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11)]
“어디 보자. B급 괴수에 뭐가 있지? 흠…. 그래, ‘빙혈어’는 어때?”
“좋을 대로 해.”
“좋을 대로 하라니? 자신감이 넘치는 거야? 아님, 포기한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포기한 게 맞다.
게임에 응하긴 했지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괴수와의 일대일 승부에 놓인 이상, F급 헌터인 내가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믿을 거라곤 ‘예술회관’에서 ‘사흉 혼돈’을 물어뜯을 때 신체를 재생시켜준 ‘라우테’ 특성 정도인데, 그마저도 ‘빙혈어’가 순순히 내 손에 붙잡혀 물어뜯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다.
“어찌 되었든 네 상대는 ‘빙혈어’로 결정할게.”
문제는 여기서 패배하여 일행과 함께 몸이 굳는다면 그대로 이도현의 인질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또다시 그런 미친놈의 손아귀에 들어갈 바엔….
차라리 여기서 괴수한테 죽고 귀환해서 게임을 하지 않고도 일행을 구할 방법을 찾는 편이….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고…. 짜증 나네.”
“게임 시작하기 전에 장내부터 정리해볼까?”
박무성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자, 괴수들이 물러나고 투수 마운드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검은 등지느러미만이 남았다.
“거기 도망친 놈. 참고로 정현 헌터 도와줄 생각은 말아. 혹시 몰라서 계약서에 네가 돕는다면 그 즉시 패배로 인정한다는 조항도 써 두었으니.”
“엑!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뭐, 뻔하지. 그러면 정현 헌터가 2루 베이스를 밟는 순간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어.”
알겠다고 말했지만, 섣불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내가 여기서 죽고 귀환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막상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도현에게 죽임을 당한 기억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망할.”
“현아, 잠깐만.”
머뭇거리는 내게 별안간 김화영이 다가왔다. 그리곤.
“억.”
그대로 양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잖아요. 뭐 하시는 거예요?”
“아파?”
“당연히 아프죠.”
“꼭 죽으려는 사람 같길래 이 정도는 안 아픈가 궁금했지. 근데 그건 아닌가 보네.”
누구는 지금 진지하게 목숨까지 버릴 생각 중인데 장난질이라니.
“이번엔 재미있는 거 못 보여줘? 왜 그런 표정이야?”
화를 내려다 김화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놀랍게도 김화영의 얼굴엔 미소기가 없었다.
“저 괴수랑 싸워서 이길 방법 없는 거지?”
그에 얼떨결에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네…. 그야 전 비전투계 직업이고….”
“그거랑 재미있는 거 보여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지 잘만 보여줬잖아! 이번에는 왜 못 보여주는 건데?”
“제 스탯으론 B급 괴수를 도저히 상대할 수 없으니까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마냥 김화영은 크게 웃었다.
“김요한 일당이랑 ‘지하의 지배자’ 세력 쓰러뜨린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고? 농담하는 거지? 음…. 그럼 일단은 스킬 써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까? 혹시 몰라서 밖에 표식 하나하고 오긴 했는데.”
“안 돼요! 박무성 헌터가 이나은 헌터랑 수연이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도망쳐요?”
“오- 나은이랑 똑같은 말! 나은이한테도 SS급 괴수랑 싸우기 전에 도망칠 거냐고 물으니까, 네가 붙잡혀 있어서 안 된다고 했거든.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 한다나? 역시 둘이 운명이라니까.”
“이나은 헌터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자자, 그럼 결정됐네!”
김화영은 나를 앞으로 걷어찼다.
“여기서 죽을상 짓지 말고, 가서 어떻게든 이겨. 그래야 나은이랑 수연이 구하지.”
“하지만.”
“도망치긴 싫다며. 그러면 게임에서 이기는 것 말고 지금 다른 방법 없는 거 아냐? 왜 머뭇거리고 있어? 어서 가서 재미있는 거 보여줘.”
