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요리사-49화 (50/168)

[10. 세 번째 판결]

기나긴 공방전은 공격팀의 승리로 끝났으나, 대다수의 헌터가 현신한 초월자와 전투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는 치료부터 하기 위해 일단 이곳, 이화 일행이 지내던 버려진 아파트에 오게 되었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헌터들과 함께 부상자들을 눕히고, 조용히 발코니로 빠져나왔다. 우리가 자리 잡은 층은 삼층이었지만, 주변에 남아 있는 멀쩡한 건물이 없어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난간에 기댄 채 거리를 바라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잔하실래요?”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나은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을 갖고 발코니로 나왔다.

“나야 고맙지.”

“설탕은 안 넣었거든요? 쓰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냥 드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컵을 받아들자 이나은은 자연스레 내 옆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저희끼리라도 공방전에서 승리한 거 자축할까요?”

“응, 그러자.”

컵을 한 번 부딪친 뒤, 우리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몸을 녹이며 거실 쪽을 바라보니, 헌터들을 치료하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수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수연이의 옆엔 김아람이 달라붙어 치료를 돕고 있는 듯했다.

“근데 춥지도 않으세요? 왜 여기서 찬바람 맞고 계세요?”

“어차피 치료받을 곳도 없는데, 괜히 저기에 있다가 수연이한테 방해될까 봐 비켜준 거야.”

“하긴. 저도 방해 안 되게 여기 있어야겠네요.”

이나은의 말을 끝으로 우린 한참을 침묵한 채 커피만 홀짝였다. 침묵은 커피를 거의 다 마셔갈 때 즈음 깨졌다.

“오라버니, 여기 있었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곧 시련이 종료되니까 오빠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묻고 싶어서.”

이화의 물음에는 이나은이 대신 답했다.

“저희는 강이란 헌터 잡으러 서울로 갈 거예요.”

“너희도 어지간히 당했나 보네.”

“‘너희도’라면?”

이나은이 말꼬리를 잡자, 이화는 강이란 헌터에게 자신의 동료 셋이 목숨을 잃은 사실을 담담히 말해주었다.

“어쨌든. 우리 일행하고 목적지가 겹치는 거니까, 강이란 헌터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행동하는 게 어때?”

이화의 말에 이나은은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래도 일행을 합쳤을 때의 이점을 재는 듯하다. 물론 나야 함께 움직인다는 데에 반대할 건 없었다. 이번 공방전을 통해 이화 일행의 전투력도 충분히 증명되었고, 무엇보다 동생하고 또 떨어질 순 없었으니.

“좋아요. 그쪽은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이번 시련에서 강이란 헌터에게 동료를 죽인 죄를 물지 못했으니까. 음- 다음 시련이 시작되면 강이란 헌터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로 천천히 진격해야겠지?”

“천천히 진격이요.”

이나은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강이란 세력의 본거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었다.

“서울로 가서 잔당들을 처리하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저희가 그 자식과 연결점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어요. 우선 거기로 가보죠.”

“좋아. 그럼 서울 지도가 필요하겠네. 근처에서 구할 수 있나?”

“그럴 필욘 없어요. 저흰 거기로 단번에 갈 수 있거….”

이나은의 말은 허공에 울려 퍼진 종소리에 묻혔다.

자정이 됐음을 알리는 듯, 종소리는 열두 번 뎅 뎅 울리고 난 뒤에 멈추었다.

종소리가 멈추고 모두의 눈앞엔 글씨가 새겨졌다. 세 번째 시련의 종료를 알릴 때가 온 것이다.

「세 번째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공방전은 모두 강제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상이 남아 있는 구역, ‘공격팀’이 공방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실패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해당 공격팀의 플레이어 한 명만이 생존합니다.]

[동상이 남아 있는 구역, 공방전이 ‘방어팀’의 승리로 종료됩니다.]

「공방전이 끝나지 않은 곳이 무려 절반 가까이 되었었네요.」

「물론 이젠 방어팀의 승리로 종료되었지만요.」

[‘번쩍이는 투구의 수호자’님이 방어에 성공한 이들의 강인함을 기립니다.]

[‘생각하는 자’님이 공격에 성공한 이들의 용맹을 칭송합니다.]

「공방전은 다들 어떠셨나요?」

「특히 공격팀! 제가 준비한 선물 어땠어요?」

「동상을 부수면 나타나는 강력한 괴수들도 괴수들인데, 제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선물은 위패 쪽이었답니다.」

「힘겨운 싸움 끝에 마침내 위패를 부수고 승리감에 취할 때.」

「때마침 이성을 잃은 채 현신한 초월자님들!」

「정말 완벽하게 절망스러운 상황이지 않았나요?」

「아, 이미 대다수가 현신하신 초월자님께 죽임을 당해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태군요.」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는 공방전이었다.

처음 시작할 땐, 공격팀에게 유리하나 싶었더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승리한 후에 현신한 초월자까지 상대하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하늘을 찢고 거대한 창을 내리꽂는 초월자를 어찌 상대한단 말인가?

“역시 공격팀 대다수가 마지막 단계에서 꺾였나 보네요.”

“우리가 운이 좋았지.”

