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13)]
내 외침에 김화영이 다급히 이나은에게 콩을 먹였다.
“현아, 부탁한 거 끝냈어!”
“일단 먹긴 먹었는데, 왜 뜬금없이 콩을 먹으란 거예요?”
“현이 말로는 이래야 저 괴수를 쓰러뜨릴 수 있다던데?”
‘사흉 궁기’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저 사기적인 스킬, ‘권악징선’부터 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권악징선’은 상대의 스탯 절반을 자신의 스탯에 더하고, 상대 스탯은 자신의 스탯 절반만큼 하락시키는 스킬.
이 스킬에 이나은의 스탯을 빼앗겼다간, ‘사흉 궁기’의 뱃속을 구경하는 걸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딴 체험을 하지 않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이전에 샀던 특성을 써먹는 것.
[‘사흉 궁기’가 플레이어 ‘이나은’을 가늠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이나은’에게 가해진 스킬을 함께 적용받습니다.]
죽음 직전, ‘사흉 궁기’는 스킬의 대상으로 우리 일행 중 가장 강한 이나은을 지목했다.
보통 저런 사기적인 스킬을 사용한다면 야구경기장에 있는 모든 공격팀 헌터를 대상으로 했을 테다. 게다가 사용 제한 시간이 삼 일이나 되는 스킬인데, 고작 한 명을 대상으로 사용한다?
이건 곧 ‘권악징선’은 삼 일에 한 번, 딱 한 명의 헌터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사흉 궁기’가 플레이어 ‘정현’을 가늠합니다.]
[스킬 ‘권악징선’은 한 명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통 스킬의 지정 대상이 제한 인원수를 넘어가면 스킬이 아예 취소되거나,
[플레이어 ‘이나은’과 플레이어 ‘정현’ 중 랜덤으로 스킬의 대상이 정해집니다.]
동일한 확률로 스킬이 적용될 대상을 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탐욕의 수행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확률을 조작합니다.]
스킬 적용 대상을 확률로 정한다면 무조건 그 대상을 나로 할 수 있다.
[‘사흉 궁기’가 플레이어 ‘정현’을 가늠합니다.]
[일행을 위하는 당신의 마음에 ‘사흉 궁기’가 분노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의 스탯 절반을 ‘사흉 궁기’의 스탯에 영구적으로 추가합니다.]
[플레이어 ‘정현’의 스탯이 ‘사흉 궁기’의 스탯 절반만큼 영구적으로 하락합니다.]
[‘사흉 궁기’의 스킬 ‘권악징선’이 72시간 동안 봉인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으로 이나은과 나누어 받는 건 두 가지. 이나은에게 가해지는 공격과 내가 얻는 보상. 이 두 가지 외의 것은 특성 적용 대상이 아니다.
즉, ‘권악징선’의 디버프는 내게만 적용된다.
“스킬의 대상을 멋대로 바꾸었다고? …당황스럽긴 해도, 상관은 없지. ‘사흉 궁기’가 강해진다는 건 틀림없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없긴 무슨.”
무엇보다 나는 모든 스탯이 0인 F급 헌터. 그런 내 앞에선 저 사기적인 스킬도 쓸데없어진다.
“요리사 직업의 제약이 맘에 드는 날이 오긴 하구나.”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쑥스러워합니다.]
“뭐야? 정말로 스탯에 변화가 없잖아? 너 설마 ‘무효화’ 스킬이라도 쓸 수 있는 거야? 세간에 떠도는 허무맹랑한 소문인지 알았는데 실제로 쓸 수 있는 헌터가 있다고? 상처는 금세 회복하질 않나. 스킬의 대상을 바꾸고, 아예 무효화시키기까지….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무래도 ‘빙혈어’를 한 합에 쓰러뜨린 헌터의 모든 스탯이 0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겠지.
박무성이 저런 착각을 해주면 나야 고맙다.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사흉 궁기’를 쓰러뜨릴 다음 작업을 할 시간을 버는 셈이니.
‘권악징선’ 다음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건 ‘사흉 궁기’의 압도적인 스탯.
뭐, 이건 수연이가 있으니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수연아, 지금 당장 고유 능력을 써 줘!”
“안 그래도 김화영 헌터님께 이야기 들어서, 네가 그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시간이랑 스탯은 어느 정도로 조정하면 될까?”
“시간은 십 분 정도면 돼.”
“그럼 스탯은?”
“네가 가진 모든 포인트를 써줘.”
“어? 모든 포인트?”
“약속할게. 네가 여기서 쓴 모든 포인트, 이자까지 쳐서 두 배로 반드시 갚아줄게.”
수연이는 당황해하면서도 일말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돼. SSS급 괴수를 이기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럼 바로 이나은 헌터님께 고유 능력 쓸게.”
“잠깐. 고유 능력의 대상이 되는 건 이나은 헌터가 아니야.”
“그러면 누구한테….”
“‘사흉 궁기’. 저 호랑이한테 네 고유 능력을 써 줘.”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일단 알겠어.”
지난번 ‘사흉 도철’이 수연이의 고유 능력으로 추가된 김화영의 스탯을 강탈했을 때, 오히려 스탯이 감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아마 헌터에겐 스탯을 증가시켜주는 수연이의 고유 능력이 괴수한텐 반대의 효과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유 능력 ‘자애’가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자신이 지닌 모든 포인트를 ‘오를레앙의 성처녀’에게 바칩니다.]
[성스러운 힘이 12분 동안 그대를 도우니, 악을 필멸하라!]
