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33화 (34/168)

[9. 한빙지옥 (9)]

“김화영?”

박우민이 입에 담은 이름에 당황해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머리 아플 텐데?”

그렇지만 이내 천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으- 여긴 왜 이리 천장이 낮은 거야?”

“보면 모르겠나? 그야 승용차 안이니 그러지.”

머리를 문지르는 나를 보던 박우민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짜증 나는 인간의 말대로 나는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 못 한다니….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은 상종하기 싫다니깐. 됐고, 정신 차렸으면 어서 내리기나 해!”

퉁명스럽게 말하며 박우민은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리니,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나 같이 망가진 차들이 널려 있는 주차장. 그 뒤편에선 눈보라에 가려진 야구경기장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예술회관에 이어서 이번에는 야구경기장? 그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했길래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일행을 속여 야구경기장에 보내 놓았다더니, 이젠 나까지 요 앞으로 옮겨놓았다.

이딴 짓을 한 이유가 분명 있긴 할 텐데, 도무지 이도현의 심중이 짐작 가지 않는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진짜 혼란스… 럽, 네.”

‘난 혼란, 그 자체야.’

그 순간 이도현의 목소리와 함께 내가 죽는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목이 베이고, 괴수한테 씹혀 몸에서 창자가 흘러내리는 장면들.

“망할….”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숨이 가빠질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자마자 미친놈이라고 욕하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몸을 왜 이리 떨어? 괜찮아?”

“네…. 괜찮아요.”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일단 여기 앉아서 나 따라서 호흡해. 후- 하- 후- 하-”

“배고플 텐데 우선 이거라도 먹어.”

간신히 호흡을 추스른 내게 김화영은 통조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일련의 일을 겪고 기절해 있던 터라 무척 허기진 참이었다. 사양하지 않고 통조림을 받아들자, 김화영도 자신의 몫을 먹기 시작했다.

“내 것은 없나? ‘인천 터미널’의 비석이 부서진 이후, 뭘 먹지 않은 터라 허기지는데….”

“네? ‘인천 터미널’의 비석이 부서졌다고요?”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14명

- 잔여 동상 수 : 1개

- 동상 앞 위패를 부러뜨리십시오.

박우민의 말에 클리어 조건을 확인해보니, ‘인천 터미널’에 있던 마지막 비석은 부서진 후였다.

“정말이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마지막 비석까지 부서졌구나.”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런 취급 받고 있다는 걸 우리 형이 알면 얼마나 한심하게 바라볼까. 또 박씨 가문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엄청나게 혼내시겠지.”

불평은 김화영이 통조림을 건넬 때까지 이어졌다. 김화영은 통조림으로 박우민의 입을 막고는 내게 물었다.

“마지막 비석이 부서진 사실을 모르는 걸 보니 ‘인천 터미널’의 비석이 부서지기 전에 기절했나 보네?”

“네. ‘예술회관’의 비석이 부서지고 얼마 안 되어서 기절했어요.”

“‘예술회관’ 비석이 부서졌을 때면…. 어제 기절한 거구나. 엥?”

김화영은 참치를 한 입 떠먹다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야구경기장에 끌려간 거 아니었어?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있는 거야?”

“속으신 거예요. 전 처음부터 ‘예술회관’에 붙잡혀 있었어요.”

“‘예술회관’? 오! 방어팀 어떤 멍청이가 그쪽 비석을 스스로 부수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네가 엮여 있었구나! 재미있는 장면 놓쳤네. 아쉬워라.”

속은 데에 화낼 줄 알았는데, 저런 반응이 나올 줄이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김화영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며 무릎을 탁 쳤다.

“잠깐. 그래도 이상하잖아. 거기서 기절했는데 왜 이 근처에서 발견된 거야?”

“그게 저도 궁금하네요.”

다 먹은 통조림을 땅에 내려놓고 이번엔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묻는 건데, 혹시 저를 발견했을 때 상황이 어땠어요? 아니, 그전에 수연이랑 이나은 헌터는 어디 갔어요? 제가 붙잡혔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음…. 그게 말이지. 뭐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잠깐만…. 아! 그 징그럽게 생긴 사흉 뭐시기!”

“‘사흉 도철’이요?”

“응응! 그 괴수 쓰러뜨리고 너희 찾으러 갔거든?”

그런 그 둘이 보게 된 건, 기절한 수연이와 죽어 있는 방어팀 헌터들. 심지어 나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으니 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게 이도현.

‘자기들이 찾는 사람 야구경기장에 있어. 애타게 자기들만을 찾던데?’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길래 어이없긴 했는데, 뭐 어쩌겠어? 너를 구하려면 야구경기장으로 오라는데. 그래서 우린 수연이가 깨어나자마자 네가 있다는 곳으로 갔지. 그랬는데 이번엔 웬 괴수들이 우릴 반기더라.”

“괴수요?”

“응. 이전에 봤던 불 뿜는 멍멍이 기억해? 그 멍멍이처럼 검은 발찌 찬 괴수들이 그라운드에 우글우글 몰려있었어. 우리는 괴수들이 너를 지키고 있는지 알고, 차례차례 쓰러뜨렸지. 그런 와중에 박우, 성? 그 사람이 나타나서 한 가지 제안을 했어.”

그 내용은 일행을 돌려받고 싶으면 자신과 게임을 하라는 것.

