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편한 동행 (5)]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이나은이 기겁하며, 쓰러진 남성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이 사람 지금 왜 이러냐고요! 죽은 건 아니죠?”
급기야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전엔 죽어선 안 된다고요!”
그렇지만 남자가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 봐요!”
이나은은 손찌검을 이어가며 허망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허망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화를 찾아 물류 창고 단지까지 왔으나, 동생은 뜻 모를 짓을 하고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게다가 이화의 다음 행적을 알만한 사람 역시 이상한 말이나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당장 일어나서 내 물음에 답하라고!”
허탈하게 남성을 바라보는데,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의 흉부는 미세하지만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야….”
“대체 여기가 왜 이렇게 된 건데!”
“그만해. 아직 그 사람 살아있어.”
“여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말하라고!”
“그만하라고!”
“그치만! 아버지가 만든 곳이…. 불길에…. 다 타버렸다고요….”
뜻밖에 이나은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를 간신히 못 본 체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남성의 흉부에 가져다 댔다.
“봤지?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이야.”
그제야 이나은은 남성을 손아귀에서 풀어주었다.
“일단 여기가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기 전에 그 남자 데리고 서둘러 벗어나자.”
“먼저 가세요. 저는 이곳을 좀 더 살펴보다 갈게요.”
“뭐?”
“저 안에 아직 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너야말로 정신 차려! 이 남자가 깨어나면 여기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데 왜 굳이 불길로 뛰어들겠다는 건데?”
남성을 업은 채 이나은을 바라보았는데, 불길로 뛰어들겠다는 건 허투루 한 말이 아닌 듯하다.
“그 남자가 언제 깨어날지는 알고서 하는 말이에요? 그냥 기다리고 있다간, 너무 늦는다고요!”
“늦다니?”
“여기를 이렇게 만든 놈 당장이라도 제 손에 죽이려면, 그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릴 순 없어요.”
“그렇다고 저길 들어간다고? 불 내성이라도 있어? 복수라도 하려면 적어도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안 되잖아! 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헌터라도 있을까 봐? 저기 들어가는 건 그냥 개죽음인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너답지 않게 감정적이고, 왜 그래?”
타이르며 손을 잡아끌어도 이나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하영이도.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죽임을 당했다고요! 애당초 그쪽하고 함께한 것도, 그쪽이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든 이곳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랬는데, 이렇게 다 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한테 남은 건 이곳뿐이었는데….”
대신에 내 손을 뿌리치며 울부짖었다.
“필요 관계 이상으로 엮이지 말자고 했던 말 기억나죠? 여기서부터는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굳이 엮이실 필요 없으니, 저 좀 내버려 두고 가세요!”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해서 말이지.”
미안하지만, 이화가 엮인 순간 이미 이나은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송태섭 헌터도 그냥 보냈으면서, 저는 왜 붙잡는 건데요?”
“송태섭 헌터는 적어도 너처럼 죽으러 가지는 않았잖아! 송태섭 헌터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다고 하면 내가 말렸겠지!”
“참나. 전투력도 없는 주제에, 지금 걱정해주는 거예요? 웃기네요.”
“전투력도 없는 주제니까 하는 말이야. 네가 이런 곳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일행의 전력이 너무 줄거든. 내가 생존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일인데, 쉽게 죽게 내버려 둘까 보다.”
좀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곧 여기까지 불길이 덮칠 것이다. 이젠 정말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네 아버지랑 하영이란 분이 네가 여기를 못 지켰다고 불 속에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겠냐? 약속할게.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복수를 반드시 성공시켜줄 테니까, 이젠 제발 좀 냉정해져라.”
다시 한번 이나은의 손을 잡으며 약속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나를 바라보더니, 이나은은 드디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했다.
“제가 잠시 이성을 놓았었네요. 창피하게. 죄송해요. 가요, 어서. 대신 그 약속은 꼭 지켜요.”
“응.”
