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34화 (35/168)

[9. 한빙지옥 (10)]

“이럴 거였으면 그냥 복잡한 게 나을 뻔했네요.”

밖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그라운드로 이어진 통로는 너무나 길었다. 거의 이십 분가량 걸은 것 같은데, 여전히 그라운드는 보일 기미조차 없었다.

“구조가 간단하면 뭐 해요. 이건 길어도 너무 길잖아요.”

쓸데없이 길기만 한 통로에 불평하고 있자니 한창 들리던 응원가가 끊겼다.

“어? 응원가 좋았는데, 끝나 버렸네…. 현이, 네가 불평해서 그런 거 아니야?”

“설마요.”

“너, 설마가 사람 잡는다? 아- 그냥 걷기엔 너무 지루하단 말이야. 앵콜! 앵콜!”

“그런다고 다시 틀어주겠나? 그리고 좋긴 뭐가 좋아! 자넨 긴장감이란 게 없나? 어디서 적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왜 그리 노래를 흥얼거려? 아주 그냥 우리 여기 있다고 광고하지그려?”

김화영이 칭얼거리는 게 듣기 싫었는지 박우민의 훈계가 시작되었다. 그에 지지 않고 김화영도 톡 쏘아붙였다.

“어차피 응원가 소리가 더 커서 제가 흥얼거리는 건 묻히거든요! 아마도?”

“아마도? 지금 아마도라고 했나! 장난하는 것도….”

박우민의 뒷말은 방송에서 나오기 시작한 지지직 소리에 묻혔다.

“응원가 다시 틀어주려나 보다!”

김화영의 바람과 달리 방송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어?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그 게임 하자고 한 사람이다! 박, 우, 뭐였더라?”

“박무성 헌터 말하는 건가? 이름은 좀 외우지?”

“아! 맞다! 그 이름이었지. 엥? 근데 아저씨가 저 사람 이름은 어떻게 알아?”

“그, 그게 말이지….”

박우민은 말을 흐린 채 딴청을 피웠다.

김화영의 말대로 이상하긴 하다. 박우민은 어떻게 박무성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기대했던 응원가가 아니라 미안하네.’

자세한 내막을 캐묻기 전, 박무성이 본격적인 방송을 시작했다.

“비겁하게 방송하지 말고, 당장 튀어나와!”

‘어휴, 무서워라. 그쪽이 내 계약을 멋대로 풀어버린 걸 봤는데, 어떻게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겠어. 근데 홀로 도망 잘 가놓고, 여긴 왜 다시 기어들어 온 거야?’

“당연히 나은이랑 수연이 데리러 왔지! 빨리 풀어줘!”

‘그 말 듣고 내가 퍽이나 풀어주겠다. 어디서 큰 소리야! 지금 본인 주제를 모르나 보지? 강이란 헌터님께서 아량을 베풀지 않았으면 너희 일행은 지난번 여기 발 들인 순간에 이미 저세상행이었어. 그러니 옆에 빠져서 강이란 헌터님께 감사 인사나 올리고 있으라고. 지금 방송 켠 건 비겁하게 도망친 네 놈이 아니라 정현 헌터랑 대화하기 위해서니까.’

박무성의 빈정거림에 결국 김화영은 불같이 화를 내며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파괴 불가’ 속성이 걸린 스피커에선 박무성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짓으로 힘 빼긴. 추태도 정도껏 부려. 이래서 무식한 것들은 안 된다니까. 어쨌든 정현 헌터, 이제 옆에 이상한 사람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대화해볼까? 너한테 물어볼 게 있거든.’

“물어볼 거?”

‘너, 강이란 헌터님과 무슨 사이야?’

“뭐?”

‘공방전이 시작되고 강이란 헌터님께 받았던 지시는 공격팀을 족칠 괴수들을 아무도 모르게 야구경기장에 모으라는 거였어. 심지어 같은 방어팀 헌터들에게도 이런 지시가 있었단 사실을 숨기라고 하셨다고. 근데 왜 뜬금없이 여기에 네 동료를 보낼 테니 게임을 해서 인질로 붙잡아두라고 지시를 바꾸신 거지?’

강이란을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사이냐니. 접점이라 해봤자, 송태섭에게 이름 정도 들은 것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네놈들을 여기로 보내지 않고도 인질로 붙잡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실 텐데. 아니면 그냥 죽여버려도 되는 거고. 분명 너희랑 강이란 헌터님 사이에 접점이 있으니 이런 명령이 내려온 거 아니겠어?’

“접점이라면 송태….”

‘그렇다고 송태섭의 일행이라 그런 거라곤 하지 마. 고작 그딴 이유로 비장의 패를 숨긴 장소에서 너희랑 게임 하라는 건 아니셨을 테니깐. 내가 모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강이란 헌터님의 충신으로서 그 정도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그러니 당장 말해!’

“그런 거면 내가 아니라 강이란 헌터에게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변경된 지시를 내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다른 이를 통해 전달했는데 어찌 감히 이유를 물어볼 수 있겠나!’

“역시 여기도 그 미친놈이 연관된 건가….”

강이란이 변경된 지시를 직접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애당초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는 것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도현이 강이란의 이름을 팔아 박무성을 속인 것 같다.

‘내가 못 미더웠던 건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얼마나 충성을 다했는데! 서울을 먹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나라고! 물론 물류 창고 단지에서 일을 한 번 망치긴 했지만…. 그래서 이번 공방전에선 동생까지 바쳐가며 거기서의 일을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했는데….’

저렇게 자책하는 걸 보니 박무성은 자신이 속은 사실도 모르는 듯하다.

