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43화 (44/168)

[9. 한빙지옥 (19)]

온몸을 감싼 따스함이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가신 데에 의아해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몸을 덮은 ‘빅풋 털옷’이 보였다.

“나은이 혼자 위패를 부수러 간 거야? 나 나은이 몸에 표식 새겨두지 않아서 스킬로 따라가지도 못하는데….”

거기에다 몇 번이고 들은 김화영의 말. 그제야 귀환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든 감정은 안도감. 그러나 얼마 안 가 이도현을 향한 분노가 뒤따랐다. 안도감과 분노.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마음속을 이리저리 떠다닐 때, 이도현이 이나은의 목을 단검으로 베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찰나의 순간은 무척이나 느리고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되었다.

그러다 이번 시련 내내 이도현한테 당했던 것들이 차르륵 영화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예술회관에서 나를 가지고 논 것을 시작으로 이나은을 죽인 그 순간까지 전부.

그 모든 것이 고작 나를 ‘피의 살육자’란 초월자와 전속 계약 맺게 하려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하니 결국 분노가 안도감을 밀어냈다.

그 초월자는 대체 왜 나랑 전속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거지? 아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지. 뭐 인제 와서 그딴 게 중요하나?

그냥 이도현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에 ‘피의 살육자’까지 남은 시련에 참여할 수 없도록 박살 내면 될 뿐인데.

초월자든 뭐든 간에 상관없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이도현과 ‘피의 살육자’, 둘 모두에게 이번 시련 동안 날 괴롭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다.

“아니면 아예 내 스킬로 다 같이 바깥으로 도망쳐서 정문을 뚫고 주경기장에 들어갈래?”

그를 위해 우선으로 해야 할 건 저 방어팀 놈들을 뚫고 주경기장에 가는 것.

“도망칠 필요 없어요.”

그러지 못한다면 이전과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권주혁에게 일행 모두가 쓰러지고, 나는 붙잡혀서 이도현을 마주하게 되겠지.

그 전개대로 흘러가게 놓아둘 순 없다.

“저흰 지금부터 저 헌터들을 모두 쓰러뜨릴 거거든요.”

권주혁 일당을 쓰러뜨리고 로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고려해야 할 건 두 가지.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후에 합류할 최주일을 막는 것.

지금 급한 건 전자를 해결하는 거다.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무너진 건 저 일당의 스킬 연계 때문이었지.”

권주혁 일당의 스킬 연계는 총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허태웅이 스킬을 써 권주혁의 그림자에서 분신을 뽑아낸다.

둘째, 김건오의 스킬로 분신의 스탯이 낮아진다는 부작용을 없앤다.

셋째, 자신과 같은 스탯을 지니게 된 분신을 권주혁이 흡수한다.

마지막, 스탯이 두 배가 된 권주혁이 모든 적을 쓸어버린다.

물론 분신을 흡수한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10분 뒤 ‘전투 불가’ 상태가 된다지만, 그 시간 동안 권주혁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엔 없다.

“분명 저 연계에도 약점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수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로비를 둘러보다 문득 ‘전기실’이란 팻말에 눈길이 멈췄다.

‘이제 전기실을 지켜라.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지난번에 허태웅 헌터 보고 저기를 지키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예상대로 약점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를 뚫을 방법 또한 여기 로비에 있었다.

“김화영 헌터, 표식은 어디에나 새길 수 있는 거죠?”

“으응?”

“움직이는 물체에도 표식을 새길 수 있어요? 하긴 사람한테도 새길 수 있는데 당연히 새길 수 있겠죠?”

“그렇지? 에헴! 모든 포인트를 투자해서 살만한 가치가 충분한 스킬이라니까! 근데 갑자기 왜?”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진짜 저 스킬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포인트를 투자해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내 상점에도 저 스킬이 있었다면 분명 구매했을 거다.

“그 스킬 쓸 데가 있어서요. 송태섭 헌터는 잠시만 저놈들 상대해 주실래요?”

“응. 하지만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러면 임성윤 헌터께서 연막탄으로 시간 좀 끌어주세요.”

“알겠네. 그런데 자네 나랑 어디에서 마주한 적 있나? 내가 연막탄을 쓴다는 건 어떻게?”

“아저씨, 그냥 현이 말대로 해요. 쟤가 저런 눈빛일 때 틀린 지시를 내린 적 없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송태섭은 대검을 뽑아 들고 일행의 제일 앞에 나섰다. 그러자 노인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더니 연막탄을 로비 한 가운데에 집어 던졌다.

뿌연 연기는 금세 로비를 가득 채워 시야를 가렸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쟤네 싸움 걸려는 거 아니야? 맞지? 맞지! 이제 싸워도 되지? 오랫동안 못 싸웠잖아. 그리고 이번에도 강이란 헌터님께서 붙잡으라고 한 저 남자애 놓치면 우리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안 놓치면 그만이다. 태웅, 아직 나 복제할 수 있나?”

“그림자들을 위에 많이 보내놔서, 기껏해야 한 명입니다.”

저들이 스킬로 수작 부리는 동안, 난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연막이 걷힌 즉시 바로 지시대로 움직여주세요.”

연막이 걷히는 데는 생각 외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싸우자. 얼른 싸우자고! 다들 어디에 있어? 앞이 하나도 안 보이니까 짜증 나잖아!”

“잠깐 기다려라.”

