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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요리사-42화 (43/168)

[9. 한빙지옥 (18)]

“나은이 혼자 위패를 부수러 간 거야? 나 나은이 몸에 표식 새겨두지 않아서 스킬로 따라가지도 못하는데….”

당황한 김화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조심스레 내 얼굴부터 더듬었다.

권주혁의 주먹 한 방에 반쯤 날아간 머리통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 코, 입 모두 제 위치에 붙어있음을 확인하고 눈을 뜨자 통로를 가로막은 암석이 보였다.

“최악이네.”

기회가 새로 주어지긴 했지만, 귀환한 시점은 하필이면 이나은과 갈라진 직후.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여기 있는 인원들로 지금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건데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잠깐 한눈판 사이에 일행 모두가 전멸할 정도의 전력 차니 정면으로 맞붙는 건 불가능.

“아니면 아예 내 스킬로 다 같이 바깥으로 도망쳐서 정문을 뚫고 주경기장에 들어갈래?”

그렇다고 김화영의 스킬로 도망칠 수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도망친다면 저들은 그대로 주경기장으로 향할 것이다. 안 그래도 위험한 이나은에게 이들까지 보낼 순 없다.

“안 돼요. 저희가 여기서 빠져나가면 저 헌터들은 주경기장으로 갈 거예요. 이나은 헌터에게 더한 부담을 안겨줄 순 없어요. 저 헌터들을 쓰러뜨릴 수 없더라도 최소한 여기에 붙잡아두기는 해야 해요.”

“하긴 그렇겠지?”

“그게 최선이겠네.”

문제는 우리끼리 저들을 붙잡아둘 수 있냐는 거다.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삽시간에 무너진 이유라도 알면 대비책을 마련했을 텐데.

아니면 강하다는 꼬맹이 일행 중 한 명만이라도 이곳에 있다면….

“혹시 여기서 꼬맹이 그룹이 있는 곳까지 뛰어간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갑자기?”

“중요한 문제예요.”

“음- 아까 조심조심 여기까지 오는데 거의 10분 정도 걸렸으니까, 뛴다면 1분이면 되지 않을까? 보조경기장에서 주경기장 입구까지 가는 데엔 또 2~3분 정도 걸릴 거고. 아! 물론 나보다 스탯이 낮은 현이라면 그보단 더 걸리겠지?”

어렸을 때부터 계주 역할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다는 점을 참작하면 여기서 꼬맹이 그룹한테 가는데 넉넉잡아 8분. 거기서 지원을 요청하는 데 1분. 지원군은 나보다 스탯이 높을 테니 5분 내에 여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지원군이 오는데 총 걸리는 시간은 15분 이내.

권주혁 일당과의 전투가 벌어진 이후 일행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도 15분 남짓.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다.

“이야기 끝났으면 이제 다들 전투 준비하자. 처음 보는 놈들이라 등급은 모른다만, 내가 두 명 맡을게. 대빵이란 헌터랑 그 뒤에 서 있는 남자 맡을 테니까, 김화영 헌터가 남자아이 맡아줘. 오윤아란 활잡이는 아저씨가 잘 견제해 주세요. 현이는 네 친구 데리고 우리 뒤에 있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요. 뒤에 있는 방에선 수연이만 기다릴 거예요.”

“그러면 넌 어쩌려고?”

“전 꼬맹이 그룹한테 가서 지원 요청할게요. 어차피 헌터들과 싸우는 데 도움도 안 되니 굳이 여기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내 말에 김화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거기 방어팀 헌터 엄청 많았잖아. 우리 도와줄 여력 안 되는 거 아니야?”

“그 부분은 짚이는 게 있으니 괜찮아요.”

“그래? 그러면 내가 스킬 써서 금방 다녀올까?”

“안 돼요. 송태섭 헌터와 임성윤 헌터만으로 저들 넷을 상대하는 건 무리예요. 무엇보다 그 스킬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아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맞네! 알겠어.”

김화영에 이어 송태섭까지 내 의견에 동의하자 노인이 말했다.

“방침이 정해진 건가? 그렇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것 없지. 내가 적들의 시선을 돌려줄 테니, 그 틈에 달려가게.”

“알겠습니다. 그 전에 수연아, 이거 받아.”

방에 들어가더라도 절대 안을 보지 말라고 경고하며 손에 반지를 끼워주자 수연이는 금세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적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잘 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됐어요.”

“그럼 시작하지.”

그렇게 선언하며 노인은 털옷에서 무언가를 꺼내 로비 한 가운데에 던졌다.

곧 노인이 던진 기다란 물체에서 퍼져나간 연기에 로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예졌다.

“지금일세.”

그와 동시에 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하 통로에 뛰어들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쟤네 싸움 걸려는 거 아니야? 맞지? 맞지! 이제 싸워도 되지? 오랫동안 못 싸웠잖아. 그리고 이번에도 강이란 헌터님께서 붙잡으라고 한 저 남자애 놓치면 우리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안 놓치면 그만이다. 태웅, 아직 나 복제할 수 있나?”

어느덧 보조경기장으로 올라가는 입구 앞.

여태껏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잘 버텨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남은 시간은 거의 10분 남짓이려나.

그 안에 지원군을 데려와야만 하는데,

“여기로 지나가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입구를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이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입구를 막아선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중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어디 갔나 했는데, 여기 있었을 줄이야.”

