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27화 (28/168)

[9. 한빙지옥 (3)]

“내가 무슨 짓을 꾸민다고? 에이- 그럴 리가.”

시련이 시작되고 함께 행동한 이래로 미심쩍은 부분이 생길 때마다 내게 먼저 찾아온 이나은이다.

그러니 지금도 이나은이 먼저 찾아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애당초 그걸 바라고 일전의 회의 때 일부로 미심쩍은 점을 남긴 거니까.

“그보다 요즘 이런 상황이 너무 잦은 거 아니야?”

“무슨 상황이요?”

“남들 몰래 둘이서만 작당 모의하는 거. 그러니까 자꾸만 김화영 헌터가 정분났냐고 놀리지.”

“그쪽에서 제가 먼저 찾아와서 물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드시잖아요! 하! 이상한 의심이나 받고, 최악이네. 아니, 이게 아니라! 봐요! 지금도 은근슬쩍 말 돌리잖아!”

다만 여기서 솔직하게 답했다가는 자칫 수연이가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충 말을 둘러대며, 수연이의 눈치부터 살폈다.

“여유로운 게 아니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비석의 ‘무적’ 특성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그러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는 거지.”

다행히도 수연이는 상점을 둘러보는 중인 듯,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듣지 못한 것 같다.

“할 수 있는 게 없긴 뭐가 없어요. 그곳을 지키던 방어팀을 모두 쓰러뜨린 다음에 자정까지 그곳에서 대기했다가 바로 비석을 파괴할 수도 있었잖아요.”

“대기하는 동안 혹시라도 방어팀에서 우리를 완전히 공방전에서 배제하려고 많은 헌터를 파견해 포위망을 형성하기라도 하면, 인원이 적은 우리는 그 순간 시련 광탈이야. 무엇보다 회의 때 말했듯이 위험한 변수는 모두 차단하고 싶기도 하고.”

차분히 제약을 짚어주며 수연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은근슬쩍 장소를 옮겼다. 그런 나를 뒤따르며 이나은은 계속해서 캐물었다.

“총 네 곳의 비석과 하나의 동상을 파괴해야 하는데, 마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공격팀의 인원은 총 20명. 우리 말고도 16명이나 되는 인원이 있으니 시간 걱정하기엔 아직 일러. 위험 감수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본 후에 해도 충분해. 근데 이거 너도 다 알고 있을 내용이잖아. 대체 뭘 묻고 싶은 거야?”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다 말한 내용….”

“아니요.”

이나은은 내게 한층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완전히 변수를 차단하실 생각이면, 여기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먹방이나 하고 있지 않았겠죠. 오히려 계속 정찰을 나섰겠죠. 하루 더 지켜보자는 이유가, 회의 때 말씀하신 이유가 아닌 거잖아요. 이번엔 말 돌리시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봐요. 아니면 맞고 말씀하실까요?”

“알겠어. 말하면 되잖아. 주먹은 내려줘.”

어차피 이나은에게 말해줬어야 하는 내용이었기에 목소리 낮추어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네 말이 맞아. 너도 알다시피 혹시 모를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자는 건 그냥 핑계야.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따로 있어.”

“기다리고 있다는 게, 다른 쪽의 비석이 공격받는 상황인 거죠? 그렇게 되면 방어팀은 여유 인원들을 그쪽으로 지원 보낼 수밖에 없으니, ‘인천 중앙 공원’ 쪽을 저희가 공격해도 곧바로 헌터를 지원해주진 못하겠죠. 제 말 맞죠? 그쪽 생각 뻔히 보인다니깐.”

“맞아. 우린 그때를 틈타 움직일 거야. 너는 그때 지금 내가 일러주는 대로만 움직이면 돼.”

시간을 들여 회의 때 말해주지 않았던 진짜 내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내 설명을 들은 이나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그렇게 하죠. 근데 궁금한 게 딱 한 가지 더 있어요.”

“뭔데?”

“회의 때 그 작전을 솔직하게 말 못 한 건 임수연 헌터 때문?”

“다른 공격팀을 희생시키자는 말을 들었다간 분명 반대할 테니.”

그리고 많은 사람을 지키겠다고 내 앞에서 결심한 수연이에게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기도 했다.

“임수연 헌터가 저희 일행에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렇게까지 하셔야 해요? 임수연 헌터만큼은 더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가짐인가?”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긴 할 거다. 하지만 그것보다 뭔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더 컸다. 수연이 앞에선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만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수연이를 후원해주는 초월자도 묘하게 걸리기도 하고. 왜 그런지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니, 됐다. 좋은 계획 갖고 있으면 됐지. 그러면 이번 시련도 잘 살아남자고요.”

