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12)]
“정현 헌터! 절대 응해선 안 돼요!”
별안간 들려온 이나은의 외침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관중석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박무성과 ‘사흉 궁기’.
아무래도 게임을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제길.”
박무성이 게임에서 지면 ‘사흉 궁기’를 풀 건 예상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 다짐해놓고 이리 허무하게 죽다니.
“게임 하겠냐고 내가 묻지 않나!”
‘떨어져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약한 소리 하는 거 정말 안 어울리니까 그만해.’
일행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인 건 이 정도면 됐다.
이제 이도현, 그 자식 때문에 완전히 말린 내 페이스를 다시 찾아올 차례다.
“게임 하는 것도 좋긴 한데, 그전에 같이 온 일행들하고 잠깐 대화하는 정도는 상관없지?”
“대화?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푸하하하! 잠깐이면 상관없지. 단 허튼수작 부리는 것 같으면 바로 ‘사흉 궁기’가 움직일 거야. 특히! 여기서 도망칠 생각만 해 봐.”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게임에서 이기고 일행과 함께 여기서 나갈 생각이거든.”
“그렇다면야. 시간은 십 분 줄게. 그 안에 유언을 남기든, 마지막 인사를 하든 알아서 해. 다시 말하지만 십 분이야.”
박무성의 말에 낭비할 시간 없이 얼른 박우민에게 다가갔다.
“박우민 헌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나? 내게 물어볼 거라니? 내 도, 동료와 관련된 거라면 아까 말했듯 여기가 아니라….”
“네네, 그건 됐고요. 혹시 밖에서 무슨 학자셨어요? 사실 멸망 이전에 지리 쪽 공부를 했었는데 박우민 헌터 이름을 얼핏 들어본 것 같아서요.”
“흠흠. 또 지식인을 알아보는구먼. 마냥 못 배운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 그래, 난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지리학자라고 할 수 있지. 근데 왜 이런 질문을?”
“게임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궁금한 건 해결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박우민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이번엔 김화영에게 말을 건넸다.
“김화영 헌터에게는 부탁드릴 게 있어요.”
“표정을 보니까 재미있는 거 생각났나 본데? 맞지? 뭐야? 어떤 거야?”
“약간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제가 말하는 대로 해주셔야만 해요.”
“당연하지!”
박우민이 듣지 못하도록 김화영에게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호오-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거라면 저만 믿으세요. 인방 오래 해서 시간 끄는 건 전문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정확히 십 분이 되었는지 ‘사흉 궁기’가 울부짖었다.
“십 분이 다 되었군. 그럼 이제 게임 시작하지.”
“근데 그쪽이 거짓말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지? 게임에서 이겨도 일행을 풀어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서로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게임 전 계약서를 쓸 거니까.”
“계약서? 아니. 그 정도론 부족하지. 조항에 사기 칠 수도 있잖아.”
김화영이 마음 편히 움직이려면 시간도 벌면서 박무성의 시선까지 끌어야 한다.
“내가 제안할 게 있어. 마침 장소도 야구경기장인데 스케일을 키우는 게 어때? 그래야 초월자님들도 즐거워하지 않겠어?”
그를 위해 내가 생각한 방안은 초월자를 이 판에 끌어들이는 것.
“뭐?”
“존경하는 초월자님들이 게임을 지켜보도록 하자고. 그러면 그쪽이든 나든 사기는 못 치지 않겠어? 감히 초월자님들이 보는 앞에서 사기 칠 용기는 없을 거 아냐.”
“맞는 말이긴 하지만 굳이….”
“맞는 말이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거지? 자! 초월자님들 모두 들으셨죠?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괴수랑 헌터의 피 튀기는 싸움! 게다가 헌터 쪽은 비전투계 계열! 저와 박무성 헌터를 대상으로 혹시라도 후원 미션을 걸어주실 분 계신다면, 그 즉시 게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정현과 플레이어 박무성을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정현
- 클리어 조건 : 플레이어 ‘박무성’이 조종하는 괴수를 쓰러뜨릴 것.
