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16)]
야구경기장에서 벗어난 우리는 송태섭의 안내를 따라 어느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곳곳에 깨진 그릇이 널브러진 건물 안에는 세 명의 공격팀 헌터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송태섭이 목청 높여 인사하자 버려진 메뉴판을 구경하던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였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헌터가 송태섭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동료들을 구한다더니, 무사히 돌아왔구먼.”
“네. 그리고 좋은 소식도 하나 가져왔어요.”
“좋은 소식? 어떤 건가?”
“박무성, 그 자식 어디 갔나 했는데 야구경기장에 숨어서 괴수를 모으고 있더라고요. 다행히 제 일행이 그놈을 쓰러뜨렸으니 이제 괴수랑 싸울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우리가 쓰러뜨린 게 아니라 회사란 곳에서 멋대로 데려간 거지만, 어차피 죽을 운명인 건 변함없으니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말인가? 자네들 큰일 하나 해결해주었구먼. 고맙네.”
노인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자 수연이가 황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그를 말렸다.
“어르신,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인물만 훤한 줄 알았는데 예의까지 바르구먼. 자네는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전 임수연이라고 해요.”
“오호라. 여기서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날 줄이야! 내 이름은 임성윤이라고 하네.”
수연이가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노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 태섭이가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친구들을 사귄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아저씨, 큰일 앞두고 스스로 사망 플래그 꽂지 마세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사람 보는 눈도 없는 주제에 내 말을 듣지 않고 강이란 무리랑 어울렸던 멍텅구리가 되는 게지.”
“…너무하시네.”
가차 없는 팩폭에 송태섭은 잔뜩 표정을 구기며 노인의 옆에 앉았다.
“와- 아무리 놀려도 표정 한 번 변치 않던 태섭이를 한 방에 KO 시켜 버렸네. 할아버지, 대단한 사람이구나!”
“사람 보는 안목이 있구먼. 그런 자네는 이름이 어떻게….”
“성윤 아재, 한가롭게 자기소개할 때가 아니야.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해.”
아까까지만 해도 메뉴판을 보며 노닥거리던 헌터들은 어느새 하나둘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를 본 노인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찬찬히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그럴 시간은 허락되지 않은 것 같군.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건 아네만 우선 앞으로의 계획부터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나?”
“계획이요?”
“공방전과 관련된 걸세.”
“그러면 들어봐야죠. 다들 괜찮죠?”
이나은의 말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공격팀은 여기 모인 사람들 외에 한 그룹 더 있다네.”
노인은 그 그룹을 꼬맹이 일행이라 불렀다.
“꼬맹이 일행하고는 ‘인천 터미널’에 있는 비석을 부술 때 만났지. 우린 거기에서 한 가지 약속을 했네. 동상을 부술 때 힘을 합쳐 총공격을 펼치자고 말이지. 그때 짠 작전대로 우리는 꼬맹이 일행과 합류해 동상을 공격할 걸세.”
“그쪽하고 합류하기로 한 건 언젠데요?”
“오늘 밤. 해가 완전히 떨어졌을 때.”
“네? 그럼 얼마 안 남은 거 아니에요? 해 거의 다 떨어졌잖아요.”
이나은의 말에 수긍하듯 저 멀리 주경기장의 조명이 환하게 켜져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밝혔다.
“작전을 짤 당시까지만 해도 자네들이 야구경기장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네. 박무성이 그곳에 괴수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만일 그를 사전에 알았더라면 야구경기장에 태섭이 외에 다른 인원을 더 보내고, 작전 시간도 그에 맞추어 넉넉하게 늦추었을 텐데….”
노인은 미안하다며 작전을 함께해달라고 강요하진 않겠다고 했다.
“임성윤 헌터님께서 왜 사과하세요? 그리고 같은 공격팀인데, 저희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게 당연하죠. 그렇죠?”
수연이의 눈빛에 얼른 이나은이 지원사격을 했다.
“임수연 헌터 말이 맞아요. 그리고 애초에 동상을 부수어야 이번 시련에서 살아남는 건데 힘들다고 여기서 빠질 순 없죠.”
당연히 이 상황에서 빠질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오늘 밤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찬성했다.
박무성이 제거된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지금이야말로 방어팀을 기습하기엔 최적의 조건. 이대로 작전에 나가면 이도현과 엮인 송태섭의 과거를 들을 시간은 없긴 하겠지만, 시련도 끝나가는 마당에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다들 우리와 함께한다니 작전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겠네. 공격팀은 두 그룹으로 나뉠 거야. 꼬맹이가 이끄는 그룹과 내가 이끄는 그룹으로 말이지. 그중 꼬맹이 그룹이 주경기장 입구에서 방어팀 헌터들과 전면전을 벌일 동안, 나머지 한 그룹은 보조경기장으로 갈 거네.”
“보조경기장이요? 한데 모여 주경기장을 공격하는 거 아니었나요?”
“꼬맹이 그룹이 소란을 피워 방어팀 헌터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틈을 타 다른 그룹은 보조경기장의 통로를 통해 주경기장 내부로 침입할 거거든.”
노인의 설명에 따르면 주경기장과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보조경기장은 지하 통로로 주경기장의 선수대기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노인이 이끄는 그룹은 그곳을 통해 주경기장 내부로 침입할 계획이었다.
“우리 그룹이 침입하면 입구 쪽을 지키던 방어팀 헌터들은 당연히 경기장으로 헐레벌떡 돌아오겠지. 그때를 틈타 꼬맹이 그룹도 경기장 내부까지 치고 들어올 거네.”
그렇게 방어팀을 포위한 이후부턴 정면충돌. 누구 하나가 위패를 부술 때까지 전투에 몰입하면 된다.