이나은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실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데.”

“응?”

“그땐 말 못 했었는데, 고마웠어요. 그…. 복수해주신다고 한 거. 이 말은 하긴 해야 할 거 같아서. 할 말 다 했으니까 전 쉬러 가볼게요. 저기 임수연 헌터,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말을 끝으로 이나은은 쏜살같이 수연이를 향해 달려갔다.

***

동이 트기 전부터 김화영과 함께 방어팀의 동향을 살피기 시작해, 그로부터 벌써 네 시간이 지났다.

“상황은 좀 어때요?”

나를 남겨두고 홀로 비석 근처까지 다녀온 김화영에게 상황을 묻자, 어이없다는 투의 답변이 돌아왔다.

“헌터 다섯 중 둘은 자고, 나머지 셋이 보초 서고 있어.”

“교대로 돌아가면서 잠 보충하나 보네요.”

“셋도 설렁설렁 잡담하면서 서 있더라. 내가 가까이 가도 눈치도 못 채던데? 그리고 괴수는 이 근처에 없는 거 같아.”

“근데 분명 어제는 일곱 명이 보초 서던 거 같은데…. 다른 인원이 어디 매복한 것 같지는 않죠?”

“응. 매복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여기 방어팀에서 버리는 패인 게 아닐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긴 하네요.”

오랜 시간 매복하며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을 지키는 다섯 헌터는 생각이란 게 없어 보인다는 것.

비석에 낙서하는 헌터가 있는가 하면, 보초를 서며 졸기까지 하는 헌터도 있고. 심지어 이따금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한다.

애당초 모습을 숨기려는 생각도 없는 듯 당당하게 비석 앞에 주르르 서 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이쯤 되면 확실해졌다. 방어팀의 수장은 이곳을 버리고, 나머지 세 곳을 지키는 데에 더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놈들로 이곳을 지키는 팀을 꾸렸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싸우자!”

“저기에 상급 헌터라도 끼어있으면 어쩌려고요?”

“너를 미끼로 삼고 도망친다?”

“네?”

“이건 정답이 아닌가?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으니까 재미없단 말이야. 상급 헌터면 여기 말고 동상 쪽에 있지 않을까?”

“그럴 것 같기는 해도.”

“잠깐. 조용.”

별안간 김화영이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을 집중해서 보니, 미세하게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안 그러면 나랑 놀 생각인 걸로 알겠어.”

경고와 동시에 김화영은 단검 두 자루를 던졌다.

“항복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죽어선 안 됩니다. 딸아이가 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주일 씨? 왜 우리가 밑인 것처럼 그리 굽히지? 그런 태도 고치라고 우리 형이 몇 번이나 말했어!”

“죄송합니다, 박우민 헌터님.”

“그쪽도 단검은 치우시지?”

그러자 단검이 꽂힌 나무 뒤편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두 남성이 등장했다. 대화 내용을 보아 창을 장비한 헌터가 최주일, 거대한 석궁을 장비한 헌터가 박우민인 듯싶다.

“애초에 우린 그쪽과 싸울 생각도 없었어. 이 비석을 파괴하러 왔다가 동선이 겹친 것뿐이지, 그쪽이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다고. 그리고 눈이 제대로 달려 있으면 우리 머리 위의 글씨를 읽어봤을 텐데? 혹시 그 눈, 장식인가? 아니면 글을 읽을 줄 모르나?”

연신 굽실거리는 최주일과 달리 박우민은 침을 퉤 뱉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은 안 된다니까.”

“기분 나쁜 놈인 건 맞아도 적은 확실히 아니네요.”

박우민의 말대로 두 헌터의 머리 위에는 ‘공격팀’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됐고. 당신들은 방해 말고 빠져있어. 우린 이제 슬슬 저 비석을 부술 테니, 겁쟁이들은 뒤에서 지켜나 보고 있으라고. 그럼 내가 분석을 마쳤으니, 그를 토대로 최주일 씨가 홀로 실적 좀 보여봐.”

“분석이요? 어떤….”

“척하면 척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식한 놈!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해?”

“아닙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얼른 가서 비석 부수고 와.”

“네, 알겠습니다!”

박우민의 도발에 김화영이 단검 두 자루를 뽑아 들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도 마침 저쪽에 쳐들어갈 예정이었거든. 재밌게 되었네. 누가 먼저 부수나 내기라도 할까?”

“나 같은 천재가 우둔한 당신들과의 내기에서 질 리가 없지. 나야 좋네. 최주일 씨, 들었지? 반드시 먼저 부수어. 그러면 실적으로 인정해주지.”