[성스러운 힘을 받아들인 ‘사흉 궁기’가 고통스러워합니다.]
[성스러운 힘이 스며들어, ‘사흉 궁기’의 ‘신체의 강도’, ‘회복력’, ‘지능’, ‘행운’, ‘체력’이 700 감소합니다.]
[SSS급 괴수 ‘사흉 궁기’가 A급 괴수가 되었습니다.]
“A? A급 괴수가 되었다고? 이게 무슨!”
예상대로 수연이의 고유 능력에 ‘사흉 궁기’의 스탯이 감소하자, 박무성은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나은 헌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네. 충분해요. 이제 나머진 제게 맡기세요.”
‘사흉 궁기’를 향해 걸어가는 이나은의 눈빛에는 살기가 비췄다. 박무성은 그에 위기감을 느낀 듯 얼마 안 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왜 너희 같은 괴물들이 공격팀에 있어서…. 이대로는 강이란 헌터님께 면목이 없다고…. ‘사흉 궁기’, 저놈들을 어떻게든 쓰러뜨려!”
“그쪽은 조용히 자기 차례 기다리세요. 이 괴수 다음이 바로 그쪽이니까.”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사흉 궁기’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으나 그도 잠깐뿐이었다. 이나은이 발차기를 괴수의 몸통에 강하게 꽂아 넣자, 그 거대한 몸이 공중에 살짝 떴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돌려차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이어서 이나은은 발을 위로 쭉 뻗어 괴수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했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공격을 공중에서 이어갔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찍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3점 득점으로, ‘힘’이 3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뒤후리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2점 득점으로, ‘힘’이 2.5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이나은이 공중에서 땅에 착지했을 땐, 괴수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후였다.
[S급 괴수 ‘사흉 궁기’를 퇴치하였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배분됩니다.]
[1만 포인트를 지급받습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플레이어 ‘이나은’과 보상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플레이어 ‘정현’이 획득한 1만 포인트 중 5,000 포인트가 플레이어 ‘이나은’에게 귀속됩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이 ‘후원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플레이어 ‘임수연’에게 ‘직업 전용 스킬’이 귀속됩니다.]
“어째서…. 어째서 SSS급 괴수가…. 이 괴수를 붙잡으려고 온갖 짓을 다 했는데…. 이렇게 퇴치된다고?”
“다음은 그쪽 차례라고 했죠?”
“안 돼…. 아직이야….”
이나은이 관중석을 향해 나아가자 박무성은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경기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괴수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아무리 SSS급 괴수를 쓰러뜨렸다고 해도, 넷이 이 정도 수의 괴수를 상대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자, 이쯤하고 물러서는 게….”
“싫어! 왜 우리가 그래야 해?”
“도망친 놈은 허튼소리 말고 빠져있, 어….”
박무성이 큰소리친 것도 잠시, 김화영이 박우민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 있자 괴수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물러설 건 우리가 아니라 이 괴수들이야. 이 아저씨 목에 붉은 선 그어지는 거 보기 싫으면, 인제 그만해!”
김화영에게 부탁했던 다른 한 가지는 경기장에 있는 다른 괴수들이 움직임을 보이면 박우민을 인질로 삼으라는 것.
“자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정현 헌터, 지금 당장 이 사람 말려주게! 우리 같은 공격팀 아닌가?”
“같은 공격팀이긴 하죠.”
“그, 그럼 대체 뭐가 문젠가?”
“당연히 문제죠. 그쪽, 강이란 헌터의 세력이잖아요.”
내 말에 오히려 김화영이 제일 놀랐다.
“엥? 강이란의 세력이라고? 그럼 왜 공격팀에 배정돼 있던 거야?”
“그건 간단해요. 팀은 누구의 세력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동상과의 거리를 바탕으로 정해져요. 의도적이었든 우연이었든 간에 이 사람은 동상과 먼 곳에 있었으니 공격팀에 배정될 수 있었던 거죠.”
“아니라네! 만약 그렇다 치더라고, 내가 강이란 헌터의 세력이라면 왜 굳이 공격팀에 배정됐겠나? 당연히 방어팀에 배정되어 있었겠지!”
“그쪽의 목적은 공격팀의 신뢰를 얻은 뒤, 내부에서 방어팀에게 유리하도록 수작을 부리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박우민은 내 눈앞에서 ‘인천 중앙 공원’의 비석을 직접 부순 것이다. 공격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그만한 게 없었을 테니.
하지만 ‘사흉 도철’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다시 만났을 땐, 박우민은 이 수단을 쓸 수 없었다. 이전과 달리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비석을 부수면 엄청나게 강한 괴수가 나온다는 것. ‘인천 구치소’의 비석이 파괴되고 난 뒤, 텔레파시든 뭐든 해서 또 다른 방어팀에게 이를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그 때문에 박우민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비석을 지키는 방어팀 헌터와는 미리 말을 맞추어 자신들을 보면 무작정 도망치도록 할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괴수와는 말을 맞춘다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차선책으로 비석 근처에서 모습만 비춘 것이다.
저 사람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쪽이 찝찝했던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강이란 헌터의 세력이란 결론에 금방 도달하더라고요.”
“그, 그건 그저 네 생각일 뿐이잖나! 방어팀이 이기면 난 죽게 될 텐데 내가 왜 이 역할을 맡았겠나!”
“그야 그쪽이 박무성 헌터의 동생이니까요.”
“뭣이…. 그걸 어떻게….”
“박무성 헌터랑 그쪽이 직접 말해주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