그 말을 듣고 물류 창고 단지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나은은 진정되었는지 뒤에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
목적지를 잃은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근처의 무너진 빌라. 이전에 이나은이 살던 곳이라 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왜 데려온 건데?”
이동하는 내내 궁금했었는지, 빌라 로비에 대충 자리를 잡자마자 김화영이 물었다.
“깨어나면 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다음 질문! 목적지가 불탔는데, 우리의 다음 계획은?”
“그건….”
말문이 막힌 이나은의 답변은 내가 대신해주었다.
“저랑 이나은 헌터는 물류 창고 단지를 불태운 이들을 추적할 생각이에요. 이건 저랑 이나은 헌터의 개인적인 일이니, 김화영 헌터는 저희와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에이, 그런 섭섭한 말을 해서 쓰나! 벌써 그런 재미있는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내가 빠질 것 같아? 지금까지 너랑 있어서 재미없던 적이 없으니, 계속 너네랑 함께할게.”
김화영이 웃으며 말하자, 이나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꼼짝없이 이 남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네. 기다리는 건 너무 지겨운데….”
김화영이 질색할 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수연이가 손을 조심히 들었다.
“그…. 제가 이 남자분 깨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해봐도 될까요?”
“네? 정말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무슨 방법인지 듣지도 않고, 이나은은 수연이의 손을 간곡하게 잡으며 말했다.
“네. 그러면 시도는 해 볼게요.”
“오! 빨리해봐! 기대된다. 이번엔 또 어떤 걸 보여주는 거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게 민망했는지, 수연이는 쭈뼛거리며 기절한 남자의 앞에 섰다.
“그럼 시작할게요.”
수연이가 손을 뻗어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 댔고, 그와 동시에 글씨가 새겨졌다.
[스킬 ‘축복’이 발동됩니다.]
수연이의 손에서 빛줄기가 뻗어나가 기절한 남성의 몸에 흡수되었다.
[플레이어 ‘이정민’의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이정민’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빛줄기가 완전히 흡수되자, 남성의 눈꺼풀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성공한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이나은은 고개까지 숙이며, 수연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는 이따 계속하고, 일단 의문점부터 해결하자고. 김화영 헌터, 저 남자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아주실 수 있나요?”
“그거야 쉽지.”
내 말에 김화영은 남성의 목에 단검을 댔다.
“여, 여기는 어디?”
마침내 눈을 완전히 뜬 남성은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목을 노리는 단검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너희 대체 누구야! 그놈들하고 같은 편이냐? 나, 날 왜 잡아 온 거야?”
“묻는 말에만 대답 잘해주면, 아플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런데 시원찮은 대답을 들으면 수전증이 오는 병이 있어서…. 그러면 그쪽 목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지?”
“네, 넵. 하, 하지만 제가 아는 건 많이 없을 거예요.”
김화영의 협박에 남성은 금세 공손해졌다.
“자, 현아. 이제 물어볼 거 물어봐.”
“네. 그럼 먼저 네가 말한 ‘그놈들’은 대체 누구야?”
“정이화 헌터…, 님의 일행 아니셨어요?”
“역시 이화가 왔다 갔구나. 그러면 너희들은 왜 물류 창고 단지에 있던 거야?”
“한 반년 전인가? 저희 세력에서 식량을 찾아다니다가, 그곳의 냉동 창고를 발견했거든요. 그렇게 많은 양의 식량을 못 본 체할 수는 없으니 저희 세력의 주둔지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어요.”
남성의 답변에 이나은이 벽을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한층 움츠러든 남성에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물어보았다.
“한 닷새쯤 되었을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입구 쪽에서 소란이 벌어졌어요. 정이화 헌터님이 저희 세력의 대장님과 할 말이 있다고 무작정 쳐들어왔거든요. 아마 다음에 왔을 때도 만나지 못하면 무력을 쓰겠다고 한 후에 돌아갔을 거예요. 정이화 헌터님의 일행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류 창고 단지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뭐? 그 명령 누가 내린 거야?”
