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41화 (42/168)

[9. 한빙지옥 (17)]

“이게 무슨.”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한 사이, 전기실에서 방어팀 헌터들이 등장했다.

“대빵, 통로를 막긴 막았거든? 근데 한 명은 이미 주경기장 안쪽으로 기어들어 간 것 같아.”

“상관없다. 그놈은 강이란 헌터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거다. 우리는 여기 남은 놈들이나 맡으면 된다.”

“대빵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면 누가 남았나 얼굴 좀 볼까? 어머! 너희 얼빠진 표정 너무 웃기다. 누구 거울 좀 있으면 얼른 자기 얼굴 봐봐!”

그중 여자 헌터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를 비웃으며 통로를 암석으로 틀어막은 건 자신의 소행임을 알렸다.

“싸우지 않고 지나치기엔 늦은 것 같지?”

“네. 저희를 곱게 주경기장으로 보내줄 것 같진 않네요.”

적들이 온통 무기를 장비하고 나온 것으로 보아 전투를 피할 순 없을 것 같다.

하필 이럴 때 일행과 갈라진 게 이나은이라니.

저 여자가 이걸 노리고 통로를 막은 건 아니겠지만, 덕분에 전력의 손실이 너무 크다.

“술판에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로비 상황도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이야.”

“그나마 저들이 좀 취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노인의 말대로 문틈으로 얼핏 보이는 방 안엔 엄청난 양의 술병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인당 세 병은 마셨을 거다. 실제로 우락부락한 몸집의 사내는 눈이 풀릴 정도로 많이 취해 있었고, 그와 함께 나타난 나머지 헌터 셋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들 괜찮아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로비에서 대치 상황이 펼쳐지는 와중, 우리의 상황을 알 수 없어 답답했는지 이나은이 외쳤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들 뒤로 비켜나 있으세요. 이깟 바위쯤은 금방 부수고….”

외침 후 이어진 큰 충격음.

[플레이어 ‘오윤아’가 생성한 암석에는 현재 ‘파괴 불가’ 속성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어머- 미안해서 어쩌나? ‘이깟 바위’는 내가 버티고 있는 한 절대 부서지지 않을 거란다.”

충격음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파괴 불가’ 속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글씨만 새겨질 뿐. 암석에는 조그만 금조차 가지 않았다. 이쪽에서도 김화영이 몇 번이고 암석을 발로 찼지만 마찬가지.

짜증 나지만 활을 든 저 여자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이나은도 그를 깨달았는지 결국 충격음이 멈추었다.

“이거 정말 안 부서질 것 같은데? 인제 어쩌지? 나은이 이대로 저기서 가만히 기다리라 해? 혼자 심심할 텐데.”

김화영의 말에 머리를 굴릴 때, 이나은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정현 헌터, 죽지 말고 거기서 버티고 계실 수 있죠?”

“뭐?”

“거기서 죽지 말고 버티고 계시라고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여기서 마냥 암석을 만든 헌터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릴 순 없어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이참에 주경기장에 있는 방어팀 놈들 전부 쓸어버리고 위패까지 부수고 돌아올게요. 안 그래도 한 놈도 빠짐없이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됐어요.”

동상 근처에는 분명 강한 방어팀 헌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을 거다. 이나은이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홀로 주경기장으로 향하겠다는 건 역시 물류 창고 일 때문인가.

복수심에 불타는 건 알겠지만, 이대로 이나은 혼자 위험을 감당하게 놓아둘 순 없다.

“너무 위험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말고 거기서 우리 기다리고 있어.”

“보조경기장에 오기 전 임수연 헌터가 스킬 ‘성역’으로 야구경기장에서 쌓인 피로를 해소해 주어서 컨디션은 최상이니, 제 걱정은 마세요.”

“컨디션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근데 저 이미 들킨 거 같거든요. 누가 라커룸으로 오고 있어요. 전 분명히 말했어요. 절대 죽지 마세요.”

“이나은 헌터?”

그 말을 끝으로 암석 반대편에선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은이 혼자 위패를 부수러 간 거야? 나 나은이 몸에 표식 새겨두지 않아서 스킬로 따라가지도 못하는데….”

내 실책이다. 이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일행 모두에게 표식을 새겨두도록 해야 했었는데.

“아니면 아예 내 스킬로 다 같이 바깥으로 도망쳐서 정문을 뚫고 주경기장에 들어갈래?”

“안 돼요. 그랬다간 시간이 너무 지체돼요. 아무리 이나은 헌터라도 주경기장에 있는 방어팀 헌터 모두를 그때까지 상대하고 있진 못할 거예요.”

“하긴 그렇겠지?”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빨리 저 헌터들 쓰러뜨리고 이나은 헌터 따라가죠.”

방침이 정해지자 송태섭이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그게 최선이겠네. 처음 보는 놈들이라 등급은 모른다만, 내가 두 명 맡을게. 대빵이란 헌터랑 그 뒤에 서 있는 남자 맡을 테니까, 김화영 헌터가 남자아이 맡아줘. 오윤아란 활잡이는 아저씨가 잘 견제해 주세요. 현이는 네 친구 데리고 우리 뒤에 있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요.”