창을 쥔 채 내게 점점 다가오는 사람은 최주일. 박우민처럼 방어팀에 붙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으신 거죠?”

“딸아이를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전 그쪽을 어떻게든 붙잡아야 합니다.”

“딸아이? 딸아이가 붙잡히기라도 한 거예요? 그래서 방어팀에 붙으신 거예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최주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대로면 설득은 불가능하겠네. 그렇다고 저 인간을 제치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지원 요청은 포기하고 로비로 돌아가서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하나….”

판단이 서자마자 몸을 돌려 로비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공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플레이어 ‘권주혁’이 그림자를 흡수합니다.]

[플레이어 ‘권주혁’의 모든 스탯이 일시적으로 흡수한 그림자의 스탯만큼 상승합니다.]

[어둠을 받아들여 10분 뒤, 플레이어 ‘권주혁’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스탯이 두 배가 된단 말이잖아.”

힘의 균형이 깨진 원인을 알게 된 순간. 내 목덜미를 잡은 최주일은 머리를 강하게 내리찍었고, 저 멀리서 일행이 하나둘 쓰러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는 어두워졌다.

***

“자기, 이제 정신 차릴 시간이야.”

무릎 쪽에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 절로 눈이 뜨였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시야에 들어온 건 온통 흰색으로 뒤덮인 세상. 그 가운데 망할 놈이 서 있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을까? 그새 말하는 법을 까먹은 거야? 그럼 내가 기억나게 해줄게.”

이도현이 단검으로 무릎을 찍은 뒤 이리저리 후비자 결국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소리 잘만 지르는 걸 보니, 이제 말하는 법도 기억났을 것 같은데?”

“…여긴 또 어디야? 난 분명 지하 통로에서 기절했을 텐데?”

“몰라서 묻는 거야? 아직 정신이 덜 들었어?”

다시 한번 가해지는 고통.

그 이후로 얼마나 비명을 질렀을까.

이도현은 한참 후에야 단검을 가지고 놀던 손을 멈추었다.

“내가 증오스럽단 표정이네. 그 표정 맘에 들었으니, 답을 알려줄게. 자기랑 내가 있는 곳은 주경기장이야.”

“뭐?”

“그리고 자기는 부서진 동상에 묶여 있지.”

이도현의 말에 최대한 고개 돌려 뒤쪽을 보니 진짜 부서진 동상이 보였다.

“그럼 공방전은….”

“당연히 공격팀의 승리로 끝났지. 이제 이대로 날이 밝으면 시련이 끝날 거야.”

“그럴, 리가.”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2명

- 잔여 동상 수 : 0개

“…정말이잖아. 근데 공격팀 플레이어 수가 두 명이란 건?”

“자기랑 자기 일행 한 명 빼고 모두 죽었거든. 자기가 최주일 헌터한테 붙잡히지만 않았으면 다들 지금까지 잘 살아있었으려나?”

“뭐? 무슨 짓을 한 거야!”

“워워- 내가 한 거 아니니 그렇게 화내지 마. 모두 ‘공방전’ 중 죽었을 뿐이야. 난 자기 일행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고. 지금까지는 말이지.”

이도현은 신난다는 듯 손바닥을 이리저리 비비면서 내 뒤로 이동했다.

곧 다시 나타난 이도현은 기절한 이나은을 안고 있었다.

“이나은 헌터!”

“자, 지금부터 내가 자기한테 한 가지 부탁을 할 거거든. 근데 자기가….”

“부탁이든 뭐든 간에 이나은 헌터부터 놓고 이야기하지?”

“하아- 자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말 끊는 거인 거 몰라?”

이도현은 싸늘하게 말하더니 별안간 허공에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단검이 쥐어졌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그만….”

붉은 궤적을 그린 단검.

궤적의 끝에서 떨어진 이나은의 머리는 통통 굴러 와 정확하게 내 앞에서 멈추었다.

“…둬.”

“내 부탁 안 들어주면 자기도 결국엔 이렇게 될 거야. 알겠어?”

“지금 무슨 짓을….”

“자기가 지금부터 할 건 간단해. 초월자님께서 자기한테 전속 계약을 걸 텐데 그걸 받아 주면 돼. 쉽지?”

[‘피의 살육자’님이 전속 계약을 요청합니다.]

“음- 거부한다면 자기 피부 전부 벗긴 다음에 내장 하나하나 꺼내다가 마무리로 목 뎅강 자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마 지금까지 그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지 않을까?”

고작 내게 전속 계약을 맺게 하려고 이딴 짓을 한 거라고?

고작, 전속 계약 하나 때문에?

“그런 거였으면 굳이 이나은 헌터를 죽일 필욘 없었던 거잖아.”

“응? 무슨 소리야. 그래야 자기 절망하는 표정 보지. 초월자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보상이라고?”

허탈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오래 기다리진 못하니, 어서 대답해줘.”

저 자식의 목적이 뭔지에 관해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그냥 저 자식과 엮인 순간부터 내가 해야 할 건 한 가지였다.

저 자식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

[‘특급 냉장고’에 장비한 ‘빅풋 털옷’이 보관됩니다.]

“네 놈만은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줄게.”

[‘빙하기’의 세찬 바람에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 ‘영구동상’에 걸립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CONTINUE?]

[최근 저장 지점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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