이나은이 다그치며 말하자, 남성은 벌벌 떨며 말을 이었다.
“다, 당연히 대장님께서 내린 명령이지 않을까요? 저는 말단 헌터라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식량이 아까워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위에서 까라면 까야죠. 안 그러면 제가 죽는데.”
“어떻게든 지켜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이나은 헌터, 그만하면 됐어. 불을 지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지?”
남성의 말에 따르면 말단 헌터만이 물류 창고 단지에 남아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이후 주둔지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 이화 일행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저, 정이화 헌터님의 일행은 저희 세력의 헌터들을 모두 죽였어요.”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아있던 거야?”
“저도 죽을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질문에 답하니까 저를 두고 다들 떠나갔어요.”
“어떤 질문이었는데.”
“대장님이 어디에 계신지 물어봤어요.”
아직 목적은 모르겠지만, 이화는 이들의 대장을 쫓아 이동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둔지로 간다면 이화를 만날 수 있다.
“대장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문학경기장이요.”
“문학경기장…. 아무래도 다음 목적지는 정해진 것 같은데?”
내 말에 이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그쪽이 차고 있는 팔찌는 대체 뭐야? 유행이야?”
김화영이 남성의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 남성의 팔목에는 검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거요? 예쁘죠? 저희 대장님께서 선물로 하나씩 주신 거예요.”
“혹시 그 대장이란 사람, 이름이 강이란?”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예상했던 답변에 이나은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짚이는 데가 있어서. 그래서 너희가 뭐가 예쁘다고 그런 선물을 준 거래?”
“사실 저는 대장님과 같은 교도소에 갇혀 있던 범죄자였어요. 세상이 멸망하고, 저희 교도소의 수감자들은 대장님의 주도하에 다 함께 탈옥해서 새로운 주둔지를 세웠어요. 그리고 차츰 주변 주둔지를 무너뜨리며 세력을 넓혀갔죠.”
“응. 그래서?”
김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치워주자, 남성은 신이 나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서울시를 완전히 차지하고, 인천으로 세력을 넓히기 전에 대장님은 선언하셨어요. 대장님이 지배하는 영역에서는 무슨 짓이든 저질러도 된다고요. 힘이 곧 법인 세상. 그야말로 이상세계가 만들어진 거죠! 그 기념으로 대장님께서 전자발찌를 하나씩 나누어 주셨어요. 범죄자임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으니, 전자발찌를 장신구처럼 당당하게 달고 다니라면서요. 멋있죠! 남는 거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남성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김화영에게 말했다.
“네놈들, 정말 망할 놈들이구나!”
“네? 저희….”
남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화영의 단검이 빛났다.
“김화영 헌터!”
“아…. 미안. 더러운 게 눈앞에서 지껄이길래.”
“됐어요. 궁금한 건 이미 다 알아냈어요. 잘하셨어요.”
[플레이어 ‘김화영’에게 플레이어 ‘이정민’의 ‘랜덤 아이템 박스’ 5개가 귀속됩니다.]
김화영이 단검을 품 안에 집어넣자, 남성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팔찌가 그런 더러운 거였다니…. 서울시가 그 강이란이란 사람 손에 들어간 거죠?”
“응. 그런 것 같네. 송태섭 헌터가 우리를 떠난 이유가 있었네.”
이나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기운을 차리고 물었다.
“생각보다 상대가 강력하네요. 그래도 뭐 상관없지만요. 어떻게 할래요? 목적지도 정해졌는데, 바로 출발하죠? 아직 산성비가 내리기까지는 시간 넉넉하게 남았어요.”
“재미있겠네! 난 좋아!”
“저는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는 거죠?”
빌라 바깥으로 향하는 이나은에게 수연이가 물었다.
“몰라서 물어요?”
“아…. 그렇죠. 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함께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이제 제가 알아서 머물 장소를 찾아볼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이나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같이…. 가요….”
“네?”
“같이 가자고요!”
그렇게 쏘아붙이고, 이나은은 완전히 밖으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