그렇게 우리 일행이 각자의 무기를 장비하자 방어팀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쟤네 우리한테 칼 겨누는데? 싸우려고 하는 거 아니야? 이제 싸워도 되는 거지? 오랫동안 못 싸웠잖아. 그리고 이번에도 강이란 헌터님께서 붙잡으라고 한 저 남자애 놓치면 우리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안 놓치면 그만이다. 태웅, 아직 나 복제할 수 있나?”

“그림자들을 위에 많이 보내놔서, 기껏해야 한 명입니다.”

“그거라도 해봐라.”

“네, 권주혁 헌터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권주혁의 발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림자가 일렁입니다.]

[플레이어 ‘허태웅’이 그림자를 부립니다.]

[플레이어 ‘권주혁’의 그림자가 형체를 갖습니다.]

[그림자가 형체를 가져 힘을 잃습니다.]

[그림자의 모든 스탯이 기존의 1/45배 수치로 하락합니다.]

그러자 믿기지 않게도 권주혁의 그림자에서 그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사람이 솟아났다.

“완료했습니다.”

“이제 전기실을 지켜라.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번엔 건오, 너도 튀어 나가기 전에 스킬 좀 써라.”

“그것만 끝나면 맘대로 싸워도 되는 거지?”

“당연하다.”

[플레이어 ‘김건오’가 그림자의 부정을 씻어냅니다.]

[그림자가 본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그림자의 모든 스탯이 원상 복구됩니다.]

“됐지?”

“충분하다. 그럼 실력 좀 봐 볼까?”

그 말을 끝으로 그림자에서 솟아난 권주혁의 분신과 김건오가 덤벼들었다.

분신은 맨주먹만으로 송태섭의 대검을 받아내며 묵직한 전투를 이어갔다. 한편, 김건오는 김화영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검을 주고받으며 날카로운 전투를 이어갔다.

처음 전투가 시작되었을 땐 호각을 다투는 듯했다. 그러나 분신은 그렇다 치고 싸움에 환장한 듯한 김건오까지 자신의 몸에 입혀지는 상처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식하게 공격만 이어나가는 바람에 전투가 지속될수록 우리 측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저격용 총을 장비한 노인은 오윤아가 활에 메긴 화살을 견제하느라 그들을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고.

수연이마저 야구경기장에서 포인트를 모두 써 이들의 스탯을 강화해 주지 못하는 상태.

지금은 저 뒤편에서 권주혁 본체와 허태웅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전투를 구경하고 있지만, 그들까지 개입하면 분명 패배할 게 뻔하다.

“수연아, 일단 전투가 끝날 때까지 방에 들어가 있자.”

불평을 해봤자, 지금은 아무 소용 없다.

일행이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수연이와 함께 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곤 살짝 열어둔 방문 틈으로 로비의 상황을 살피는 동시에 상점을 뒤지며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혀, 현아….”

그렇게 정신없이 상점을 뒤지던 와중, 별안간 수연이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수연아, 잠시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아니, 여기 사람이….”

“응?”

수연이의 말에 시선을 방 안으로 옮기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 한가운데엔 흰 가운을 걸치고 있는 남성이 대롱대롱 묶여 있었다.

그의 배는 갈라진 채 모든 장기를 방바닥에 쏟아내고 있었고, 팔다리는 각각 있어야 할 자리를 잊은 채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너무해….”

“대체 여기서 뭔 짓을 한 거야….”

올라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목에 걸린 명찰이 보였다.

명찰에는 ‘전태용’이란 이름과 함께 ‘회사-실험실 연구원’이란 직책이 적혀 있었다.

“회사….”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중 가운의 주머니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뭐지?”

조심히 손을 집어넣자 조그마한 파란색 수첩이 나왔다.

“연구 일지?”

수첩의 첫 페이지엔 휘갈겨 쓴 글씨로 연구 일지라고 적혀 있었다.

일자는 시련이 시작되기 몇 달 전.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자 이번엔 연구 내용이 적혀 있었다.

─ ─ ─ ─ ─ ─

관찰 5일 차

상부에서 일러준 조건대로 실험을 진행한 지 5일 차.

여전히 변화 X

이번에도 실패.

무엇을 위한 실험?

적안을 만들기 위함?

그게 멸망한 세계에서 왜 필요하지?

자세한 걸 도무지 알려주지 않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동료 연구원이 도망쳤다가 실험체가 된 걸 보니 용기가 나지 않음.

─ ─ ─ ─ ─ ─

“회사란 곳에서 대체 뭔 짓을 하는 거야.”

“어? 그거 보면 안 된다.”

다음 페이지를 확인하려 할 때, 거칠게 방문이 열리며 권주혁이 들어왔다.

“강이란 헌터님께서 여기 들어온 놈 다 죽이라 했다.”

“근데 저 남자앤 산 채로 붙잡으라 하지 않았어?”

“그건 맞다.”

권주혁의 뒤편을 보니 쓰러져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여기 들어온 놈 다 죽이면서, 저 남자애 산 채로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제길.

잠깐 시체를 확인하는 사이에 로비 상황이 끝났을 줄이야.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뭔 일이 있던 거야?

“그건 대빵이 정해야지.”

“수연아, 얼른 이 반지를 끼고 도망….”

그다음 말을 이을 순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방문 앞에 서 있던 권주혁은 어느새 내 눈앞에서 주먹을 휘둘렀고,

“모르겠다. 그냥 머리 아프니 죽이고 술이나 마시겠다.”

동시에 빌어먹을 글자가 새겨졌다.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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