만일 비석의 내용을 유심히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시 ‘캠비온 녹스’의 악랄한 수에 당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자’님이 동상의 주인들을 추방할 것을 명합니다.]

「아차차, 까먹을 뻔했네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신하여 초월력을 행사한 초월자님들은 규칙에 따라 후원 자격을 잃게 됩니다.」

「공방전의 재미를 한껏 살려주셨으나, 규칙은 규칙이니 어쩔 수 없네요.」

「해당 초월자님들과는 다음에 좋은 기회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영의 사내’님이 우아하게 잔을 들어 후원 자격을 잃은 초월자들을 위해 건배합니다.]

[‘낮은 시선의 소유자’님이 다른 초월자에게 휘둘린 초월자들에게 눈살을 찌푸립니다.]

이후 많은 초월자가 후원 자격을 잃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새겨졌다.

“오빠, 좀 이상하지?”

“어떤 게?”

“현신하신 초월자님들은 처음부터 위패를 부수면 이성을 잃은 채 현신하시도록 정해져 있었을 거잖아.”

“그랬겠지.”

“저분들로선 그저 시련 진행을 도운 건데 규칙을 어겼다고 후원 자격을 잃는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이화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한껏 목소리 낮추어 말했다.

“신적 초월자님께 휘둘릴 정도로 약한 처지라 백지 세계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는 말 기억나?”

“응. 기억나지.”

“혹시 그 말이 초월자님들 사이에도 힘에 따른 계급이 존재한다는 뜻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힘이 약한 초월자들은 이번 시련에 이용당했다는 뜻이 된다.

“일리 있네.”

“이걸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일단은 잘 기억해두고 있자.”

알겠다는 말과 함께 이화는 뭔갈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화가 이상하다고 여긴 이상, 초월자 간 힘에 따른 계급이 존재한다는 건 중요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그게 어떤 면에서 중요한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계급에 따라서, 그러니까 초월력이 강약에 따라 시련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이 달라지는 걸까?

초월력의 강약에 따라서….

어?

‘이 몸의 초월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방금 뭔가?

뭔가 중요한 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새롭게 새겨지는 글씨들 탓에 집중이 흐려지고 말았다.

[‘시련’이 종료됩니다.]

[생존한 플레이어들은 다음 ‘시련’에 진출하게 됩니다.]

「약속했던 보상을 드려볼까요?」

[82032-B 구역의 공격팀에게 동상에 깃든 보상이 지급됩니다.]

[‘캠비온 녹스’의 박수를 받습니다.]

[‘매력’이 1 상승합니다.]

보상이 겨우 매력 1 증가? 그마저도 내겐 적용되지 않아 전혀 쓸모없는 보상이다. 이딴 것 때문에 중요한 걸 놓쳐버리다니.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준비한 보상이랍니다.」

「너무 좋죠?」

[‘경계를 넘나드는 광대’님이 보상에 만족하며 온몸에 포도주를 적십니다.]

[‘번개의 아내’님이 정당하지 못한 보상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다음 ‘시련’도 초월자님들께 즐거움을 주길 바라며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 볼까요?」

「그전에 ‘송제대왕 님의 판결’이 있겠습니다!」

[송제대왕의 판결이 시작됩니다.]

[동상을 부수며 조상을 가볍게 여긴 플레이어들에 분노하며 송제대왕이 유죄 판결을 내립니다.]

[U+2641 행성의 죄악 수치가 10 상승합니다.]

「세 번째 판결 역시 유죄 판결.」

「이제 죄악 수치가 30이 되었네요.」

「플레이어 여러분, 조금만 더 분발해주시길 바랍니다!」

[‘알 수 없는 자’님이 만족합니다.]

[‘오를레앙의 성처녀’가 기도를 읊조립니다.]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 보죠!」

「지난번 안내해드렸던 것처럼, 전속 계약한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은 후원자님께서는 다음 시련부터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아직 전속 계약한 플레이어가 없다면, 이번 시련에서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의 난이도를 조정 중입니다.]

[오관대왕의 심판]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4일 뒤 공개.

- 성공 보상 : 다음 시련 진출 및 상점 확장

- 실패 페널티 : 해당 구역에 SSS급 괴수 출몰

- 만일 전속 계약한 플레이어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경우, 후원자님께서는 더 게임에 참여할 수 없으니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전속 계약할 대상 선별은 이번 시련까지 가능합니다.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오관대왕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행성 곳곳에 ‘야누스의 출입문’이 생성됩니다.]

[‘캠비온 녹스’님이 모든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후원 미션’을 등록합니다.]

「아, 참고로 제 ‘후원 미션’을 거부한다면 자동으로 이번 시련에서 탈락하게 된답니다.」

[후원 미션]

- 대상 플레이어 : U+2641 행성 생존자 전원

- 클리어 조건 : 4일 이내에 ‘야누스의 출입문’ 중 한쪽 문을 선택하여 통과할 것.

- 성공 보상 : 없음.

- 실패 페널티 : 없음.

- 본 후원 미션을 클리어 하지 못할 경우, ‘시련’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Y]

「물론 거부는 못 하시겠지만요.」

[U+2641 행성에 ‘검수지옥’이 구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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