이번엔 김화영이 옳은 말을 했다.
나를 구하려다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머뭇거려선 안 되는 거였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약한 소리 하는 거 정말 안 어울리니까 그만해. 나은이랑 수연이도 네가 그러는 거 보면 질색할걸?”
“응원은 못 할망정, 이상한 소리나 하시긴.”
그래도 그 이상한 소리 덕분에 2루까지 걸어갈 용기는 생겼다.
“준비 끝났어.”
“작전 회의라도 한 거야? 기다리다 공방전 끝나는지 알았네. 하기야 조금이라도 더 늦게 싸우고 싶긴 하겠지. 어차피 질 걸 알고 있으니까.”
“게임이나 시작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내가 2루 베이스를 밟자마자 허공엔 글자가 새겨졌다.
[‘빙혈어’에게 ‘광포화’ 상태가 부여됩니다.]
[‘빙혈어’의 ‘힘’, ‘민첩’이 300 상승합니다.]
[‘빙혈어’의 ‘회복력’, ‘지능’, ‘체력’이 매초 감소합니다.]
[B급 괴수 ‘빙혈어’가 A급 괴수가 되었습니다.]
“치사하다! B급 괴수 내보낸다더니 A급 괴수잖아!”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근데 강화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했는걸? 그럼 어디 한 번 실력 좀 볼까? ‘빙혈어’, 저놈을 공격해.”
박무성의 명령에 ‘빙혈어’는 지표면을 뚫고 위로 솟아올라 내 허벅지를 깨물었다.
최대한 빨리 궁중식도를 장비하여 ‘빙혈어’를 향해 휘둘렀으나 A급 괴수의 움직임을 따라갈 순 없었다.
궁중식도가 모양 빠지게 허공을 가르는 동안, ‘빙혈어’는 이미 땅을 파고 들어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너무 빠르잖아.”
이후 ‘빙혈어’가 땅에서 솟아오를 때마다 내 몸엔 상처가 쌓여갔다.
이대로 간다면 출혈로 기절하게 될 건 뻔했다.
그래도 아직 최후의 수단을 쓸 때는 아니다.
‘네가 붙잡혀 있어서 안 된다고 했거든.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 한다나?’
이런 말을 듣고 한심하게 도망칠 순 없었다.
도망치는 건 적어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발버둥 친 이후.
[‘이름 없는 자’님이 당신의 생각에 흥미를 보입니다.]
“뭐야? 단 한 번을 반응 못 하잖아? 허무하긴.”
지금 ‘빙혈어’를 상대로 내가 쓸 수 있는 수는 딱 한 가지, ‘라우테’ 특성뿐이다.
내 이빨이 ‘빙혈어’의 피부를 뚫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지 않고서야 그건 모르는 거다.
당장 내가 해야 할 건, ‘빙혈어’를 이빨이 닿는 거리에 붙잡아두는 것.
“‘빙혈어’, 그냥 다음 공격에 끝내 버려.”
정신을 집중하고 노려보던 등지느러미가 움직이자 난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빙혈어’는 그대로 왼팔을 깨물었고, 그 고통에 그만 궁중식도를 놓치고 말았다.
“사지 멀쩡하게 붙잡으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팔 하나 정도는 잘라버려!”
왼팔에선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내렸지만, ‘빙혈어’가 이빨이 닿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으니 상관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빙혈어’의 몸통을 깨물자 박무성은 크게 비웃었다.
“최후의 발버둥이야? 귀엽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안 가 지워졌다.
[‘빙혈어 찜’의 메인 재료 ‘빙혈어’와 접촉하였습니다.]
[‘빙혈어 찜’ 레시피의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 등급에 따라 8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탐욕의 수행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확률을 조작합니다.]
[확률 조작 성공! 10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빙혈어 찜’ 조리를 시작합니다.]
