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21)]
“수고를 덜어준 감사? 하, 어이가 없네. 그쪽이 정현 헌터가 야구경기장에 붙잡혔다고 거짓말한 탓에 피곤했던 거 생각하면 화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니까 헛소린 그쯤 하세요.”
“어라? ‘그 거짓말’ 덕분에 박무성 헌터를 처리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었어?”
이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요?”
“자기들, 나 아니었으면 박무성 헌터가 거기서 괴수 모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걸? 내 말 틀려?”
“지금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싶어서 스스로 내부고발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이나은의 따짐에도 이도현은 뭐 문제 될 게 있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도현이 저럴 수 있는 이유는 뻔했다. 실제로 저 자식은 공방전에서 이기든 지든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목적만 이룰 수 있으면 될 뿐.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가셨네. 됐고요, 강이란 헌터 어디 숨어있는지나 말하세요.”
“숨어있다? 자기 눈앞조차 바라보지 못한다니. 이러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잖아.”
또다시 터진 이도현의 웃음. 결국 이나은은 참지 못하고 먼저 움직였다.
“그럼 찾는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쪽은 다른 놈들처럼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세요.”
그렇게 이나은은 단숨에 이도현의 앞으로 가 주먹을 휘둘렀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도현은 너무나 가볍게 자신에게 뻗어온 주먹을 붙잡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공격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어떻게?”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걸 보니 자기가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런 생각 빨리 버리는 게 좋아. 세상엔 자기보다 강한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이도현은 여유롭게 이나은을 밀쳐내고 단검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자기가 나 웃겨줬으니까 수업 한 번 해준다 칠게. 자, 마음껏 덤벼봐.”
그의 도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실패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뒤후리기’ 기술에 실패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실패하였습니다.]
예상외로 전투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이도현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공격을 흘리는 동시에 단검을 휘둘러 이나은의 몸에 상처를 더해갔다.
“‘사흉 혼돈’을 한 방에 쓰러뜨렸을 때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본 바로 이도현은 최소 S급 헌터.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수연이가 이나은의 스탯을 올려주지 못하는 현재로선 우리 일행이 저 자식을 이길 방법은 없다.
“우선은 이나은 헌터를 데리고 물러나서 위패를 부술 방법을 찾아보죠.”
“아니, 그건 힘들 거야.”
“힘들다뇨?”
송태섭은 대검을 장비하며 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한 적 있지? ‘지하의 지배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악하고, A급 괴수보다 훨씬 강한 놈이라고.”
‘강이란 그놈은! ‘지하의 지배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악하고, 저딴 괴수보다 훨씬 강한 놈이라고! 우리가 힘을 합쳐도 그놈 한 명에겐 못 당해내.’
저 말은 송태섭이 우리 일행과 헤어졌을 때 한 말이다. 근데 지금 상황에서 왜 다시 그 말을?
“그건 분명 강이란 헌터 이야기할 때 했던 말이잖아요?”
“맞아. 우리끼리의 힘으론 저 자식한테서 이나은 헌터를 빼내는 동시에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내가 이나은 헌터와 함께 강이란 저놈을 막아내는 동안 너희끼리 도망쳐.”
“방금 뭐라….”
송태섭은 그 말을 끝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왜 뜬금없이 강이란 헌터의 이야기를?”
저 말은 마치 이나은이 맞선 상대는 이도현이 아니라 강이란이라는….
그러고 보니 방어팀 헌터 중에서 이도현을 바라보며 이름을 직접 언급했던 사람이 있었나?
“어라?”
없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를 들었던 적이 없다.
‘인천 중앙 공원’에서 함께 있던 부하들도, 서화진도 저자의 이름을 부른 적은 없다.
“잠깐만.”
순간 줄곧 품어왔던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이도현은 어째서 자유로이 방어팀 헌터를 부릴 수 있었는가?
이도현은 어떻게 박무성이 야구경기장에서 괴수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권주혁 일당은 왜 날 두고 ‘강이란 헌터님께서 붙잡으라고 한 남자애’라고 말했는가?
여러 가지 의문점은 한데 모여 하나의 답을 가리켰다.
“…설마.”
저 인간의 이름은 이도현이 아니라 강이란이란 것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현아, 내 말 안 들려?”
“네, 네?”
김화영이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났다.
“현아, 셋 모두가 도망치긴 그른 것 같거든? 일단 둘이 먼저 도망쳐.”
[플레이어 ‘이나은’의 ‘겨루기 상태’가 해제됩니다.]
“이미 늦었나? 하여튼 당장 도망쳐서 그 꼬맹이 일행? 그쪽으로 가.”
불안감을 느끼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바라보니 송태섭과 이나은은 이미 바닥에 축 늘어진 상태였다.
“아니, 자기들은 도망칠 필요 없어. 난 여기서 누구도 죽일 생각 없거든.”
진정하라는 이도현의 말에도 김화영은 단검을 장비하며 싸울 준비를 했다.
“정말이라니까? 여기 두 사람도 기절했을 뿐, 죽진 않았어. 아, 혹시 죽여줬으면 좋겠단 거야?”