“게임에서 자기가 지면 너를 돌려주겠다는 거야. 대신, 반대의 경우에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자세를 한 포즈씩만 취해달라 했어.”

“고작 포즈만 취하면 된다고요? 얘기만 들어도 너무 수상한데요?”

“수상하면 뭐 어때. 게임이라는데 당연히 재미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계약서가 작성되었다는 글씨가 새겨지더라고.”

“게임은 어떤 거였어요?”

그쪽에서 제시한 게임 종목은 괴수와의 일대일 전투. 그저 괴수 한 마리와 싸워서 이기면 되는 간단한 게임이었다.

“우리 쪽은 나은이가 나섰는데, 상대 쪽은 진짜 진짜 징그럽게 생긴 괴수가 나왔어. 막 입에 손 엄청나게 달려 있고, 호랑이 주제에 날개도 있더라. 어휴, 다시 생각해도 징그럽네.”

“그래서 게임은요? 게임은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당연히 우리가 졌지.”

이나은이 괴수에게 패배하자 계약이 이행된다는 글씨가 새겨졌다고 한다.

“그러곤 나은이랑 수연이가 이상한 자세로 몸이 굳어버렸어. 한 포즈씩 취해달라는 게 사실 영원히 그 포즈를 취해달라는 거였을 줄이야….”

그럼 그렇지. 어쩐지 너무 우리 쪽에게만 유리한 조건이다 싶었다.

“근데 김화영 헌터는 어떻게 도망쳤어요? 계약이 이행된다면 김화영 헌터도 몸이 굳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이상한 포즈 취하기 싫다고 생각하니까 계약이 없던 걸로 되던데?”

“네?”

“다행히 이 근처에 표식 미리 해 둔 게 있어서 얼른 스킬 써서 도망쳤지. 숨 고르고 있으니까 저편에서 이 아저씨가 너를 업고 오는 게 보이더라고.”

박우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불평했다.

“나도 일행 한 명이 야구경기장에 붙잡혀서 구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자네가 쓰러져 있는 게 보이더군. 같은 공격팀을 놓고 갈 순 없지 않나? 그래서 안전한 곳까지만 옮겨주자 생각했지.”

“저 발견했을 때, 다른 헌터는 안 보였어요?”

“자네 홀로였네. 다른 헌터는 분명 없었어. 어쨌든 그런 와중에 김화영 씨하고 만난 거네. 그게 어젯밤의 일일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절한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윤곽이 잡혔다.

“그럼 김화영 헌터도 다른 헌터는 못 본 거죠?”

“응.”

“제가 야구경기장에 붙잡혔다고 거짓말 한 헌터도 못 본 거고요?”

“흠, 그 사람은 공원에서 본 이후엔 못 봤어. 그러고 보니 야구경기장에서도 못 봤네.”

하지만 여전히 이 모든 일을 꾸민 이도현의 목적은 전혀 모르겠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은 이도현이 의도한 대로 야구경기장에 갈 수밖에 없나….

“일단 서둘러 야구경기장으로 가죠. 이나은 헌터랑 수연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에요.”

“당연하지! 아저씨도 같이 갈 거지? 동료 붙잡혀 있다면서. 그 동료도 게임 져서 몸이 굳은 거야?”

“그, 그런 셈이지. 크흠. 무엇보다 내가 없다면 무사히 너희 동료를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당연히 이 한 몸 희생해서 함께 들어가 줘야지.”

[경고! 복원된 문학경기장 시설에는 ‘파괴 불가’ 속성이 부여되어있습니다.]

[이번 시련을 위해 힘써준 ‘절름발이 공돌이’님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야구경기장이 시야에 들어오자 새로운 글자들이 새겨졌다.

“어쩐지 여기 경기장들만 너무 멀쩡하다 싶었는데….”

시련을 위해 문학경기장 시설들을 복원하고 파괴 불가 속성까지 부여했다니. 이럴 힘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모든 건물을 복원시키고 파괴 불가하게 만들어 주던지. 정말 보면 볼수록 초월자란 놈들 역겹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초월자를 욕하다 보니, 금세 야구경기장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멈추어 선 곳, 야구경기장 안으로 향하는 입구에선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야구단의 응원가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전기까지 복원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자신의 작품에 뿌듯해하며, 응원가를 따라 부릅니다.]

내부를 얼핏 살피니,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넓은 통로에선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이 통로를 따라가면 그라운드가 나오는 것 같네.”

박우민은 벽에 붙은 야구경기장 안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구경기장의 구조는 정말 간단했다.

입구로 들어가 쭉 앞으로만 가면 외야. 통로 양옆의 계단을 오르면 관중석.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은 총 삼층까지. 그 외에는 홈 베이스 쪽 관중석엔 방송 시설이 있다는 것 정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게?”

“야구경기장 구조가 원래 이랬어요? 제 기억하곤 좀 다른 것 같은데.”

“초월자님이 손 쓰신 게 아닐까? 귀찮았나 보지.”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자신이 개조한 작품을 자랑하며 콧대를 세웁니다.]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쓰레기는 길바닥에 버리고, 안 쓰는 불은 항상 켜두기를 강조합니다.]

“복잡한 것보다야 차라리 이렇게 간단한 게 낫지 않나?”

“그렇긴 하죠. 그럼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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