이빨로 ‘빙혈어’를 깨문 동시에 글씨가 새겨지며 나를 물고 있던 ‘빙혈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내 앞엔 ‘빙혈어 찜’이 담긴 그릇이 생겨났다.
“레시피가 이런 거였구나….”
“너, 분명 지고 있었잖아! 근데 어떻게?”
어느새 다가온 김화영의 부축을 받으며 ‘빙혈어 찜’을 한술 떠먹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라우테’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빙혈어 찜’을 섭취하여 신체가 재생됩니다.]
“…상처까지 금세 아물었다고? 망할 동생 놈! 이런 스킬을 갖고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고작 정보 빼내오는 임무도 제대로 못 해? 그 비싼 돈 들여가며 지리학자 자리에 앉힌 은혜를 이렇게 갚아!”
[A급 괴수 ‘빙혈어’를 퇴치하였습니다.]
[레시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계약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계약이 이행됩니다.]
[플레이어 ‘박무성’과 플레이어 ‘이나은’ 간의 계약이 파기됩니다.]
[플레이어 ‘박무성’과 플레이어 ‘임수연’ 간의 계약이 파기됩니다.]
계약에서 해제되자, 이나은과 수연이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안돼! 이래선 안 된다고! 강이란 헌터님께서 나를 믿고 맡기신 임문데…. 이렇게 망치면 안 된단 말이다!”
“슬픈 건 알겠지만, 아직 계약이 남아있지 않나? 질문에 답해야지.”
“그래, 분명 그런 조항을 걸긴 했지…. 그런데 솔직하게 답한다고 했지, 언제 답해야 한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뭐?”
“조항대로라면 대답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해도 상관없잖아? 약속할게.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한다고. 단! 너희를 모두 죽인 뒤에 시체에 대고 말이야! ‘사흉 궁기’, 저놈들을 모두 죽여! 그래야 강이란 헌터님을 볼 낯이 생겨!”
[‘사흉 궁기’에게 ‘광포화’ 상태가 부여됩니다.]
[‘사흉 궁기’의 ‘힘’, ‘민첩’이 300 상승합니다.]
[‘사흉 궁기’의 ‘회복력’, ‘지능’, ‘체력’이 매초 감소합니다.]
[‘사흉 궁기’에게 ‘거대화’ 상태가 부여됩니다.]
[‘사흉 궁기’의 ‘신체의 강도’, ‘체력’이 300 상승합니다.]
[SS급 괴수 ‘사흉 궁기’가 SSS급 괴수가 되었습니다.]
[‘사흉 궁기’의 몸집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확실하게 끝내야 하니, 그 스킬까지 발동해.”
[‘사흉 궁기’가 스킬 ‘권악징선’을 발동합니다.]
[‘사흉 궁기’가 플레이어 ‘이나은’을 가늠합니다.]
[일행을 걱정하는 마음에 ‘사흉 궁기’가 분노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의 스탯 절반을 ‘사흉 궁기’의 스탯에 영구적으로 추가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의 스탯이 ‘사흉 궁기’의 스탯 절반만큼 영구적으로 하락합니다.]
[‘사흉 궁기’의 스킬 ‘권악징선’이 72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낄낄대며 술을 들이켭니다.]
“공격팀 놈들은 그냥 다 죽여버려!”
박무성이 외치자, ‘사흉 궁기’는 고개를 쳐들고 귀청이 떠나가도록 포효했다. 그런 괴수의 쩍 벌어진 입안, 이빨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엔 징그럽게도 사람의 팔이 자라나 있었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팔은 꿈틀거리며 입안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이윽고 ‘사흉 궁기’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쏜살같이 내게로 날아왔다.
“드디어 이도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는데…. 박무성 헌터, 저 자식이!”
코앞에서 ‘사흉 궁기’가 침을 튀기며 입을 벌리자, 수많은 손이 내 몸을 붙잡아 입 안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다음번엔 내가 반드시….”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