창고 가다….”

그를 보니, 이곳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무슨 의미인지 몰랐었는데, 이런 의미였나…. 그렇게 써 놓으면 당연히 모르지. 걔도 참.”

“안 돼!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만든 곳인데! 대체 누가! 누가!”

시체들을 살필 때, 별안간 이나은은 소리 지르며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멍청이가! 수연이 좀 부탁드릴게요. 이나은 헌터 데리고 금방 돌아올게요.”

“저 안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알겠어.”

“현아, 아직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다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아? 저 안에 이런 짓을 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누가 이렇게 만든 건지는 짐작이 가서 괜찮아. 내 짐작대로면 그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불 내성이 있는 사람도 나뿐이니, 홀로 가는 게 나아. 그럼 다녀올게요.”

수연이를 김화영에게 맡기고, 나도 그 뒤를 쫓아갔다. 다행히도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나은은 입구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누가 한 짓이야?”

이나은의 앞에는 피투성이인 사람이 헐떡대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대체 누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냐고!”

그 사람은 이나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살려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지, 지옥. 지옥을 봤어.”

급기야 경련까지 일으키며 알 수 없는 말을 외쳤다.

“됐어. 누가 했는지 내가 알 것 같으니까.”

멱살을 잡고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는 이나은을 말리며 말했다.

“네? 그걸 정현 헌터가 어떻게 알아요?”

“정이화 헌터, 어디로 갔어?”

내 짐작이 맞았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화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나은에게 붙잡힌 사람은 거품을 물며 쓰러지고 말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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