“간단하지?”
“입구 쪽을 무작정 뚫는 것보다야 낫네요. 그러면 저희는 어느 쪽에 합류하면 되나요?”
“자네들은 꼬맹이 그룹 쪽에 합류하면 될 거네.”
“꼬맹이 그룹 쪽이요….”
“뭐 문제 되는 게 있나?”
“죄송하다만, 보조경기장을 통해 주경기장 내부로 들어가는 걸 저희 일행이 맡으면 안 되나요?”
이나은의 말에 노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지?”
“저희에겐 잠입에 어울리는 장비도 있고 여차할 땐 밖으로 빠져나올 수단도 있거든요. 무엇보다 강이란 그 자식한테 개인적으로 갚아줄 게 있어서요.”
“강이란 헌터에게 갚아줄 게 있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
“조용.”
뒤편에서 항의하는 헌터의 입을 다물게 하고 노인은 이나은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참에 태섭이 놈을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지. 좋네, 자네 말대로 하지.”
“성윤 아재! 아무리 태섭이 동료라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그런 중요한 역할을….”
“단, 안내역이 필요할 테니 나와 태섭이도 자네 일행과 함께하겠네. 호연이가 천수를 데리고 꼬맹이 그룹에 합류하게나.”
“아재, 그치만.”
“이의는 받지 않겠네. 시간 없으니 서둘러 출발하지.”
보조경기장에 도착하고 얼마 뒤, 자정이 되자 작전대로 주경기장 입구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대로 꼬맹이 그룹이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서둘러 주경기장 내부로 잠입하지.”
“잠시만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그러나? 뭐 문제라도 있나?”
전투 그 자체는 작전대로라 상관없었다. 문제는 방어팀 헌터의 수. 멀리서 대충 헤어린 것만 해도 서른 명이 훌쩍 넘어간다.
“박무성 헌터 말론 분명 방어팀 헌터 수가 열둘이라 했는데…. 설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 건가?”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아마 방어팀 쪽에서 무슨 수를 쓴 거 같아요.”
“그런가? 그럼 대체 어떤 방법이지?”
“의문은 나중에. 방어팀 쪽에서 우리를 눈치채기 전에 작전을 속행해야 하네. 여기는 꼬맹이 그룹에 맡기고 우린 지하 통로로 들어가도록 하지.”
변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침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수적으로 공격팀이 너무 열센데 합류하는 편이 낫지 않나요?”
“내부로 잠입해 우리끼리라도 위패를 부수는 게 저들을 돕는 거네.”
“아저씨 말이 맞아. 그리고 저 꼬맹이 일행 다들 엄청 강해서 걱정할 필욘 없어. 저 정도는 거뜬할걸?”
“알겠어요. 진입하죠.”
그렇게 송태섭을 선두로 우리는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엔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불빛을 따라 쭉 내려가자 기다란 복도가 나왔다. 처음에 좁았던 복도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졌다.
“주경기장 바로 옆에 붙어있길래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지하 통로가 깊네.”
“여기도 야구경기장처럼 초월자님이 손 쓰신 게 아닐까요?”
[‘절름발이 공돌이’님이 자신의 작품을 뽐냅니다.]
어쩐지 주경기장도 입구가 하나뿐이더니 개조한 결과였냐.
“그나저나 방어팀에도 인물이 진짜 없나 봐요.”
“왜?”
“여기를 지키는 방어팀 헌터가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주경기장과 연결된 지하 통로가 보조경기장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네. 당연히 공방전 시작하자마자 지켜야 할 동상이 있는 주경기장부터 샅샅이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야 좋은 거지, 뭐.”
“그건 그렇네요. 아! 근데 그쪽이 괴수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은 왜 지금껏 숨기고 있던 거예요? 비전투계 직업이라면서요? 앞으로 괴수 상대할 때마다 얄짤 없이 굴려도 되는 거죠?”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잡담은 그만.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네.”
노인의 경고에 이나은과의 대화를 멈추었다. 그러니 저 멀리서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가자 마침내 복도가 끝나고 큰 로비가 나왔다. 로비의 좌·우측에는 문이 굳게 닫힌 방이 한 개씩 있었고, 우리가 바라보는 정면에 연결된 통로 저편에선 유니폼이 진열된 로커들이 보였다.
소리는 그중 우리의 왼편, ‘전기실’이라 적힌 방 안에서 들려왔다.
“한 잔. 딱 한 잔만 더 마시겠다.”
“권주혁 헌터님, 그래도 아직 공방전 중인데….”
“그러는 너도 벌써 세 병째 마시고 있지 않나?”
“그야 저는 주량이 권주혁 헌터님보다 훨씬 세니까 그런 거죠. 혹시 이미 취하신 건 아닌지….”
“뭐? 아직 멀쩡하다. 보면 모르나? 그리고 누가 누구보다 세단 말이지? 오늘 제대로 한 번 증명해 주겠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술이나 빨리 따라라.”
“죄, 죄송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싶었는데 지난번 야구경기장에 나타났던 방어팀 헌터들의 목소리였다.
“이대로 나아가면 주경기장인데, 어떻게 할까?”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워낙 컸음에도 송태섭은 소리 낮춰 물었다.
“굳이 싸울 필욘 없잖아요. 지나치죠.”
내 말에 우리 일행은 발소리조차 안 나게 조심히 로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제일 앞서 있던 이나은이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고.
“이제 저희도 들어가죠.”
남은 인원들이 마저 들어가려는 순간.
[플레이어 ‘오윤아’가 암석을 생성합니다.]
거대한 암석이 솟아올라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