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38화 (39/168)

[9. 한빙지옥 (14)]

‘그런 태도 고치라고 우리 형이 몇 번이나 말했어!’

‘또 박씨 가문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엄청나게 혼내시겠지.’

‘이번 공방전에선 동생까지 바쳐가며 거기서의 일을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이 말들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박우민이 이상한 행동을 한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박무성이 내게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망할 동생 놈! 이런 스킬을 갖고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고작 정보 빼내오는 임무도 제대로 못 해? 그 비싼 돈 들여가며 지리학자 자리에 앉힌 은혜를 이렇게 갚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박우민을 떠봤다.

‘밖에서 무슨 학자셨어요?’

‘난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지리학자라고 할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넘긴 말들. 박무성의 힌트. 거기에 박우민이 지리학자란 사실까지 더하니 박무성의 ‘망할 동생 놈’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말했다고? 그, 그럴 리가….”

“어쨌든 네 동생 다치기 전에 괴수들 뒤로 물리는 게 어때?”

“형님, 전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 자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 쓸모없는 것! 끝까지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쓸모없는 것이라니. 동생한테 그런 말 하면 못쓰지.”

“아니.”

다시 한번 몰아붙이려는데 별안간 박무성이 단호히 말했다. 그와 동시에 ‘고획조’가 날카로운 깃털 하나를 날렸다.

“내게 저딴 동생은 애초부터 없었어!”

누가 손쓸 틈도 없이 깃털은 그대로 박우민의 목을 관통했다.

“혀, 혀니…. 왜….”

“내가 도망칠 동안, 저것들을 막아!”

갑자기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박무성은 관중석 뒤로 모습을 감췄다.

“저기 아저씨? 괜찮아? 아저씨!”

김화영이 정신없이 박우민을 흔들어보았으나 이미 그는 숨을 거둔 후였다.

“자기 동생을 죽이고 도망친 거야? 거기 안 서!”

혼란스러운 상황 속 제일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김화영.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괴수가 보이지도 않는지 무작정 박무성을 쫓으려 했다.

“그냥 보내줘요.”

그런 김화영을 간신히 붙들고 이나은이 긴박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망할 놈을 붙잡아 죽여버리고 싶지만, 여기선 이만 물러서야 해요.”

“도망치자고? 등을 보이는 건 검사의 수친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전략상 후퇴에요. 엄밀히 따지자면 야구경기장에서 이득을 본 쪽은 저희예요. 적의 핵심 세력이 될 뻔한 ‘사흉 궁기’도 쓰러뜨리고, 흩어졌던 정현 헌터랑도 다시 뭉쳤잖아요. 이 상황에서 굳이 저 괴수들과 전투해서 손해 볼 필욘 없죠. 그리고 김화영 헌터는 검사도 아니시면서 무슨 검사의 수치에요.”

“단검도 검이거든! 단, ‘검’!”

‘사흉 궁기’까지 쓰러뜨렸는데,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고?

박우민이란 카드를 꺼내 들면 박무성을 확실히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자식이 설마 자기 동생을 죽일 줄이야!

[당신의 분노에 ‘끈질긴 포식자’ 특성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박무성’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플레이어 ‘박무성’이 사냥감으로 지정됩니다.]

[사냥감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사냥감의 자취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냥감의 자취? 뭐야, 저게?”

사냥감의 자취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더니, 관중석 쪽에 푸른 안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안개는 관중석 뒤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혹시 저거 보여?”

“어떤 거?”

푸른 안개를 가리키며 묻자, 수연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안 보인다, 이거지?”

수연이의 반응으로 보아 저 푸른 안개는 ‘끈질긴 포식자’ 특성 때문에 감지할 수 있게 된 사냥감의 자취인 것 같다. 즉, 저 안개를 따라가면 박무성이 나온다는 의미.

“이나은 헌터, 이 괴수들 잠시 붙들어 줄 수 있어?”

“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박무성 헌터를 붙잡을 방법이 생각났어. 내가 반드시 그 자식 붙잡아올 테니, 그동안만 여기서 버텨줘.”

“아까 제가 한 말 못 들으셨어요? 굳이 저 괴수들과 전투해서 손해 볼 필요 없다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그냥 물러선다면, 박무성 헌터는 자신이 조종하는 괴수들을 이끌고 주경기장에 있는 방어팀과 합류할 거야. 그랬다간 전력의 차이가 너무 벌어져.”

“맞는 말이긴 한데….”

“박무성 헌터 홀로 있는 지금이야말로 괴수들을 방어팀 전력에서 배제할 기회야.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돼.”

내 말에 재미있겠다는 듯 김화영이 씩 웃으며 기운차게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난 찬성! 현이가 그 아저씨 붙잡아오는 동안, 우리 누가 제일 많이 괴수 쓰러뜨리는지 내기하자! 아니면, 음…. 누가 먼저 괴수 쓰러뜨리는지 맞히기, 어때? 이편이 더 재미있겠다!”

“내기요? 저 정도 수의 괴수 상대로 저희끼리 버틸 수 있을지 장담조차 못 하는 상황인데, 무슨 내기에요!”

“어차피 위험한 거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이왕이면 재미있게 싸우는 게 낫지. 안 그래?”

“그럼 난 내가 제일 먼저 괴수를 쓰러뜨린다는 쪽에 걸지.”

김화영과 이나은이 말다툼하는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가 괴수 무리 중 제일 먼저 달려든 ‘불개’를 대검으로 갈랐다.

“엥? 이건 반칙이야! 내가 시작이라고 말 안 했잖아! 그보다 그쪽은 누군데 우리 내기에 끼어든 거야? 어, 어? 어!”