- 성공 보상 : 플레이어 ‘이나은’, ‘임수연’과 플레이어 ‘박무성’의 계약 즉시 파기
- 실패 페널티 : 플레이어 ‘박무성’이 원하는 자세를 영구히 취하게 됨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미안하지만 초월자님들도 게임 보고 싶으신가 본데?”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등록한 ‘후원 미션’을 수락합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열광합니다.]
[‘꿈의 정복자’님이 몸을 비틀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열두 과업의 전사’님이 함성을 지릅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당신을 탐욕스럽게 지켜봅니다.]
“이렇게 많은 초월자님께서 관심을 보이신다고?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이왕이면 많은 초월자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편이 좋지 않아? 아니면 혹시 정말로 계약서에 사기라도 치려고 그랬어?”
“그, 그럴 리가 있나!”
[‘번개의 아내’님이 날카롭게 노려봅니다.]
쏟아지는 초월자들의 관심 속, 박무성은 우물쭈물하며 안 그래도 휑한 머리를 자꾸만 긁적였다.
“제길. 이렇게 많은 이목을 받는 놈일 줄이야….”
“딴 소린 그만하고 어서 시작하지. 초월자님들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잖아?”
비아냥거리는 내 말에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듯 박무성이 말했다.
“그래, 초월자님들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우리끼리 한 가지 조건만 더 걸자. 패자는 승자의 질문 한 가지에 솔직하게 답한다. 어때? 이 정도면 어려운 건 아니잖아. 어차피 그쪽도 내게 물어볼 게 있잖아?”
“나야 좋지. 어차피 네가 이길 일은 없을 테니. 그건 그렇고 뭐, 싸울 상대로 원하는 괴수라도 있나? 비전투계 헌터라니 내 특별히 네 요구를 들어주지.”
“음…. B급 괴수 정도면 초월자님들 괜찮으신가요?”
[‘별의 적대자’님이 당신의 몸에서 튈 붉은 피를 기대합니다.]
[‘방구석 만화광’님이 당신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당신의 죽음을 기원합니다.]
[‘열두 과업의 전사’님이 만족하며 팔짱을 낍니다.]
“초월자님들도 만족한 것 같으니, B급 괴수가 낫겠네. ‘빙혈어’ 어때? 마침 이번 시련에서 처음 등장한 괴수이기도 하고.”
“현아, 안 돼!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에 응한 거야!”
“일행이 저리 걱정하는 데 괜찮겠나? 보아하니 B급 헌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대결 상대를 바꿀 기회 줄까?”
“괜찮아. 그대로 가지.”
“쓸데없는 자신감은. 그러면 네가 2루 베이스를 밟는 순간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전에 장내 좀 정리하고.”
박무성이 손가락을 휘젓자 게임을 위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참. 도망친 놈. 참고로 정현 헌터 도와줄 생각은 말아. 그러면 나도 ‘사흉 궁기’를 바로 내보낼 테니.”
“애초에 도울 생각도 없었거든!”
“좋아. 이제 게임 시작하지.”
등지느러미를 응시하며 2루 베이스에 올라서자, 곧 게임 시작을 알리는 글씨가 새겨졌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게임 시작을 선언합니다.]
“약속할게. ‘빙혈어’ 정도는 단 한 합이면 돼.”
“뭐?”
“이 게임, 내가 이긴다고.”
“그러든가. 전투 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고. ‘빙혈어’, 저놈을 공격해.”
비전투계 직업임을 밝혀서 그런지 박무성은 이번엔 ‘빙혈어’를 A급 괴수로 강화하지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B급 괴수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지표면을 가르며 헤엄쳐 오는 ‘빙혈어’는 눈으로 좇기도 힘들었다.
“빠른 건 여전하네.”
