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39화 (40/168)

[9. 한빙지옥 (15)]

“회사? 회사는 또 뭐 하는 곳이야?”

“그건 나도 몰라.”

“모른다고? 피를 아직 덜 흘렸나 보네.”

목에 겨눈 칼을 조금 더 가까이하자, 박무성은 기겁하며 외쳤다.

“정말이야! 이도현이 회사에서 왔다는 헌터랑 대화하는 걸 엿듣기 전까진 그런 세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그러면 엿들었다는 대화 내용이라도 말해봐.”

“어…. 제물이 준비되는 대로 파견된 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로 돌아오라 했던가?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잘은 몰라. 제대로 엿듣기도 전에 이도현, 그 자식한테 걸렸거든.”

박무성을 붙잡자마자 이도현은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내 손에 죽을래, 아니면 방금 들은 내용을 비밀로 하고 돈이나 챙길래?’

“내가 거기서 달리 뭐라 답하겠어. 당연히 비밀로 해주겠다 했지. 어쨌든 엿들은 내용은 이게 다야.”

“엿들은 내용은 그게 다라도 이도현에 관해 아는 게 그것뿐일 리가 없잖아. 딴 건 없어?”

“이게 궁금했던 거 아니야? 그럼 대체 뭘 말해달라는 건데!”

“그쪽이 큰소리칠 입장은 아닌 거 같은데?”

협박에 박무성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단념한 듯 입을 열었다.

“이도현이 멸망 이전부터 강이란 헌터님의 밑에서 꽤 오랜 시간 조직 생활을 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멸망 이전부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야 송태섭이랑 같이 다녔으니깐 당연히 들었을 거라고…. 잠깐, 표정을 보아하니 이거 정말 모르는 눈치네.”

박무성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설마 이것도 모르는 거야? 강이란 헌터님과 송태섭은 의형제 사이였어. 둘이 같은 보육원 출신에다가 동갑이거든. 그래서 아마 송태섭도 이도현이랑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던가?”

“뭐?”

“그랬는데 뭔 일이 있었는지 언젠가부터 강이란 헌터님과 송태섭은 원수지간이 되었더라. 이도현만 둘 사이에 껴서 불쌍한 처지였지.”

“그쪽이 멸망 전의 일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옛날에 사업할 때 강이란 헌터님의 조직에 돈 대주며 여러 이득 좀 챙겼었거든. 그래도 조직에 완전히 몸담은 건 아니어서 이도현에 관해 아는 건 정말 이 정도가 끝이야. 정 궁금하다면 나보단 송태섭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나을걸?”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표정을 즐기며 박무성이 툭 하고 말했다.

“이도현의 과거까지 대강 알려주었으니 난 이만 보내주는 게 어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멸망 전부터 강이란의 밑에서 일한 사람이 왜 회사란 세력에 속하게 된 거야?”

“나도 잘 모른다니깐! 애당초 시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감옥에 갇힌 인간을 왜 궁금해하는 거야?”

“감옥에 갇혔다고?”

“뭐야, 그런 것도 몰랐으면서 이도현에 관해 캐고 다닌 거야? 당연히 그 자식한테 돈 받자마자 엿들은 내용을 강이란 헌터님께 일러드렸지. 회사란 세력에 붙어서 우리를 배신하려 한다고. 그 이후로 그 자식 쭉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어.”

그 자식 때문에 이번 시련에서 몇 번이나 죽었는데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도 안 된다.

“나를 속이려는 건 아니지?”

“그 자식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로 너를 속인다고? 내가 왜 굳이 그런 수고를?”

도망치기 위해 동생까지 죽인 박무성이다. 그런 인간의 목에 칼을 겨눴으니 거짓말은 못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도현은 저들 몰래 탈옥하여 방어팀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이제야 이도현의 이상한 행보를 대충 이해할 것 같다.

탈옥한 이도현의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이들에 대한 복수.

강이란 세력 몰래 방어팀에 들어온 것도.

‘인천 중앙 공원’과 ‘예술회관’의 비석이 부서지도록 내버려 둔 것도.

다 방어팀이 패배하도록 만들기 위한 초석이었다.

또 다른 목표는 회사에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것.

우리 일행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얼 위한 제물로 쓰려는 거지?

모든 사람에게 혼란을 퍼뜨린다더니, 그를 위함인가?

“아까 엿들었다는 거, 정말 그게 끝이야? 제물에 관해서 더 이야기 나온 거라든가, 뭐 더 없어?”

“없다니깐. 그리고 대체 왜 그 인간에 관해 캐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쯤에서 그만둬. 네가 그 자식에 관해 캐고 다닌다는 사실을 강이란 헌터님께서 알았다간 네 신상에 좋을 게 없어.”

“미안한데, 그쪽이 남의 신상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때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더니 별안간 박무성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 찼다.

“아악-”

그 충격에 박무성의 코와 입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나은 헌터가 왜 여기에?”

“하도 안 오시길래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와봤죠. 칼이나 이리 줘 보세요.”

이나은은 식도를 빼앗아 그대로 박무성의 무릎에 내리꽂았다.

박무성이 비명을 지르며 돈다발 위를 이리저리 구르는 데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이나은은 그 위에 올라타 몸 이곳저곳을 여러 번 더 찔렀다.

“그, 그만. 제발 그만해 줘.”

“그쪽 세력이 물류 창고 단지 불태운 걸 생각하면 이거론 한참 모자라요.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 정현 헌터가 물은 거에나 제대로 답하세요.”

“정말 더 말해줄 게 없다니깐.”

“그래요?”

