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빙지옥 (22)]
“소금이라고?”
하늘에서 내리는 결정에선 정말 강한 짠맛이 느껴졌다. 그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니 문득 최근에 맞이했던 죽음이 떠올랐다.
새하얀 세상에서의 죽음.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라운드를 덮고 있던 건 사실 눈이 아니라 소금….
“잠깐, 그게 다 소금이란 건….”
이제야 깨달았다. 당시 내가 강이란과 대면한 시점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이 모두 종료된 이후. 이나은을 제외한 공격팀 전원은 여기에서 죽은 것이었다.
‘모두 ‘공방전’ 중 죽었을 뿐이야. 난 자기 일행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고.’
“그 말도 사실이었던 건가?”
강이란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일행이 죽은 건 위패를 부순 뒤 등장한 괴수 때문. 아니지, 강이란을 마주했을 당시 그 어디에서도 괴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쏟아지는 괴수는 시작에 불과하고 공격팀 전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언가는 아직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나?
만일 내 생각대로 공격팀을 전멸시킨 무언가가 따로 존재한다면.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8%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9%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10% 완료되었습니다.]
뭔진 몰라도 지금 적히는 현신 준비와 연관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캠비온 녹스’, 그 자식은 공방전 끝에 왜 이딴 걸 준비해둔 거야?”
[‘캠비온 녹스’님이 당신의 분노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사악함에 만족하여 ‘캠비온 녹스’에게 4,444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현아, 이나은 헌터님하고 송태섭 헌터님 깨어났어.”
‘캠비온 녹스’에게 불평을 내뱉고 있을 때, 몸을 들썩이던 이나은과 송태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나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욕설부터 내뱉었다.
“강이란! 강이란 헌터는 어디 갔어요?”
“위패를 부수고 사라졌어.”
“네? 위패를 부수었다고요? 그 인간 방어팀이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부서진 동상 쪽에 눈짓을 보내자 이나은은 혼란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괴수는 왜 이리 많은 거예요? 혹시 위패에도 ‘캠비온 녹스’의 술식이 걸려 있었어요?”
“응. 위패를 부수자마자 발동되도록 해 두었나 봐.”
이나은은 이를 한 번 갈더니 바로 앞에서 달려든 ‘빙혈어’를 주먹으로 으스러뜨렸다.
“골치 아프네요. 강이란 헌터에 관한 건 나중에 생각하죠.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인 것 같으니까.”
“가능하겠어?”
“되게 해야죠. 저쪽 출구로 가다 보면 꼬맹이 그룹이랑 합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마침 도착했네요.”
이나은이 가리킨 방향에선 공격팀 헌터들과 괴수 무리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기에 합류하는 걸 저희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요. 음- 정현 헌터랑 임수연 헌터를 둘러싸고 삼각형 모양으로 편대를 짜서 저기까지 가죠.”
“알겠어. 그런데 둘 다 싸울 수 있어?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잖아.”
김화영의 반문에 이나은은 그제야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몸이 가볍긴 하네요. 그 많던 상처도 하나 안 보이고.”
“오! 수연이 스킬 진짜 최고네.”
“스킬이요?”
수연이가 얼굴을 붉히며 새로 생긴 스킬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 이나은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는 스킬까지 있다고요? 이렇게 사기적인데 부작용은 따로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은아, 싸울 수 있으면 이제 슬슬 도와주면 안 될까? 나 카드빨이 거의 다 떨어졌거든.”
“아, 네! 임수연 헌터, 감사하다는 말은 여기서 나간 다음에 제대로 할게요.”
김화영의 재촉에 이나은은 제대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플레이어 ‘이나은’이 ‘겨루기 준비’ 상태가 됩니다.]
[플레이어 ‘이나은’이 ‘정권 지르기’ 기술에 성공하였습니다.]
[1점 득점으로, ‘힘’이 2배 적용된 피해를 입힙니다.]
[S급 괴수 ‘빅풋’을 퇴치하였습니다.]
이나은이 선두에서 길을 연 사이, 현신 준비는 어느새 1/3 지점에 다다라 있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33%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33%네.”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떨쳐내며 이나은의 뒤를 따라나서려는 순간.
「업데이트 속도가 느려서 약간 답답한 것 같네요.」
「템포를 높여 볼까요?」
[‘캠비온 녹스’님이 패치를 진행합니다.]
“패치?”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34%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35%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40%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50% 완료되었습니다.]
“현아,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지 않아?”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60%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70%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80% 완료되었습니다.]
“서둘러 여기서 나가야 해요!”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90% 완료되었습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 준비가 100% 완료되었습니다.]
「마음껏 분노 표출하시길.」
저 망할 ‘캠비온 녹스’ 자식!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피의 살육자’님이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봅니다.]
우리의 바로 뒤, 부서진 동상에서 엄청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를 모두 가린 빛줄기는 이윽고 사방으로 갈라지더니 주경기장 벽에 부딪혀 사라졌다.