내가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새 등지느러미는 발밑까지 다가왔다.
그를 바라보던 난 침착하게 왼팔을 들어 올렸다.
“정현 헌터! 멍청하게 뭐 하는 거예요?”
“현아!”
당연하게도 지표면을 뚫고 위로 솟아오른 ‘빙혈어’는 그대로 날카로운 이빨을 내 왼팔에 꽂아 넣었다.
“한 합이면 쓰러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니, 별거 없잖아?”
“이걸로 요리 준비 끝.”
엄청난 치악력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오른손으로 ‘빙혈어’의 몸통을 붙잡았다.
[‘빙혈어 찜’의 메인 재료 ‘빙혈어’와 접촉하였습니다.]
[‘빙혈어 찜’ 레시피의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 등급에 따라 8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탐욕의 수행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확률을 조작합니다.]
[확률 조작 성공! 100% 확률로 조리가 시작됩니다.]
[‘빙혈어 찜’ 조리를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빙혈어’는 사라지고 ‘빙혈어 찜’이 담긴 그릇이 생겨났다.
“너, 비전투계 직업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거짓말한 적은 없어. 그나저나 한번 먹어볼래? 이거 진짜 맛있거든.”
애써 고통을 참으며 ‘빙혈어 찜’을 한술 떠먹자 엄청난 양의 포인트가 밀려 들어왔다.
[‘열두 과업의 전사’님이 당신의 승리를 축하하며 5,000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더욱 당신을 탐하며 2,000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플레이어 정현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피가 흐르던 상처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라우테’ 특성으로 모두 아물었다.
“…상처까지 금세 아물었다고? 망할 동생 놈! 이런 스킬을 갖고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고작 정보 빼내오는 임무도 제대로 못 해? 그 비싼 돈 들여가며 지리학자 자리에 앉힌 은혜를 이렇게 갚아!”
[B급 괴수 ‘빙혈어’를 퇴치하였습니다.]
[레시피로 인해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후원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플레이어 ‘박무성’과 플레이어 ‘이나은’ 간의 계약이 파기됩니다.]
[플레이어 ‘박무성’과 플레이어 ‘임수연’ 간의 계약이 파기됩니다.]
“안돼! 이래선 안 된다고! 강이란 헌터님께서 나를 믿고 맡기신 임문데…. 이렇게 망치면 안 된단 말이다!”
“박무성 헌터, 게임 시작하기 전에 우리끼리 한 가지 조건 더 건 거 기억하지? 패자는 승자의 질문 한 가지에 솔직하게 답한다. 조건대로 질문 하나 할게.”
“그래, 분명 그런 조항을 걸긴 했지…. 그런데 솔직하게 답한다고 했지, 언제 답해야 한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역시 그렇게 나오나.”
“조항대로라면 대답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해도 상관없잖아? 약속할게.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한다고. 단! 너희를 모두 죽인 뒤에 시체에 대고 말이야! ‘사흉 궁기’, 저놈들을 모두 죽여! 그래야 강이란 헌터님을 볼 낯이 생겨!”
[‘사흉 궁기’에게 ‘광포화’ 상태가 부여됩니다.]
[‘사흉 궁기’의 ‘힘’, ‘민첩’이 300 상승합니다.]
[‘사흉 궁기’의 ‘회복력’, ‘지능’, ‘체력’이 매초 감소합니다.]
[‘사흉 궁기’에게 ‘거대화’ 상태가 부여됩니다.]
[‘사흉 궁기’의 ‘신체의 강도’, ‘체력’이 300 상승합니다.]
[SS급 괴수 ‘사흉 궁기’가 SSS급 괴수가 되었습니다.]
[‘사흉 궁기’의 몸집이 두 배로 증가합니다.]
“확실하게 끝내야 하니, 그 스킬까지 발동해.”
[‘사흉 궁기’가 스킬 ‘권악징선’을 발동합니다.]
“김화영 헌터, 지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