“김화영 헌터! 도발에 넘어가면 어떻게 해요? 같은 편끼리 이러지 말고 저희 일단 진정하죠.”

내가 나선 뒤에야 김화영은 단검을 집어넣었다.

“쳇. 그러면 당신네는 쳐들어갈 것도 아니면, 무엇을 위해 여기서 대기하고 있던 거야?”

[82032-B 구역 공격팀의 플레이어 ‘임성윤’이 ‘인천 구치소’에 위치한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17명

- 잔여 동상 수 : 1개

- 잔여 비석 수 : 3개

- 비석은 현재 ‘인천 중앙 공원’, ‘예술회관’, ‘인천 터미널’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 현재 위패가 생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 모든 비석을 파괴하고, 동상 앞 위패를 부러뜨리십시오.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계획이 자꾸만 틀어지려는데, 타이밍 좋게 글씨가 새겨졌다.

“봐봐, 다른 쪽이 실적을 보이고 있잖아! 우린 이제 저 비석을 부수러 갈 테니 말리지 말라고.”

“잠시만요. 부수는 건 부수는 건데, 사실 저한테 계획이 하나 있어요. 계획대로 움직이면…, 큰 실적을 쌓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오호? 큰 실적? 거참 좋은 단어군. 최주일 씨, 잠시 멈추게. 그래, 어디 한 번 자네의 계획을 말해보게나.”

내가 고른 단어에 다행히도 박우민은 관심을 보였다.

“먼저 박우민 헌터와 김화영 헌터가 각자 무기로 원거리에서 보초 둘을 쓰러뜨려요. 그 이후, 남은 헌터 셋을 비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유인하는 거예요. 그 틈에 지금 대기하고 있는 제 일행들이 비석을 부술 겁니다.”

“좋은 생각이군. 근데 왜 우리가 직접 저들과 싸우지 않고 유인을 해야 하지?”

“저들의 등급을 알지 못하니까요. 혹시라도 강한 등급의 헌터가 있다면 정면승부는 힘들 수도 있어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안전하게 하는 편이 좋죠.”

“알겠네. 그럼 내가 먼저 여기서 보초 한 놈을 저격하면 된다는 거지? 바로 해보자고.”

“네? 여긴 너무 멀잖아요. 좀 더 가까이 가서 김화영 헌터랑 같이….”

말릴 틈도 없이, 전투의 시작을 박우민의 화살이 알려버렸다.

“뭐야? 아저씨, 화살 맞추지도 못하면서 왜 쏜 거야?”

화살은 보초의 근처에도 못 가고 힘을 잃은 채 떨어졌다. 그 덕분에 남은 헌터들만 모두 깨어나 버렸다.

“자네가 갑자기 말 걸어서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쏘고 나서 말 걸었거든요!”

“어? 그런데 유인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최주일의 말에 비석 쪽을 보니, 초록빛 머리의 헌터를 선두로 깨어난 헌터들과 보초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미 모두 도망친 후였다.

“에헴! 내 화살에 다들 겁먹었나 보군. 어때, 내 멋진 활약이.”

“멋있으십니다. 역시 박우민 헌터님입니다.”

“현아, 잘 된 거 맞지?”

“네…. 예상외로 너무 허무했는데요?”

“그럼 공을 세운 이 몸이 직접 비석을 부수도록 하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박우민의 뒤를 따라 비석의 앞까지 다가갔다.

‘미추홀에 터를 잡았으니, 아- 허망하도다.’

비석엔 짧은 글귀가 쓰여있었다. 그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박우민은 석궁으로 비석을 내리쳤다. 몇 번을 내리쳐도 비석이 깨지지 않자, 답답했는지 최주일에게 명령을 내렸다.

“최주일 씨, 마무리는 내 특별히 넘겨주지.”

“감사합니다!”

최주일이 창으로 강하게 내리치자 비석은 단번에 깨졌다.

[82032-B 구역 공격팀의 플레이어 ‘최주일’이 ‘인천 중앙 공원’에 위치한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재미없게.”

“그러게요. 좀 싱겁긴 했네요. 일행들한테나 돌아가죠.”

“어? 근데 뭐가 더 적히는데?”

[비석에 걸린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발동됩니다.]

[A급 괴수 ‘사흉 도철’이 등장합니다.]

[‘사흉 도철’이 스킬 ‘능약’을 발동합니다.]

[스킬 범위 내의 ‘사흉 도철’보다 등급이 낮은 플레이어는 모두 즉사합니다.]

[‘사흉 도철’의 스킬 ‘능약’이 24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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