“저게 뭐야?”
빛이 사라진 동상의 위엔 희뿌연 연기가 어떤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그 형체가 무엇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부서진 동상의 주인.
[‘저염식 전도사’님이 현신합니다.]
형체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띠자 새로운 글씨들이 새겨졌다.
[인과율이 개입합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초월력 사용이 제한됩니다.]
[찰나의 초월력 사용만 허가됩니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현신은 한 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박물관에서 볼 법한 갑옷을 두른 젊은 남성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주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그 위압감에 일행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믿기지 않지만. 아니, 믿고 싶지 않지만. 저 남성의 정체는 초월자.
「아아- 통탄하도다.」
본인의 동상을 부순 인간들에게 신벌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저염식 전도사’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저염식 전도사’님의 고유 결계 ‘소금의 결계’가 생성됩니다.]
그의 검에 하늘은 반으로 갈라지며 엄청난 양의 소금 결정을 쏟아냈다.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소금 결정은 검 끝에 모였다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소금 결정으로 이루어진 기둥들이 주경기장 벽을 따라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든 출구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십 인의 신하’가 등장합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갈라진 하늘에선 소금 결정으로 이루어진 열 명의 병사도 등장했다. 각기 다양한 무기를 장비한 소금 병사들은 ‘저염식 전도사’에게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염식 전도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에 섰다. 그가 아래를 향해 손을 뻗자 땅에서 소금 결정들이 솟아오르더니 왕좌를 만들었다. 그는 소금으로 이루어진 왕좌에 앉아 검을 다시 허리춤에 찼다. 검을 내려서인지 하늘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금 성의 지배자.
그의 모습은 딱 그러했다.
「나아가 이 땅을 더럽히는 흉물을 쓰러뜨려라.」
초월자가 내린 첫 번째 명령. 위엄있는 그의 명령에 소금 병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괴수를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금 병사는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거구의 몸을 이끄는데도 움직임은 김화영만큼이나 민첩했으며, 공격은 송태섭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런 소금 병사의 공격에 괴수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일방적인 전투 끝, 소금 병사는 마침내 모든 괴수를 쓰러뜨리곤 다시 ‘저염식 전도사’의 앞에 무릎 꿇었다.
“우리를 도운 건가?”
송태섭의 물음의 답변은 ‘저염식 전도사’가 대신했다.
「우리의 분노를 표출해라.」
초월자의 새로운 명령에 소금 병사들은 무기를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김화영 헌터 스킬은 이미 쓰신 거죠?”
“응. 아까 지하 통로에서 썼어.”
“그러면 꼼짝없이 싸워야 하네요. 그나마 현신이 1시간 동안 유지된다고 한 게 다행인 건가.”
“뒤로 물러서. 저자는 내가 상대할게.”
우리를 향해 제일 먼저 달려든 병사는 대검을 장비한 여성. 수심 가득한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와 송태섭이 검을 맞댔다.
“힘이 너무 세잖아.”
위에서 찍어 내리는 소금 병사의 대검에 송태섭의 무릎은 점차 굽어졌다.
“이것까지 쓰고 싶진 않았는데.”
[스킬 ‘최후의 숨결’이 발동됩니다.]
[스킬 ‘최후의 숨결’로 인해, 플레이어 ‘송태섭’의 랭크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스킬 ‘최후의 숨결’로 인해, 플레이어 ‘송태섭’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한 시간 뒤 플레이어 ‘송태섭’은 ‘전투 불가’ 상태가 됩니다.]
[‘사자의 아들’님이 플레이어 송태섭의 용맹에 감탄해 울부짖습니다.]
[‘영웅들의 지배자’님이 플레이어 송태섭의 발버둥에 진저리칩니다.]
송태섭이 처음 보는 스킬을 쓰자 소금 병사는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하나의 소금 병사가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곧장 송태섭 쪽으로 달려들어 거대한 창을 휘둘렀다.
“저도 송태섭 헌터에게 가담할게요.”
송태섭에게 향하는 창을 걷어차는 것으로 이나은은 두 번째 병사와의 근접전을 이어갔다.
“현아, 조심해.”
막 시작된 전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어느새 세 번째 병사가 철퇴를 내 쪽으로 내리찍고 있었다.
김화영이 서둘러 내 앞으로 튀어나와 단검 두 자루로 그를 막아보았으나 힘에서 밀려 저 멀리 튕겨 나갔다.
“김화영 헌터!”
날아간 김화영이 어찌 되었는지 살필 여력은 없었다. 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곧 철퇴가 머리부터 짓이길 거라고 알리고 있었으니.
죽음이 코앞에 닥쳤다는 생각에 절로 눈이 감겼다.
“어?”
하지만 몇 초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실눈을 뜨자 한 외팔 검사가 철퇴를 든 병사와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오라버니, 겁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화가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