이도현이 몸을 낮추어 단검을 두 사람의 목에 가져다 대고야 김화영은 단검을 집어넣었다.
“그래그래. 우리끼리 싸워서 좋을 게 뭐 있어. 무엇보다 자기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있어야 한단 말이야.”
아직? 이제 ‘피의 살육자’와 전속 계약 맺으라며 일행들을 죽이려는 거 아니었나?
“그리고 자기는 이제 내 이름 제대로 알았어?”
“이름은 굳이 왜 속인 거야?”
“재미있잖아. 끝까지 더 속이고 싶긴 했는데 실패해서 아쉽긴 하네. 어쨌든 여기 상황부터 빨리 끝내볼까? 자기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몸이 근질거려 미칠 것만 같거든!”
별안간 이도현, 아니 강이란은 자신의 뒤에 있는 위패에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만을 내가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아?”
그리곤 단검을 휘둘렀다.
[82032-B 구역 방어팀의 플레이어 ‘강이란’이 ‘주경기장’에 위치한 위패를 부러뜨렸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동상이 파괴됩니다.]
위패가 부러지자 거대한 동상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다 자기들이 열심히 다른 방어팀 헌터들을 죽여준 덕분이야.”
어이없는 상황에 일행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자 강이란은 덧붙였다.
“이번 시련의 실패 페널티를 유심히 안 읽었나 보네?”
그가 말해준 실패 페널티란 ‘해당 팀의 플레이어 한 명 생존’.
[82032-B 구역, ‘방어팀’이 공방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실패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방어팀의 플레이어 한 명만이 생존합니다.]
“즉, 방어팀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난 이번 시련에서 무조건 생존한다는 의미지. 회사에서 쓸데없어진 우리 세력 좀 교체하라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하게 정리했네. 회사에서 무척이나 좋아하겠어.”
처음부터 방어팀 전체를 죽이고 자신 홀로 살아남으려고 했단 건가.
“이번 시련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철저히 이용당한 기분은 어때?”
저 말대로다.
정말 철저히 이용당했다.
“감상평은 아껴둬. 이제 당분간 헤어질 시간이니까.”
[‘피의 살육자’님이 당신이 헤쳐나갈 길을 고대합니다.]
“전에 말했지? 다시 볼 땐 서울에서 보자고. 어디서 만날지는 이쯤이면 알겠지? 자기가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갈 거야. 그리고 그땐 이렇게 봐주는 일 따윈 없을 거야.”
[‘피의 살육자’님이 500만 포인트를 사용하여 자신의 수혜자를 텔레포트 시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강이란은 손을 흔들더니 사라졌다.
“강이란!”
서둘러 무너져 내린 동상 쪽으로 달려갔지만, 당연히 강이란을 붙잡을 순 없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동상을 내리치며 욕설을 내뱉는 내 뒤에서 김화영과 수연이의 대화가 들렸다.
“수연아, 나은이랑 태섭인 괜찮은 거야?”
“네. 생명엔 지장이 없을 거 같아요.”
[스킬 ‘백의의 천사’가 발동됩니다.]
“현아, 화나는 건 알겠지만 일단 진정하자.”
간신히 화를 집어삼키고 알겠다고 답하려는 순간, 글씨가 새겨졌다.
[82032-B 구역, ‘공격팀’이 공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82032-B 공격팀 클리어 조건]
- 공격팀 플레이어 수 : 13명
- 잔여 동상 수 : 0개
[위패에 걸린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발동됩니다.]
[B급 괴수 ‘빙혈어’가 등장합니다.]
[S급 괴수 ‘빅풋’이 등장합니다.]
“끝난 거 아니었어?”
글씨대로 그라운드 곳곳에서 땅을 파고 ‘빙혈어’와 ‘빅풋’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연아, 기절한 분들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저염식 전도사’님이 부서진 동상을 바라보며 격노합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이 격노하여 이성을 잃습니다.]
“빨리!”
“알았어.”
[스킬 ‘축복’이 발동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의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플레이어 ‘송태섭’의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플레이어 ‘송태섭’이 ‘기절’ 상태에서 깨어납니다.]
수연이의 손에서 뻗어나간 빛이 모두 흡수되자 이나은과 송태섭은 몸을 들썩였다.
“현아, 이도현? 강이란? 그 사람이 왜 위패를 부수었는지도 모르겠고, 초월자님이 격노했다는 글씨가 왜 새겨졌는지도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알겠거든. 난 일단 저 괴수들 막고 있을 테니깐 여기서 나갈 방법은 네가 알아서 생각해줘.”
카드를 하나 뽑아 든 김화영은 제일 앞서 달려든 ‘빅풋’을 쓰러뜨리곤 옆에서 덤벼드는 ‘빙혈어’에게 단검을 던졌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격노에 ‘염우’가 내립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하늘에선 흰 결정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아니 맛이 짜. 소금인 거 같은데? 왜 하늘에서 소금이?”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0%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1%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2%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