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20)]
이름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고 별표까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태용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수첩엔 이름 외에 다른 그 어떠한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백민기, 이 사람도 회사와 연관된 사람인 건가?”
혹시 몰라 이름을 외워두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고 있자 로비에서 김화영이 우리를 불렀다.
“현아, 전투 끝났나 봐. 근데 그건 뭐야? 수첩?”
“으응? 별거 아니야.”
수연이가 볼 수 없도록 전태용의 명찰과 수첩은 얼른 ‘특급 냉장고’에 보관했다. 아직 이나은 외의 일행에게 회사에 관해 알릴 땐 아니었다.
“김화영 헌터가 부르니까 어서 나가보자.”
그대로 수연이의 등을 떠밀며 로비로 나가니 아까까지 우리를 막아선 권주혁 일당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 송태섭이 김화영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서 있었다.
“송태섭 헌터님, 괜찮으세요?”
“응. 살짝 다친 것뿐이야.”
살짝 다쳤다기엔 송태섭의 상체 곳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인원수에서 우위를 점한 채 전투를 시작했다 할지라도 권주혁이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살짝 다치긴, 뭐가 살짝 다쳤나!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무리해서 날 지킬 필욘 없다니깐!”
“아저씨가 안 다쳤으면 됐죠. 전 젊어서 이깟 상처쯤은 금방 나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상처는 노인에게 가해진 권주혁의 공격을 대신 맞아주다 생긴 것 같다.
“잠시 상처 부위 좀 봐도 될까요?”
둘의 말다툼을 중재하며 수연이가 얼른 송태섭의 상처를 살폈다. 그러더니 살짝 아플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위에 손을 댔다.
[스킬 ‘백의의 천사’가 발동됩니다.]
송태섭이 표정을 찡그리며 신음을 잠깐 흘리자 상처가 점차 아물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서야 수연이는 손을 뗐다.
“어. 통증도 괜찮아진 것 같아. 나랑 흩어진 사이에 이런 스킬까지 생긴 거야?”
“네. 어쩌다 보니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다른 분들은 어디 다치신 곳 없나요?”
환하게 미소 짓는 수연이의 등을 탁탁 치며 김화영이 말했다.
“태섭이 말곤 다들 멀쩡해. 피로도 없애주더니 이제 상처까지 치료해주고, 완전 만능이구나! 앞으로 수연이만 믿고 맘 편히 싸울게!”
“아무리 제 스킬 있다 해도 그건 안 돼요!”
수연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신기하다는 듯 송태섭의 상처를 몇 번이고 훑던 김화영은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빛을 내게 옮겼다.
“현아, 근데 저 대빵 분신이 불 껐다 켜면 사라질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림자가 형체를 얻었다는 글씨가 새겨졌었잖아요.”
“응, 그랬지.”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으니 분신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다행히 생각대로 맞아떨어졌네요.”
설명을 들은 김화영은 이해했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아마 주경기장 입구 쪽에 있던 방어팀 헌터들도 대부분 권주혁 헌터의 분신이었을 거예요. 김화영 헌터가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서 그쪽에 있던 분신들도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만일 ‘전기실’의 전기 스위치가 주경기장 전체 전력과는 무관하다 하더라도, 스킬 시전자와 본체를 모두 쓰러뜨렸으니 위쪽 상황도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말은 이번에도 내가 큰일 한 건 했다, 이거지?”
“그렇게 되겠네요. 어찌 되었든 간에 주경기장에 가봐야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긴 하겠지만요.”
“그래? 그러면 태섭이도 다 나았으니 바로 가보자!”
김화영이 발을 휘두르자 암석은 이전과 달리 쉽게 산산이 조각났다.
부서진 암석 뒤로 보이는 라커룸은 전투가 있었던 듯 굉장히 어질러져 있었다. 로커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유니폼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벌써 한바탕했나 보네.”
“무슨 일 있으면 안 될 텐데…. 이나은 헌터님 괜찮겠지?”
“응.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걱정되니 서둘러 이나은 헌터에게 가보죠. 송태섭 헌터는 여기서 쉬고 계실래요?”
송태섭은 괜찮다며 대검을 한 번 크게 휘둘러주었다.
“그럼 진짜 가볼까요?”
“잠깐!”
그때 통로 안으로 들어가려는 우리를 노인이 멈춰 세웠다.
“누가 이리로 오고 있다네.”
노인은 우리와 달리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최주일이 보였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오호라, 누군가 했는데 최주일 헌터였구먼.”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내 물음에 노인은 작전을 짤 때 지하 통로의 존재를 알려준 헌터라 답했다.
“저자의 스킬 중에 투시가 있다더군. 그 스킬로 주경기장 내부를 살폈는데, 보조경기장에서 주경기장으로 연결된 지하 통로에 방어팀 헌터가 배치되지 않았다 해서 우리가 지금의 작전을 짜게 되었다네. 근데 본인은 일행 한 명이 크게 다쳐서 작전엔 참여 못 할 것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
주경기장 입구엔 권주혁의 분신들이, 지하 통로엔 권주혁 일당이 대기하고 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꼬맹이와 노인의 일행은 공격팀이란 글씨를 머리에 달고 나타난 최주일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고 그의 앞에서 작전을 짰을 것이다. 그로 인해 최주일이 작전을 그대로 이도현에게 갖다 바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헌터, 저희랑 목적이 달라요.”