“송태섭 헌터가 왜 여기에….”

허공에서 나타난 사내는 송태섭. 그는 수연이에게 무언가를 던지며 말했다.

“그야 반지 돌려주러 왔지. 까먹고 내가 가져갔더라고. 뭣보다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안 오고 배기겠어?”

“일행에게서 멋대로 빠져나가 놓고!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런 걸 따질 땐가? 위험한 상황 아니야?”

이나은은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지만 한 수 물러났다.

“에휴…. 괴수랑 싸우는 동안 임수연 헌터는 제 뒤쪽에 딱 달라붙어 있으세요. 포인트 다 쓰셨잖아요.”

“감사합니다.”

“오- 우리 나은이 멋있는데? 나도 지켜주면 안 돼?”

“등 보이는 건 검사의 수치라면서요. 김화영 헌터는 얼른 괴수 한 마리라도 더 쓰러뜨리세요.”

“이건 차별이야….”

김화영은 불평하면서도 단검을 뽑아 들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괴수를 향해 달려갔다.

“현이가 박무성 헌터를 붙잡아 올 동안, 여기서 버티기로 한 거지?”

“하는 수 없잖아요. 송태섭 헌터도 얼른 저 앞에 가서 방패 역할이나 하세요. 임수연 헌터를 지키면서 싸우려면 김화영 헌터랑 송태섭 헌터가 괴수들 시선을 분산시켜줘야 해요.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을게요.”

“알았어.”

송태섭마저 김화영의 곁에 다가가 검을 휘두르자 이나은은 내게 눈짓했다.

“아무리 상대가 도망치는 중이지만, 그쪽이 비전투계 헌터란 건 잊지 마세요. 함부로 싸워선 안 돼요.”

“당연하지. 혹시 수연아, 반지 좀 빌려줄 수 있어? 박무성 헌터를 붙잡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응? 애초에 네가 준 건데, 뭘. 여기 있어.”

수연이에게 받은 반지를 손에 끼자 몸은 금세 투명해졌다.

“그럼 가볼게.”

“정현 헌터, 아무리 송태섭 헌터가 왔더라도 오래 버틸 자신 없거든요? 버티다 안 되면 그쪽 버리고 저희끼리라도 도망칠 거에요. 그러니까 박무성 헌터 최대한 빨리 붙잡으세요.”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은 난 서둘러 그라운드 밖으로 뛰어나갔다.

위층에서 내려온 푸른 안개는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원래 여기에 지하도 있었던가? 그리고 밖으로 도망친 게 아니라, 지하로 갔다고? 무슨 속셈이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그를 따라 지하 삼층까지 내려갔다.

“저 방에 있나 보네.”

안개는 복도 제일 깊숙이 위치한 방 앞에서 끊겨 있었다. 조심히 방 앞으로 다가가자 박무성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만 챙기자.”

열린 문틈으론 허겁지겁 무언가를 가방에 집어넣고 있는 박무성이 보였다.

“아니, 조금 더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박무성이 챙기는 건 돈다발이었다.

“하여튼 쓸모없는 놈 때문에 내 꼴이 이게 뭐야!”

박무성은 돈을 챙기는데 정신이 완전히 팔렸는지, 자신의 목소리가 점차 커진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동생이란 게 어쩜 이리 인생에 도움이 안 되지?”

덕분에 편하게 박무성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바로 등 뒤에서 궁중식도를 장비하는 데도 박무성은 그저 돈다발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모아왔는데!”

무기를 장비하자마자 불만을 늘어놓는 박무성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컥. 뭐야!”

반지를 손에서 빼내자 박무성의 얼굴엔 공포가 드리웠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난 시체랑 대화할 생각 없거든? 우선 괴수들부터 멈춰주는 게 어때?”

“알겠어. 당연히 그래야지.”

궁중식도를 목에 겨누며 말하자 박무성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더니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멈췄어, 멈췄다고! 그러니 이 칼은 치우는 게 어때?”

“그전에 우리 약속한 게 하나 있지 않나?”

“약속?”

“게임에서 이기면 질문 하나 할 수 있다 했잖아. 칼은 얼마나 성의있게 답하는지 보고 치워줄게.”

“제기랄. 그러면 얼른 물어봐. 궁금한 게 뭔데?”

“이 돈은 왜 챙겨둔 거야? 이딴 세상에서 종이 쪼가리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지금에야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곧 세상은 바뀌어. 그때가 되면 너도 이 종이 쪼가리를 숭배하게 될 거야.”

돈을 바라보는 박무성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게 고작 돈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질문은 그게 끝? 괴수도 물렀고, 질문에 답도 했으니 서로 볼일은 끝난 거지? 난 이제 가봐도 될까?”

“설마 내가 이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쫓아왔겠어?”

“하긴. 그러면 물어보려 했던 건 뭔데?”

“이도현 헌터, 대체 어떤 사람이야?”

내가 박무성을 쫓아온 건 방어팀 전력에서 괴수들을 배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외에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이도현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

예상컨대 이도현은 박무성을 이용해 우리 일행 모두를 인질로 붙잡으려 했던 것 같다. 그를 막아내긴 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그 인간이라면 분명 공방전이 끝나기 전 다시 우리를 괴롭히려 들 터. 만일 그때 한 번 더 이도현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일행을 지키지도, 공방전에서 승리하지도 못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우선 이도현에 관한 정보가 시급하다.

“그 자식은 왜?”

“물음에 대한 답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식도에 힘을 살짝 주자 박무성의 목에선 피가 배어 나왔다. 그에 박무성은 눈을 질끈 감고 다급히 외쳤다.

“이, 이도현은 회사에서 파견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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