‘이것 땜에 얼마나 스트레스받았는지 알아?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두 가닥이나! 무려 두 가닥이나 빠졌다고! 그러니 시치미 그만 떼고 내 물음에 답해!’

박무성이 다그쳤으나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계속 그렇게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거지? 그래, 계속 그래 봐. 어차피 넌 내게 사실대로 불게 될 테니까. 붙잡아 둔 네 일행 한 명씩 족쳐볼까?’

“안 돼! 나은이랑 수연이한테 무슨 짓 하기만 해봐! 내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지금 내가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지 모르겠나! 예의 없이 끼어들기는! 그도 그렇고 인제 와서 의리 지키는 척하는 것도 어이없군. 됐고, 일단 그라운드로 와. 거기서 이야기 계속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스피커에선 다시 응원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통로를 십여 분 정도 더 걷자 마침내 그라운드가 나왔다.

그라운드엔 수많은 괴수가 모여있었다.

[A급 괴수 ‘스켈레톤’이 등장합니다.]

[C급 괴수 ‘불개’가 등장합니다.]

[B급 괴수 ‘고획조’가 등장합니다.]

[B급 괴수 ‘빙혈어’가 등장합니다.]

서른 마리가 넘어가는 다양한 등급의 괴수들은 제자리에 멈춘 채로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했다.

“정현 헌터! 무사하셨던 거예요?”

그런 괴수들 사이에 이나은과 수연이가 있었다.

1루에 서서 3루로 송구하듯 팔을 쭉 뻗은 이나은과 3루에서 공을 받으려는 듯 하늘로 양손을 뻗은 수연이. 두 사람은 몸 어딘가가 묶인 것도 아닌데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몸이 굳었다는 게 저거였군요.”

“응. 엄청 불편해 보이지?”

“근데 왜 두 사람뿐이에요? 박우민 헌터의 동료분은 어디 있어요? 보이질 않는데요?”

“어? 그러게. 생각해보니까 처음에 왔을 때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뭔가 걸린다.

따지고 보면 박우민은 ‘인천 중앙 공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땐, 실적을 운운하며 먼저 방어팀 헌터를 공격하고 비석을 부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랬던 사람이 죽음 이후에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을 땐, 비석을 공격하기는커녕 욕설을 내뱉으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땐,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행동에도 그저 실적을 원하는 겁쟁이라 여겼다.

그랬는데 이번엔 방어팀 헌터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않나, 일행이 붙잡혔다고 거짓말을 하기까지.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많다.

“그, 그게…. 내가 착각했나 보군. 허허, 여기가 아니라 옆의 경기장이었는데. 이런 실수를 했다니, 창피하군.”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겠어? 아저씨, 너무 부끄러워하진 마. 나도 자주 그런 실수해.”

“소란스러운 걸 보니, 드디어 온 것 같군.”

찝찝함의 원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 관중석에서 머리가 거의 벗어진 중년의 남성이 나왔다.

“현아, 당장 도망쳐! 여기 있다간 너까지 위험해져!”

“내가 초대해서 온 건데, 도망치긴 무슨? 안녕, 네가 정현 헌터구나?”

넥타이를 정돈하며 남성은 그라운드가 가장 잘 보이는 쪽에 자리 잡은 채 우리를 내려다봤다.

“내 작품 어때? 표정을 보아하니 만족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넓은 그라운드에 괴수만 있는 게 가슴 아파서, 내가 한 번 꾸며봤어. 모름지기 야구경기장이라면 선수들이 이렇게 베이스를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보다 겁도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용기 하난 가상하네. 어지간히 일행이 소중한가 봐? 그래서 이젠 말해줄 생각이 들었어?”

“미안하지만, 강이란 헌터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어.”

“여전히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군. 그러면 우리 게임 하나 하지. 강이란 헌터님의 명령이니 거부할 생각은 하지 마. 괜히 힘 빼지 말고 순순히 하겠다고 답해.”

[SS급 괴수 ‘사흉 궁기’가 등장합니다.]

박무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관중석 구석에서 날개 달린 거대한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광판만 한 괴수의 발목에는 검은 물체가 채워져 있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이나은을 이겼다는 그 괴수인 것 같다.

“아니면, 인질 다리라도 하나 뜯고 다시 이야기할까?”

“제시할 게임이 어떤 건데?”

“간단해. 넌 지금부터 내가 조종하는 괴수와 싸우기만 하면 돼. 괴수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네 승리. 그러면 인질들을 모두 풀어줄게.”

“만약 내가 질 경우에는?”

“그야 너랑 옆의 헌터들도 이 인질들처럼 되는 거지. 지금 당장 네 일행을 모두 죽일 수도 있는데, 이 정도면 많이 양보한 거 아닌가?”

“정현 헌터! 절대 응해선 안 돼요!”

이나은이 외쳤지만,

“좋아. 그렇게 하지.”

저 뒤에 SS급 괴수가 버티고 있는 이상, 게임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레이어 ‘정현’이 계약에 응했습니다.]

[계약서가 작성됩니다.]

내가 응하겠다고 답하자, 박무성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생겨났다.

“참, 계약서에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지. 조항의 내용은 패자는 승자의 질문 한 가지에 반드시 진실을 답해야 한다는 것.”

[계약서에 조항이 추가됩니다.]

“현아, 안 돼!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에 응한 거야!”

수연이의 울음 섞인 외침에 박무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일행이 저리 걱정하는 데 괜찮겠나? 보아하니 등급이 낮은 헌터인 것 같은데, 내 특별히 자네를 배려해서 B급 괴수를 상대로 내보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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