일행에게 작전을 전달하자마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심에는 곧게 주먹을 뻗은 권주혁이 있었다.

“이깟 연막 따윈 주먹 한 방이면 충분하다.”

“격발하겠네.”

그 순간, 가늠자에 눈을 대고 있던 노인이 숨을 한번 고르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은 방어팀 그 누구에게도 명중하지 않고 전기실 안의 벽을 향해 날아갔다. ‘파괴 불가’ 속성이 걸린 벽에 꽂힐 리 없는 총알은 그대로 튕겨 나 바닥에 떨어졌다.

“너희 지금 뭐 한 거야? 연막이 걷히는 틈을 타서 우리 중 한 명을 저격하려고 한 것 같은데, 노인네라 그런지 눈이 안 좋나 보네. 대빵, 이런 애들 상대로 진심으로 싸울 필요가 있을까?”

“당연하다. 빨리 쓰러뜨리고 남은 술 모두 마실 거다.”

권주혁 일당은 총알이 내가 원하는 위치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자기들끼리 신이 나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현아, 시작할까?”

“네.”

고개를 끄덕이자 김화영은 씩 웃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화영이 다시 나타난 곳은 전기실 안, 표식을 새겨둔 총알 위.

“뭐, 뭡니까?”

김화영은 자신이 쓴 스킬을 보고 당황한 허태웅을 단칼에 쓰러뜨렸다. 그를 본 동시에 난 방송 톤의 목소리로 외쳤다.

“밤이 되었습니다!”

신호로 정한 그 대사에 맞추어 김화영이 전기 스위치를 모두 내리자 로비엔 암흑이 맴돌았다.

“분신은 고개를 들어주세요. 그리고 죽일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알아서 사라져주세요!”

[플레이어 ‘권주혁’의 그림자가 형체를 잃습니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로비엔 권주혁 본체만이 남아 있었다.

“낮이 되었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분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네요. 그러고 보니 그림자는 광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요? 하긴 그 정도 지식은 있으니까 전기실을 지키라고 했겠죠? 아니면 전기실에 남은 술병을 지키려고 그랬던가요?”

“감히 그딴 말을!”

비아냥에 오윤아가 이를 갈며 화살을 쏘았으나 송태섭이 한발 먼저 움직였다.

송태섭이 빗겨 든 대검에 화살은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에 그치지 않고 송태섭은 묵직하게 검을 휘둘러 오윤아를 반으로 갈랐다.

[플레이어 ‘오윤아’가 생성한 암석의 ‘파괴 불가’ 속성이 해제됩니다.]

오윤아를 쓰러뜨린 송태섭은 이제 권주혁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에 당황해서 그런지 권주혁은 송태섭과의 싸움에서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 권주혁을 도우려던 김건오는 김화영에게 마크당했다.

이번엔 견제할 상대가 없는 노인이 김화영과 송태섭의 전투에 개입할 수 있으니, 수적으로 이미 우리 쪽이 유리하다.

이 정도면 로비 쪽 상황은 금방 정리될 것 같다.

“수연아, 이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방해되지 않게 방에 들어가 있자.”

로비의 전세를 뒤집어 준 이후엔 전태용의 시체가 묶여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이에게 절대 내부를 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에 난 홀로 시체에 다가갔다.

한번 본 정도로는 익숙해지지 않았는지 처참한 시체를 보니 구역질은 또다시 올라왔다.

그를 간신히 참으며 시체에 걸린 명찰과 수첩을 챙겼다.

이후 수연이의 곁에 돌아와 수첩을 넘기며 이전에 확인하지 못했던 연구 내용을 살폈다.

─ ─ ─ ─ ─ ─

관찰 124일 차

상부에서 일러준 조건대로 실험을 진행한 지 124일 차.

벌써 많은 이에게 실험함.

변화 있던 실험체는 없었음.

실험에 실패한 실험체는 모두 어디론가 데려감.

아마 죽인 것 같음.

다음 실험마저 실패한다면 책임자에게 가 연구 목적에 관해 물어야겠음.

─ ─ ─ ─ ─ ─

“벌써 다음 장이 마지막이네. 뭐, 실험에 실패했다는 내용밖에 없잖아. 마지막 장에서 뭐라도 건져야 할 텐데.”

─ ─ ─ ─ ─ ─

연구 목적에 관해 알게 됨.

제물로 적합한 신체 조건을 찾기 위함

제물 + 진명 + ?

그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조건.

실제로 책임자는 성공한 유일한 사례.

다른 이들도 여기에 불러들이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서 도망쳐 이 사실을 알려야 함.

─ ─ ─ ─ ─ ─

“제물이라면 분명.”

‘제물이 준비되는 대로 파견된 곳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로 돌아오라 했던가?’

박무성이 엿들은 이도현과 회사에서 온 사람의 대화에서 나온 단어이다.

“진명은 뭐고, 그들을 불러들인다는 건 또 뭐야?”

수첩은 의문을 풀어주기는커녕 혼란만을 더했다.

“이 사람이 여기서 죽었다는 건, 도망쳤다가 붙잡혔다는 거겠지.”

회사의 위치를 말하자마자 전송된 박무성.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도망친 연구원.

모든 정보는 회사랑 절대 엮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도현을 쓰러뜨리는 대로 여기랑은 어떻게든 엮이지 않도록 해야겠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이름 하나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백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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