이나은은 주변에 나뒹구는 지폐 다발을 박무성의 입에 물리고는 다시 식도를 휘둘렀다.

“자, 잠깐. 엿들은 내용에 관해 더 말할 건 없어도 방어팀에 관해선 알려줄 수 있어. 공방전에서 이기려면 필요한 정보잖아. 이거로 퉁치는 건 어때?”

지폐를 뱉으며 외친 박무성의 다급한 말에도 식도는 멈추지 않고 이곳저곳을 유린했다.

어떻게든 고통을 끝내고 싶었는지 박무성은 알아서 정보를 술술 불었다.

“방어팀의 남은 전력은 나를 제외하고 총 열둘이야! 그중, 셋은 권주혁과 함께 주경기장 근처를 지키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동상 근처에 있어.”

“그런 건 관심 없다니까요.”

“이도현 헌터에 관해서도 말해줬고, 방어팀에 관한 정보도 줬으면 충분하잖아!”

“정현 헌터가 물은 건 엿들은 내용에 관한 거잖아요. 마지막 기회에요. 정말 더 말할 게 없어요?”

이나은이 식도를 한 번 더 치켜들자, 박무성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실은 한 가지 더 있어! 강이란 헌터님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긴 했는데…. 그, 그래도 말 해줘야겠지.”

“뭔데요?”

“회사 지부는 여의도에 있대. 거기에 가면….”

[플레이어 ‘박무성’이 영업 비밀 보호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인사위원회가 징계를 결정합니다.]

[‘사형’을 선고합니다.]

[징계를 집행하기 위해 플레이어 ‘박무성’을 법무팀으로 이송합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 박무성은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야? 말하다 말고 어디로 사라진 거야? 회사가 여의….”

“그만! 그 이상 말했다간 정현 헌터도 끌려갈지 몰라요.”

그제야 지금 상황이 이해됐다.

“설마 세력의 위치를 우리한테 말해서 끌려간 거야?”

“정확히 무슨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대체 뭐 하는 세력이야? 그저 말 한마디 했다고 헌터 한 명을 이동시켜버릴 정도면….”

“잘은 몰라도 되도록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근데 그러기엔 이미 늦은 거죠?”

“아무래도….”

망할 이도현 덕분에 이미 엮여도 단단히 엮인 것 같다.

“하아…. 일단 일행에게 돌아가요. 지금은 동상을 부수어 시련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에요. 저 세력에 대한 걱정은 공방전이 끝난 이후로 미뤄두죠.”

일행은 ‘사흉 궁기’ 시체를 등진 채 가만히 멈추어있는 괴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는 길에 이나은이 말했듯 다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둘만 놓아두고 가려 했는데 아쉽다. 근데 도망친 아저씨는? 그 아저씨 잡으러 간 거 아니었어?”

“붙잡았는데 별안간 사라졌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어리둥절한 김화영에겐 대충 둘러대고 송태섭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송태섭과 대화하는 게 우선이다. 개인적인 일을 굳이 들춰내고 싶진 않았지만, 이도현과 엮인 이상 그의 과거에 관해 들어야만 했다.

“그보다 송태섭 헌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나? 아무래도 제멋대로 일행에게서 나가놓고 다시 돌아왔으니 묻고 싶은 게 많긴 하겠지. 어떤 거야?”

“그게….”

“취조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대화는 조금 이따 하시는 게 어때요? 저기 방해꾼들이 왔어요.”

물어볼 타이밍은 그라운드에 새로이 나타난 헌터 넷에 의해 빼앗겼다. 왁자지껄 떠들며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그들의 머리 위에는 방어팀이라 적혀 있었다.

“위치 추적 시스템이 망가져서 살펴보라더니, 공격팀에게 박무성 헌터님이 당했던 거였네요.”

“그럼 어떻게 해? 싸워? 죽여? 붙잡아? 팔다리만 잘라? 아니면, 죽여도 돼? 빨리 말해.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니까.”

“워워. 진정해. 공방전이 끝나기까진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 느긋하게 싸워도 되잖아? 그래서 대빵, 어떻게 할까?”

“대빵은 강이란 헌터님이다. 난 대빵이 아니다.”

“아무렴 어때? 우리 넷 중에서 제일 강한 건 그쪽인데.”

“쟤네, 강이란 헌터님의 적인가?”

그중 대빵이라 불린 헌터가 술을 병째 마시며 물었다.

“저거 송태섭 헌터잖아. 그럼 적 아니야?”

여자 헌터가 대답하자 그가 명령했다.

“강이란 헌터님의 적은 모두 죽일 뿐.”

“앗싸! 그럼 죽인다? 허락한 거지?”

“허락한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잔뜩 웅크린 남자아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에 이나은이 황급히 말했다.

“여기서 싸우기엔 다들 너무 지쳤어요. 일단은 김화영 헌터 스킬로 도망치죠.”

“어디로 가면 돼?”

김화영의 물음엔 송태섭이 대신 답했다.

“야구경기장 밖으로만 나가줘. 그 이후엔 내가 다른 공격팀 헌터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안내해 줄 테니깐.”

“다른 공격팀 헌터?”

“응. 너희랑 떨어지고 난 뒤로 함께 다녔던 분들이 있거든.”

“알겠어. 그럼 모두 이리 와봐.”

일행은 모두 김화영의 팔에 손을 댔다.

“대빵, 쟤네 뭐 하려는 거 같은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어엉? 그래? 그럼 막아야지.”

“설마 도망치는 거 아니지? 나랑 싸워야지! 가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깜빡였을 땐 우린 야구경기장 밖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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