“목적이 다르다니?”
“동상을 부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지키는 게 목적인 사람이에요.”
“자네 저자 머리에 쓰인 공격팀이란 글씨 안 보이나?”
노인의 반박에도 최주일은 창을 단단히 쥐며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이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최주일은 이전에 그러했듯 계속해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만난 박우민 헌터랑 똑같은 경우지? 쓰러뜨린다?”
“잠시만요.”
의외로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무기를 장비한 김화영을 붙잡고 최주일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를 막아서지 못하면 그쪽 따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거죠?”
“…그런 게 아닙니다.”
정곡에 찔렸는지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최주일이 멈추었다.
“아니라면 이렇게 저희한테 창을 겨눌 이유가 없잖아요.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이건 다 사정이 있어서….”
“박우민 헌터는 박무성 헌터의 동생이라 방어팀을 도왔다고 쳐도, 그쪽이 방어팀을 도울 이유라곤 딸아이 외에 별다른 이유가 생각 안 나거든요?”
“저랑 만난 적도 없는데 딸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전에 제가 방어팀을 돕는 이유가 어째서 중요한 겁니까?”
“혈연관계로 묶인 박우민 헌터랑 달리 그쪽의 경우에는 이유에 따라서 저희 편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만 되면 오히려 방어팀의 허를 찌를 수 있을 테고.”
솔직히 원하는 거는 최주일을 이용해서 이도현의 꼬리를 붙잡는 거이긴 하지만.
“돌아선다.”
최주일은 한참 동안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결국 진실을 말했다.
“맞아요. 제가 강이란 헌터님의 세력을 돕는 이유는 우리 유라 때문입니다. 공방전에서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인질로 잡아둔 제 딸은 풀어준다고 했는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유라를 실험체로 쓴다고….”
“잠시만요. 실험체라면?”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최주일은 그 말을 끝으로 우리를 향해 창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딸을 위해서라면…. 제가 무슨 수를 써도 당신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사정은 알겠네만, 우리 역시 자네를 막아설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네. 저자는 내가 맡도록 하지. 태섭이는 다른 친구들 데리고 얼른 주경기장에 가게나.”
노인이 총을 장전하자, 송태섭은 무슨 소리냐며 자신이 이곳에 남겠다고 말했다.
“아니. 너도 이제 슬슬 내게서 떠날 연습을 해야지.”
“네? 아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보게. 이런 놈한테 질 정도로 약하진 않거든. 나름 A급 헌터이지 않나? 고유능력도 있어서 일대일 정면 승부에선 질 일이 없네.”
“그건 맞지만.”
“무엇보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잃어선 안 되잖나? 그러니 꾸물대지 말고 어서 가게.”
노인이 등 떠밀자 송태섭은 망설이다 통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연이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르고 이어서 김화영까지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라 통로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최주일 쪽을 바라보니 갑자기 전태용의 시체가 떠올랐다.
왜 이럴 때 하필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건지….
“그전에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최주일 헌터, 따님은 지금 어디에 붙잡혀 있는지 아시나요?”
“그건….”
“회사 실험실이랑 관련된 곳에 있는 거죠?”
“…네.”
“혹시나 기회가 닿는다면. 정말 혹시나 그럴 기회가 있다면 따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이대로는 찝찝해서 안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네요.”
[플레이어 ‘최주일’이 생명을 불태워 부지런히 가로등의 불을 밝힙니다.]
계속해서 머리를 숙이는 최주일을 뒤로하고 난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화끈하게도 저질렀네.”
송태섭의 말대로 라커룸부터 주경기장의 그라운드로 이어진 길 곳곳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다 방어팀 헌터들이네요.”
“이러다 정말 나은이 혼자서 공방전 끝내는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서두르죠.”
발걸음을 재촉해 홈팀 선수가 입장하는 통로로 그라운드에 나서자 거대한 동상이 보였다.
동상은 양 축구 골대 사이에 세워져 있고, 그 동상의 발 부근에 놓인 위패에서 빛이 하늘 높이 뻗어 오르고 있었다.
“정말 다 쓰러뜨렸잖아.”
압도적인 동상의 모습에 미처 못 보았는데, 그라운드 곳곳엔 방어팀 헌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제 그쪽만 남은 거죠?”
동상의 앞, 이나은이 자신에게 덤벼든 방어팀 헌터 한 명을 마저 쓰러뜨리고 위패를 향해 나아갔다.
긴 전투 탓에 지친 듯 보였으나 이나은의 눈빛은 매우 매서웠다.
“덕분에 그렇게 되었네. 내 수고를 덜어준 감사를 어떻게 표해야 좋으려나?”
주먹을 쥔 이나은의 앞.
이도현이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